제10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취재기

건반 위에서 빛난 우리의 젊은 피아니스트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역대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은 한국 출신 연주자들이 열세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콩쿠르 결선 현장에서 만난 우리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체력·음악성·기량 면에서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제10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 결선진출자 1. 한지호
2. 김종윤
3. 샤를 리샤르 아믈랭
4. 손정범
5. 사라 대니슈푸어
6. 김희재

올해 10회를 맞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심사위원의 면면이나 참가국 숫자로 볼 때 한국, 더 나아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경연대회로 자리 잡은 것 같다. 피아노·바이올린·성악 부문이 매년 번갈아가면서 열리는 대회에서 올해 피아노 부문에는 17개국 출신이 예심을 통과했고, 여섯 명이 협주곡으로 열띤 경연을 펼치는 최종 결선에는 한국·미국·캐나다 등 3개국 출신의 신예 피아니스트들이 올랐다.
예심 통과자 쉰여섯 명 가운데 한국 출신이 스물일곱 명이니, 결선 진출자 여섯 명 중 네 명이 한국 출신인 것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매우 당연한 일이다. 역대 대회를 보면 성악이나 바이올린에 비해 피아노는 상대적으로 열세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한국 출신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신체 조건이나 체력·음악성·기량 면에서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콩쿠르 1·2차 예선은 물론이고 결선 연주회에 참석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도나도 대곡에 도전하는 바람에 중간 휴식을 포함해 무려 세 시간 가까이 걸린 음악회를 이틀 연속해서 지켜보았다. 같은 악기, 같은 지휘자, 같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심지어는 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하는데도 사뭇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심사위원들이 뽑은 순위와 비교해서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테스트도 해볼 겸 등수를 매겨보기로 했다. ‘라흐마니노프 콩쿠르’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여섯 명 중 네 명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골랐다. 청중을 배려해 각각 다른 날로 배치하긴 했지만 2번과 3번을 두 명씩 연주해 비교하기도 쉬웠다. 나머지는 브람스 협주곡 1번과 베토벤 4번이었다.
예상 순위는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한국인 남자 피아니스트 세 명의 순서는 심사위원의 생각과 같았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해 1위를 차지한 한지호는 국내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경우다. 에센 폴크방 음대를 거쳐 하노버 음대에서 수학 중이다. 지난해 바트 키싱겐 피아노 올림피아드에서 1위를 차지했고, 2011년 본 베토벤 콩쿠르 2위, 2009년 빈 베토벤 피아노 콩쿠르 3위에 입상한 바 있다. 풍부한 콩쿠르 경험 덕분인지 결선 참가자 중 가장 여유 있고 차분한 무대 매너를 보여주었다. 빠른 악장에서는 손끝의 기교보다는 탄탄한 음악적 울림을 들려주었고, 2악장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센티멘털리즘을 담백한 서정성으로 승화시켰다. 가장 무난하고 교과서적인 해석을 보여주었다. 오케스트라와 호흡도 잘 맞았다.
2위에 입상한 김종윤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원에 재학 중이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골랐는데 젊은 패기가 돋보이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속도감 있는 연주와 기교는 눈부셨으나 다소 연주가 기계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맨 처음 등장해 브람스 협주곡 1번을 연주한 손정범은 2012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2011년 루마니아 제오르제 에네스쿠 콩쿠르 2위에 입상한 바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뮌헨 국립 음대에서 수학 중이다. 무대에 등장한 그는 건장한 체구에 비해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다. 애써 준비한 것에 비해 무대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건반을 잘못 누르는 미스 터치는 라이브 연주의 묘미이긴 하나 빠른 패시지에서는 몰라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자주 터져 나오는 바람에 옥에 티로 작용했다.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충분히 뚫고 나올 만한 타건력이 필요한데 오히려 파묻히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의 흐름도 자주 끊겨 답답한 인상을 주었다.

한국 출신 연주자들이
국제 콩쿠르에
대거 입상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수십 년간
한결같이 연주자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피아노 부문은
장거리 마라톤 같다


▲ 1위 수상자 한지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남자 피아니스트 가운데 유일한 외국 출신으로 나온 샤를 리샤르 아믈랭은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이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골랐는데 빠른 패시지에서도 풍부한 공간감과 입체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감칠맛 나게 낭송한 프랑스 시를 듣는 기분이었다. 기교나 음량 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매순간 개성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올림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더 빠르게 힘차게 연주해야 하는 것은 음악 콩쿠르도 마찬가지다. 특히 성악은 (고음 파트의 경우) 더 높은 소리를 낼수록 유리하다. 고난도의 레퍼토리일수록 음악 자체가 더 빠른 연주 속도와 더 큰 볼륨을 요구한다.
남성 피아니스트에 비해 여성 피아니스트는 ‘더 힘차게’라는 대목에서는 다소 불리하다. 남성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모두 박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여성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나긋나긋한 연주만 들려준다는 법은 없지만 연주가 타고난 신체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볼륨보다는 속도로 승부를 건 연주자도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한 미국 출신의 사라 대니슈푸어로 줄리아드 음대와 커티스 음대에서 공부했다. 그녀의 연주는 길다란 선을 그리면서 빠르게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풍부한 울림이나 입체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음색보다는 눈부신 테크닉을 앞세운 연주자인데 가냘픈 신체 탓인지 피아노(p)로 처리해야 할 부분을 피아니시모(pp)로 연주하여 체력을 비축하는 인상이 역력했다. 따라서 강약의 폭도 극단적으로 넓었다. 속도에 치중하다 보니 여유 있게 연주해야 할 부분도 성급하게 지나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연주 효과는 돋보일지 모르나 올바른 음악적 해석은 아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순서로 등장한 김희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라이프치히 멘델스존 음악원에 재학 중이다. 2012년 남아공 유니사 피아노 콩쿠르 2위에 입상했다. 라흐마니노프에 비해서는 연주 효과가 떨어지긴 하지만 자신의 기량과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베토벤 협주곡 4번을 골랐다. 샤를 리샤르 아믈랭과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음색과 개성의 소유자였다.
최종 결과는 한지호·김종윤·샤를 리샤르 아믈랭·손정범·사라 대니슈푸어·김희재 순이었다. 1위 상금은 5만 달러로 1위와 6위의 상금은 10배 차이다.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는 없지만 다른 콩쿠르에는 청중상이라는 게 있다. 결선 연주회에 참석한 청중의 인기투표로 결정하는데, 1위 입상자가 청중상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하위권 입상자가 받는다. 심사위원단이 선호하는 연주자와 청중이 좋아하는 연주자는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적 개성은 듣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 때문에 적어도 콩쿠르에서는 믿을 게 못 된다.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평가 점수를 최종 심사 결과에 가능한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서라도 주관적 평가보다 객관적 기준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앞서 말한 연주 속도·볼륨·정확성 등이다. 이들 기준에서 감점을 최대한 덜 받은 연주자가 우승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다. 개성은 없어도 무난한 연주, 특별히 돋보이는 부분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실수한 것도 없는 무난한 연주를 선호한다. 콩쿠르에 우승했다고 해서 반드시 연주자로 탁월한 성공을 거두는 법은 없다. 백지 상태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하므로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콩쿠르에 입상하지 않고도 연주자로 성공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출신 연주자들이 국제 콩쿠르에 대거 입상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수십 년간 한결같이 연주자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피아노 부문은 장거리 마라톤 같다.
평소 무대에서 보여준 코리안심포니(지휘 장윤성)의 탄탄한 앙상블과 임기 응변력은 서울국제음악콩쿠르의 ‘하우스 오케스트라’로 등장해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준 이번 결선 연주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콩쿠르 반주에서 보듯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중 세 손가락 안에 충분히 들고도 남음이 있다.

글 이장직(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특임연구원) 사진 서울국제음악콩쿠르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