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열린 모나코 댄스 포럼은 켄 오솔라의 ‘룩스’와 안도니스 포니아다키스의 ‘글로리’, 이르지 킬리안의 최근작인 ‘이스트 섀도’로 꾸며졌다. 특히 이번 모나코 댄스 포럼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초연됐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열린 모나코 댄스 포럼은 켄 오솔라의 ‘룩스’와 안도니스 포니아다키스의 ‘글로리’, 이르지 킬리안의 최근작인 ‘이스트 섀도’로 꾸며졌다. 특히 이번 모나코 댄스 포럼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초연됐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모나코 댄스 포럼이 올해도 성황리에 열렸다. 모나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2008년 첫 출범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 잡은 모나코 댄스 포럼은 세계 각지의 무용단이 참여해 최신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올해 참가작 가운데 현지에서 화제를 불러 모은 몇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본다.
4월 16일 공연된 ‘룩스(Lux)’와 ‘글로리(Glory)’는 제네바 발레가 공연한낸 주옥같은 레퍼토리다. 2010년 초연된 ‘룩스’는 포레의 ‘레퀴엠’에 부쳐 켄 오솔라가 안무한 작품으로, 스물두 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35분짜리 작품이다. 켄 오솔라는 제네바 에콜 드 당스에서 수학했으며, 1992년 이르지 킬리안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에 입단했다.
안도니스 포니아다키스의 ‘글로리’는 헨델과 현대음악 작곡가 쥘리앵 타리드의 작품에 음향 효과를 더해 안무 됐으며, 스물두 명의 무용수를 위한 63분짜리 작품이다. 포니아다키스는 아테네 무용 학교와 루드라 베자르 로잔에서 수학했다. 1994년 보리스 베자르 발레, 1996년 리옹 오페라 발레에도 입단했다. 제네바 발레에서 ‘욕망에 따라’(2004)에 이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봄의 제전’(2007) 등을 안무했다.
포레의 ‘레퀴엠’ 감수성 속에서 피어난 오솔라의 ‘룩스’
‘룩스’는 “그러나 빛은 남으리라(Sed Lux Permane)”라는 라틴어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 켄 오솔라는 제네바 발레 측으로부터 포레의 ‘레퀴엠’에 부친 안무 청탁을 받고 이 곡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데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오솔라는 “포레의 ‘레퀴엠’에는 빛과 색감의 유희가 있다. 이것은 천상적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감성으로 가득 차 있다.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예찬이 넘친다. 이 곡을 만난 후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테마를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라고 밝혔다. 그의 작품에 대한 모나코 현지 관객들의 반응 또한 즉각적이었다. “역시 음악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라는 청중의 코멘트는 이날 절대적인 진리와도 같았다. 이날 무대에서 무대장식과 의상 디자이너를 겸한 장 마크 피상트가 제작한 세트 또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그는 무대 왼쪽에 불을 밝힌 향로들을 서로 꼬아 하늘로 향해 있는 나무처럼 거대한 세트로 구성했다. 미니멀하면서도 상당한 엄숙함과 경건함을 자아냈다.
등과 가슴에 얼룩 무늬가 있는 무용수들의 의상은 혈관이나 내장 같은 인간의 신체 내부를 상징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반은 해골이고 반은 살아있는 몸처럼 보였는데, 이는 곧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오솔라의 안무는 음악이 지닌 내레이션을 동선화하기보다 추상적으로 표현했고 선율의 흐름을 매우 존중한 모습이었다. 그는 포레의 ‘레퀴엠’이 지닌 고운 감수성과 호흡을 재료로 삼고,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음악에 없는 과격함이나 충격적인 발상이나 시도 역시 없었다. 포레 ‘레퀴엠’의 마지막 곡인 ‘천국에서(In Paradisum)’ 패시지에서 두 남녀 무용수가 서로의 앞을 각각 스쳐가며 마치 둥근 고리를 만들듯 반복되는 안무를 펼쳤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페르투와르에 부쳐 펼쳐진 3인무는 남성 무용수들이 여성 무용수를 받쳐 들고 추는 안무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여성 무용수의 다리 동선과 우아한 연속감이 매우 압도적이었다.
안무의 하이라이트는 ‘상투스’에서 무용수들이 조명 안과 밖으로 나뉘어 퍼포먼스를 펼친 순간이었다. 조명을 받으며 펼쳐진 4인무는 무대 옆 어둠 가운데서 펼쳐지는 열두 명의 무용수들의 군무와 함께 가슴 뭉클한 앙상블을 이뤘다. 항아리의 형태가 외관이 아닌 그 안에 존재하는 공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룩스’는 존재적인 허구가 실존적인 형태로 도래하는 과정을 명상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항상 공간과 음악 간의 균형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그 균형이란 불균형을 조명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다”라는 오솔라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힘과 에너지 방향성으로 가득 찬 포니아다키스의 ‘글로리’
형이상학적인 ‘룩스’가 자연의 흐름에 복종하는 동양의 산수화 같았다면, ‘글로리’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던 서양의 관점이 용솟음치는 에너지 자체로 나타났다. 각각의 움직임은 하나의 사건으로, 그들 간의 유기적인 조직성은 모호했다.
‘글로리’에서의 각 움직임은 음악적 에너지에 복종하며 각 개체로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무용수들은 빠른 두 박자의 리듬에 부쳐 거의 한 음마다 한 동선을 선보였는데 뛰어난 재능이 돋보이는 퍼포먼스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 사건들이 빚어내는 역동성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점이었다. 힘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발산하는 방향성을 지닌 현재진행형의 움직임들 말이다. 그 예로 검은 무대 의상으로 연출된 파도 같은 형상은 응용미술적인 형태를 보여주며 감탄을 자아냈다. 오로라 같은 기술이 강조된 미키 쿤투의 조명과 세련된 조화를 이룬 타소스 소프로니우의 의상 또한 내적인 활력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켰다.
포니아다키스가 맡은 무대 디자인은 바로크의 영광을 예찬하는 듯했다. 대칭과 비대칭의 유희,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탐구,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모습과 연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는 동선이 바로 그 예다. 여기에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이야기한 ‘주름’ 개념을 통해 바로크의 정수를 조명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하나의 형태가 주름을 통해 여러 형태로 변주·변형되는 것인데, 여성 무용수가 검은 베일을 돌리고 틀면서 튤립 모양을 만들어낸 거대한 패시지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났다.
마지막 ‘할렐루야’에 부친 군무는 각 무용수들이 거대한 밀도를 지닌 덩어리로 엉겨 붙는 듯한 전율을 선사했다. 작품 처음에 바닥에서 기는 형태로 시작됐던 무용 동선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선 자세로 승화된다.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일까? 황홀경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육체의 절정을 보여준 ‘글로리’는 까다로운 안목을 지닌 모나코 청중들로부터 환상적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시간의 영원성을 흥미롭게 다룬 이르지 킬리안 ‘이스트 섀도’
체코 출신의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의 최신작인 ‘이스트 섀도(East Shadow)’는 2013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초연됐다. 새뮤얼 베킷의 텍스트 ‘어느 것도 아닌(Neither)’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소외된 개체들의 존재론적 문제를 후쿠시마 주변을 강타한 지진과 방사능 위기를 통해 연극화했다. 무대에는 이르지 킬리안이 올리비에 크리토프와 함께 녹음한 텍스트 낭독본이 울려 퍼지고, 여기에 일본의 피아니스트 토모코 무카이야마가 피아노 위에서 연주와 함께 음향 효과를 맡아 들려줬다.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문제작이었다. 무용인 듯하면서도 연극적이고, 연극적인가 싶으면 리듬이 가미된 마임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조각난 동작처럼 구성됐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무용과 연극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졌다.
여기에 제이슨 아키라 소마의 비디오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면을 보여줬다. 회색 벽의 남루한 거실이 보이는 집, 안과 밖을 오가며 두 남녀는 만나고 헤어지며, 테이블을 움직이고, 의자를 끌고 다니고, 모자를 쓰고 벗고,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들여놓고…. 상황의 디테일을 살린 일상적인 제스처들이 무성영화가 돌아가듯 빠른 속도로 끊어지며 투사됐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남녀는 무대 위에 실제로 등장한 자비네 쿠페르베르크와 게리 크리스트가 각각 분했다.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무대는 하나의 상황을 제시했다. 마치 시계 소리처럼 “딱딱”거리는 피아노 음에 맞춰 두 남녀는 테이블 앞에 앉아 느린 동작을 연속적으로 보여줬다. 두 남녀의 동선은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테이블 끝만 스칠 뿐 어느 순간에도 서로 만나지 않는다.
여자가 벽에 손을 댄 채로 떨자 후쿠시마 주변에 발생한 지진을 상징하는 듯 굉음이 들린다. 거대한 파도가 치고, 구름이 피어오르는 천재지변으로 귀결되는 이 모든 과정은 창문 뒤로 투사되는 비디오 이미지로 보인다. 두 남녀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 2악장에 맞춰 슬픈 왈츠를 추며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그들의 시선은 결코 만나지 못한 채 부조리극으로 막이 내린다.
이 작품은 시간의 영원성을 아주 흥미롭게 다루고 있었다. 아무리 짧은 순간에도 많은 사건들은 일어나며,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된 작품의 길이를 본래의 시간으로 환산해 계산하면 실제로는 몇 초에 불과한 찰나의 시간들인 것이다. 이 찰나 동안 우리는 서로를 만나지 못한 채 영원처럼 길고도 한없는 제스처를 반복할 뿐이다.
공연 전부터 “지루하다”라는 소문이 돌았던 ‘이스트 섀도’는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강박적인, 숨 막히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르지 킬리안의 진부한 작품으로 남을지, 탄츠테아터 부퍼탈이 누리는 고전으로 명성을 누릴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