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예술에 나타난 죽음의 해석

감성과 관념의 차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6월 1일 12:00 오전

무용예술은 오랜 역사 내내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서양문화권에서는 무용 속에서 죽음이심미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짙은 반면, 한국에서는 관념적으로 풀어지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무용예술은 오랜 역사 내내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서양문화권에서는 무용 속에서 죽음이심미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짙은 반면, 한국에서는 관념적으로 풀어지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거부할 수도, 외면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죽음은 대개 고통과 공포, 슬픔과 상실, 회귀와 윤회 같은 의미를 내포해왔다. 이러한 죽음은 예술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는 주요 소재였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왔는데, 실제로 문학·미술·음악·연극·오페라에서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무용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무용은 언어와 같은 구체적인 전달 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의도하는 바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움직임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대해서 심미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고, 때론 관념적으로 죽음에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죽음의 모습을 그려온 무용예술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제의의 희생양을 묘사한 ‘봄의 제전’

원초적이며 집단적이고,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성스럽게 여겨지는 죽음은 원시 제의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무리에서 한 명이 선택된다. 주로 순결한 어린 소녀가 선택되는데 어린양처럼 희고 약한 존재라는 점에서 집단의 동정심과 가학심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그녀는 살육의 축제의 주역이다. 제의를 절정으로 이끄는 주역이지만 결국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그 제의를 완성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내로라하는 무용가들에 의해 양산된 1백여 개 버전의 ‘봄의 제전’은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니진스키가 안무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혹독하리만큼 춥고 긴 겨울을 지낸 러시아의 봄에는 새로운 생명력을 싹틔우기 위한 제의가 펼쳐진다. 이 ‘봄의 제전’을 완성하는 것은 한 소녀의 희생이다. 봄 신(神)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순결한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말이다.

가장 강렬한 ‘봄의 제전’으로는 1975년 피나 바우슈가 발표한 버전을 꼽을 수 있다. 불가항력으로 충동질하는 음악에 맞춰 구성원들이 대립적으로 주거나 받거니 하는 춤은 광기 어린 혼돈을 연상시킨다. 한 소녀를 희생양으로 선택한 무리는 이제 집단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녀를 압박한다. 그녀에게 보냈던 동정의 몸짓은 곧 발을 강하게 구르면서 몸을 위 아래로 흔드는 움직임으로 바뀌는데, 그 속에서 공동의 가해자들의 선동 어린 재촉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피로써 제의를 절정으로 이끈다. 죽음으로 마지막 생명력을 불사르는 춤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랑에 죽다, ‘라 바야데르’ ‘백조의 호수’

발레에서 사랑이 이유인 죽음은 빼놓은 수 없는 소재다. 사랑으로 인해 죽고, 사랑을 위해 죽는 연인처럼 예술을 극적으로 빛내는 것도 없기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리라. 때로는 정형화되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랑에 죽는 모습이 비슷비슷하게 재탕되기도 한다. 그중에서 사랑에 죽는 연인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려낸 발레라고 한다면 ‘라 바야데르’와 ‘백조의 호수’를 꼽을 수 있다. ‘인도의 무희’라는 뜻의 ‘라 바야데르’에서는 사랑에 배신당한 히로인이 죽임까지 당하게 되고, 고전발레의 진수인 ‘백조의 호수’에서는 두 연인이 죽음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승리를 이룬다.

‘라 바야데르’에서 사원의 무희인 니키아는 장군 솔로르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많은 발레 작품의 히로인처럼 니키아의 운명도 기구하다. 솔로르가 충성심과 권력욕 때문에 공주와의 결혼을 승낙한 것이다. 결혼식 전날, 최고의 무희로서 축하의 춤을 출 수밖에 없던 니키아는 설상가상으로 공주에 의해 독살까지 당하게 된다. 죄책감에 아편을 마신 솔로르는 망령들의 세계로 들어가 니키아와 조우한다. 천상적인 이미지로 승화된 니키아는 뒤늦게 찾아온 연인을 용서함으로써 희생과 자비의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이때 펼쳐지는 망령들의 세계는 심미감의 극치를 보여준다.

‘백조의 호수’에서 지크프리트 왕자는 성인이 된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숲으로 사냥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백조 오데트의 우아하고 가녀린 자태에 매료된다. 오데트가 진정한 사랑이어야만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하자 지크프리트는 주저 없이 사랑을 맹세한다. 발레에서 남자 주인공은 열망과 욕구 앞에 무너지는 인간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역시 예외 없이 무도회에서 만난 흑조의 팜므파탈 같은 매력에 빠져 또 다른 사랑의 맹세를 하게 된다. 뒤늦은 후회를 하는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와 함께 죽음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승리를 이룬다. ‘백조의 호수’를 비극으로 분류하지 않는 이유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예술에서 사랑을 이루기 위한 젊은 연인의 죽음은 고결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절망 끝의 선택, ‘밤의 여로’ ‘젊은이와 죽음’

현실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죽음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깊은 절망 끝에 선택하는 죽음이 대단히 강렬한 울림을 주곤 한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나 암울한 현실은 절망을 낳고, 그 절망의 끝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죽음은 예술적인 공감과 감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밤의 여로’(1947)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시각에서 그려낸 현대무용 작품이다. 이오카스테가 참혹할 정도로 비극적인 운명을 알게 되는 순간이 펼쳐지고, 아비를 죽인 아들과 결혼한 자신의 현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죽음이었다. 잔인한 운명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녀는 예술적인 설득력을 가진 선택을 한 것이다.

롤랑 프티가 불과 22세에 만든 ‘젊은이와 죽음’(1946)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예술에 나타난 니힐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주위의 모든 환경과 관계가 파괴된 한 젊은이가 깊은 절망 끝에 노란 드레스의 팜므파탈에 이끌려 자살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팜므파탈은 결국 죽음의 사신으로 밝혀진다. 여기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욱 우울하고 장엄하게 가라앉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죽음에 공감하고 감응하도록 이끈다.

 

죽어야 산다는 ‘심청’의 코드

죽어야 산다는 재생(rebirth)의 의미는 한국 고전문학에 있어 중요한 코드 중 하나다. 그 대표적인 예를 ‘심청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재생의 의미는 윤회사상·통과의례와 연결되어 있다.

우선 윤회사상은 중생이 죽은 뒤 그 업(業)에 따라서 또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아버지의 개안(開眼)을 위해 공양미 300석을 받고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이 용궁에서 3년을 보내다가 인간계로 다시 윤회전생하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한편 통과의례는 개인이 새로운 지위의 신분이나 상태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식을 말한다. 심청은 이러한 자기 실현을 위해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으며, 실제로 연꽃 속에서 재생하여 왕후가 됨으로써 신분 상승을 이루어냈다.

‘심청전’은 수많은 예술 분야에서 작품화됐다. 무용에서도 ‘심청’이라는 한국 무용 작품이 여럿 존재하며, 유니버설발레단 또한 ‘심청’(1986)이라는 발레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심청전’의 원전에 담긴 재생의 상징적 코드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국 무용화하든 발레화하든 간에 극적인 절정감을 주는 요소는 인당수에 빠졌다가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

죽어야 산다는 재생의 의미는 윤회사상과 통과의례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국적인 죽음의 모습을 심오하게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해학적인 접근,
‘Soul, 해바라기’ ‘신들의 만찬’

사후(死後)세계를 해학적으로 풀어가는 일련의 작품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죽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이 삶과의 단절이 아닌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국립무용단의 ‘Soul, 해바라기’(2006)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떠난 자식’이라는 주제를 두 가지의 의식적 춤으로 표현한다. 1막 ‘살아있는 자들의 그리움’은 살풀이로, 2막 ‘죽은 자의 그리움’은 진오귀굿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절정의 순간에는 신명 나는 판이 펼쳐진다. 씻김을 통해 죽음이라는 한(恨)의 정서를 애절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국립무용단의 최근작인 ‘신들의 만찬’(2013)은 망자가 산 자와의 인연을 끊고 열시왕(10신)에게 40일간 심판을 받는 동안 산 자는 이승에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굿판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죽음이 삶의 단절이 아닌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면서 이승과 저승을 한 공간에 아우른다. 죽음 이후에 여러 상황들은 진오귀굿으로 풀어내는데, 진오귀굿이란 망자의 한을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가족이 무당을 불러 벌이는 일종의 씻김굿이다. 여러 형태의 굿 중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진오귀굿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해학적인 접근이 우리의 정서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서양의 관점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념적 해석이 될 수 있다. 국제적인 경쟁력이 높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무용예술은 오랜 역사 내내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제의의 희생양’ ‘사랑에 죽다’ ‘절망 끝의 선택’ 같은 서양적인 죽음의 모습도 있으며, ‘재생-죽어야 산다’ ‘사후세계에 대한 해학적인 접근’처럼 한국적인 죽음의 모습도 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서양적인 죽음은 심미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짙은 반면, 한국적인 죽음은 관념적으로 풀어지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 있는 죽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용예술에서 가장 주요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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