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으로 보는 인간과 죽음

연극에 비친 죽음의 세 가지 유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6월 1일 12:00 오전

연극의 죽음에는 거칠게 구분해서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그리스적인 죽음, 기독교적인 죽음,그리고 현대의 죽음이다. 연극이 그 태동부터 서구적인 것이었다면, 연극 안에서의 죽음,죽음을 구현하는 구체성으로서의 몸은 다른 문명권의 몸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오이디푸스의 몸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예수의 몸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피 흘리는 처참한 몸’이다

연극의 죽음에는 거칠게 구분해서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그리스적인 죽음, 기독교적인 죽음,그리고 현대의 죽음이다. 연극이 그 태동부터 서구적인 것이었다면, 연극 안에서의 죽음,죽음을 구현하는 구체성으로서의 몸은 다른 문명권의 몸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오이디푸스의 몸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예수의 몸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피 흘리는 처참한 몸’이다

피 흘리는 몸으로 시작되는 그리스적 죽음

그리스적인 죽음은 비극의 죽음이다. 무대 위에는 피 흘리는 몸이 있다. 크라이탐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에 의해 목욕탕에서 살해당한 아가멤논의 벌거벗은 몸이 있다. 아버지 테세우스의 저주 때문에 말발굽과 전차 바퀴에 갈가리 찢겨 죽은 히폴리투스의 몸이 있다. 성문 밖 개처럼 버려진 오이디푸스의 아들,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몸이 있다. 비극은 항상 피 흘리는 몸과 함께 시작한다.

비극은, 그리고 넓게 연극은 주검을 제사지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죽음은 그러므로 연극의 조건 자체이다.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물인 염소의 그리스어 ‘tragoi’로부터 ‘tragedy’라는 단어가 유래했다는 것은 이 죽음의 제물 없이는 비극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시작하기 위해 놓이는 제물처럼 비극의 시작은 이처럼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죽음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론을 문제 삼는 비극 장르에서 주인공은 작품의 말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시작된 연극은 죽음으로 다시 마무리된다.

비극은 항상 이 비극적 조건 안에 있다. 죽음을 이겨내려 할 때, 죽음을 피하고자 할 때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제물로 바쳐진 처녀를 신이 마지막 순간에 구하고, 대신 그 자리에 염소를 놓는 방식이다. 이를 ‘기계신’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 부른다. 이처럼 이야기의 방식에 의해 혹은 무대 위의 기계적 장치에 의해서 인물이 죽음을 넘어설 때, 미학이 무너지고 연극은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주인공이 온갖 어려움의 끝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끝내 살아남는 모험의 이야기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멀어진다.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의 만남을 통해서 연극은 시작된다. 죽음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비극에서 죽음은 인간에게 무엇이라 말하는 것일까?

죽음 너머에서 오는 소리는 절대자의 소리다. 그리스 비극에서 빈번하게 ‘신탁’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신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며 때문에 그를 ‘죽음’에 쳐해야 한다고 인간을 저주한다. 오이디푸스는 이 모든 저주를 피해 달아난다. 심지어 그는 이 수수께끼 같은 저주의 비밀을 풀어내기까지 한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초월적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것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질문의 답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두 발로 걷고 다시 늙어 세 발로 걷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인간은 결국 생로병사 하는 존재인 것이며, 같은 답 속에서 결국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피 흘리는 몸으로, 테바이를 떠나 죽음을 향해 먼 여정에 오른다.

그리스적인 죽음이 반드시 고대 그리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적인 것이며, 때문에 비극 미학의 구현 속에는 항상 그리스적인 죽음이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 속의 죽음은 그리스적이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주검은 햄릿에게 무엇인가 말하려 한다. 주검의 말은 자신의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죽음을 삶으로 만드는 당부가 아니다. 상왕의 복수를 위해서는 햄릿 자신이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햄릿의 오랜 망설임은 자신을 바로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 놓기 위한 결심을 위한 것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이 비극의 본질이다.

‘맥베스’ 역시 피 흘리는 몸으로 시작한다. “저기 피 흘리는 사람은 누구인가?”가 ‘맥베스’의 첫 대사다. 다만 다른 것은 이 피 흘리는 몸이 살아있는 자의 것이라는 점이다. ‘맥베스’는 ‘죽지 않는다’는 환상에 관한 연극이다. ‘죽음’의 필연성을 말해주는 그리스 비극의 신탁과 달리, 맥베스에서 무당의 예언은 ‘불사’의 약속이다. 맥베스는 “왕이 될 것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며, 버남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씻어도 씻어도 피가 묻어나는 손으로 그는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을까? 피 흘리는 몸은 반드시 죽는 몸이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나든 제왕절개로 태어나든 간에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연약한 인간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긴 시간 속에서 숲도 변화하고 움직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눈먼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맥베스’는 자기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오이디푸스의 발버둥을 되풀이하고 있다. 권력은 영속하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며, 그가 그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넘쳐나는 죽음, 즉 확연하게 자기 한계를 지시하는 것들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맥베스의 죽음은 환상 없이 자기를 인식하는 죽음이다.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비로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그는 이제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삶이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죽음

피 흘리는 몸이지만 죽지 않는 몸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피 흘리고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몸이 있다. ‘대속’이라는 기독교적 방식은 분명 제사의식의 염소 또는 희생양과 닮았다. 하지만 ‘부활’은 그리스적 죽음과 전혀 다른 방식의 죽음이다. 기독교적 죽음은 비극 밖에 있는 죽음이다. 그리스 비극의 죽음이 인간 존재의 절대적인 무상성을 전제로 한다면, 기독교적 죽음은 무가치한 삶이 절대적 가치 속으로 용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가시적 세계에 스스로를 노출하며 개입하지 않는다. 혹은 노출한다 하더라도 구원받는 대상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피 흘리는 것은 항상 어떤 숭고한 가치를 위한 것은 아니다. 우선 인간은 세속적 욕망을 끝까지 소진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허무에 빠져 자살하려 한다. 이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그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 영혼을 가져가는 계약을 한다.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가 비르길리우스에게 안내되어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듯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안내로 세상을 여행한다. 결국 자살의 결심과 이어지는 메피스토펠fp스와의 동행, 그리고 다시 그가 행복을 느끼고 죽는 순간까지가 하나의 죽음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 사이에는 하나의 사건이 개입한다. 그것은 이 죽음이 단지 인생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행복한 죽음이 되게 하는 사건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경험이다.

단테가 비르길리우스의 안내의 끝에 천국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후 새로운 삶을 부여받듯이,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취하려 할 때 신은 그를 구원한다. 죽음은 바로 구원이라는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지 기독교적인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게오르크 카이저의 ‘칼레의 시민들’에서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칼레라는 도시 자체를 구하려는 의지를 담는다. 그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공동체에 생명을 되돌려주는 대속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적 죽음, 예수의 죽음과 형식적으로 같은 것이다. 죽음과 함께 삶이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죽음, 이것이 부활인 것이다. 삶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비극 밖으로 나가는 것이며, 이를 ‘낭만적’이라 부른다.

2014년 대한민국의 봄,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이야기

현대 연극에서의 죽음은 그리스 비극의 죽음과 더 가깝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아버지 윌리는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이제는 직장에서 무용한 존재로 평가되어 실직한다. 집 한 채를 사기 위해 평생 은행 빚을 갚아왔지만 정장 그 집을 이루는 본질인 그의 가정 안에서 가장 소중한 그의 아들의 삶은 망가져버렸다.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고, 필연적으로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리는 무상한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리스 비극과 동일하게 비극에 속하는 것이다. 소위 ‘운명’이라고 이야기하는 자리에 ‘자본주의’가 들어선 것이 차이일 뿐이다. 직접적으로 죽음을 다루지는 않지만,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그리스 비극과 동일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부동성 속의 고통”은 그리스 비극인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주제이기도 하다. ‘부동성’은 사실상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이며, 그와 같은 것을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봄 대한민국은 가슴 아픈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비극적’ 사건은 ‘비극’ 그 자체는 아니다. 비극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서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세월호에서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니 일어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그 생명들은 한낱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되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이 사건을 연극적으로 이해할 때 그 주제는 반대로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구할 수도 있었던 삶, 구해야만 하는 삶을 구하지 않은 비겁, 무능, 거짓, 욕심에 관한 것이다. 결국 이 가슴 아픈 ‘비극적’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코미디’인 것이다. 비극은 죽음을 통해 인간의 존재 양식을 바라보고, 희극은 삶을 삶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공격하는 형식이며 이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삶을 되돌려주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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