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18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이미아직’은 지난 일을 수식하는 ‘이미’와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아직’의 합성어다. 주제는 죽음이고, 주재환의 도깨비 그림과 홍남기의 애니메이션이 고유한 장식을 더했다. 박민희의 가곡은 한국적·고전적·동양적 느낌을 함축해 안무가가 추구한 작품성을 제시하는 데 기여했다.
1·2장의 춤 이미지는 대무·접촉, 3·4장은 광기 어린 몸짓과 극적 꾸밈으로 구성되었다. 어둡던 무대 전체에 조명이 들어오면 한쪽에 자리한 장구·피리·가야금 등의 연주자가 보인다. 박수 치기를 반복하며 흐느적거리는 남자, 유연성이 뛰어난 또 다른 남자, 강시처럼 뛰는 여자들이 덩어리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금세 때리거나 배 위에 올라서서 서로 가해하는 군상을 형성한다. 소리 지르는 남자들, 리듬체조 선수만큼 유연한 여자의 허리 재기, 머리채를 잡은 군무의 난장, 북춤을 추듯 등판을 때리는 것이 전반부의 주요 동작이었다.
무릎으로 걷기·뒹굴기·곡예적 비틀기와 막춤, 바닥에 몸을 던지는 자해 행위, 물구나무 선 남자, 신문지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부토처럼 기괴한 표정을 짓는 남자, 꼭두각시 음악에 지전을 흔드는 여자, 신체의 노출은 ‘넋전 춤’에 해당되는 장면이다. 배경막 앞 기둥 모양의 세트가 넘어지고 피안의 세계로 사용되는 무대 뒤 조명을 향해 모두가 다가간다. 느린 행진 후의 암전, 그리고 기차 소리가 최면에서 깨어나라는 신호를 보내는 에필로그다.
‘이미아직’을 보는 내내 “작품이 반드시 실제로 만들어져야 할 필요가 없으며 고안이나 의도로 충분하다”라는 한 미학 서적의 문구가 맴돌았다. 프로그램에 적힌 방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가 과연 얼마나 춤으로 전이되었는가. 그 자체의 논리가 명확한지를 따지기보다는 차라리 말로만 작품을 끝낸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편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주제 면에서 안무가는 “죽음을 삶의 연장선에서 보는 동양적 세계관에 주목했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면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도 저승을 굳게 믿었다. 현세에서 지혜로 깨끗해진 사람은 하데스의 별들 속에서 육신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마지막 말은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가겠지만 누가 더 좋은 운명을 만나게 될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였다.
추상적 내용과 장의 구분을 제시해놓고 줄곧 즉흥성을 추구한다는 방임적 안무의 변도 모순적이다. 볼링공 역할을 하는 여자 군무, 개를 다루듯 반라로 부름을 당하며 끌려 다니는 인간들, 입에서 비누 거품을 쏟아내는 남자의 모습은 자주 본 듯한 해프닝이다. “아이고” 소리는 자기 복제적이고, 무용수들의 즉흥에 의존하는 동작 구성은 지루한 반복이자 낭비되는 몸짓이 되기 쉬우며 작품 간의 변별력을 떨어트린다.
‘추상’과 ‘모호함’의 구분은 창작춤의 주요 과제다. 안무가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을 넘어서는 춤”이란 무엇인가? “죽음 자체로 뛰어든 인간의 열렬한 몸적 경험”은 또 어떤 것인가? “장례는 곧 축제이자 놀이다”라는 정의에 관객이 편하게 공감할 수 있었는가?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예효승을 비롯한 14명의 출연진은 국립현대무용단의 무용수답게 혼신을 다한 연기로 무대를 빛냈다.
사진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