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림 1932~2014

음악에서 글을 건져 올린 선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우리 시대의 음악 문인 안동림이 2014년 7월 1일,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번거롭지 않게, 소박하나 따듯하게’라는 말로 후사를 당부했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가족만이 모여 조용하고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후 안동림 선생을 아끼는 지인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7월 22일 풍월당에서 추모음악회가 마련됐다. 평소 선생이 좋아하시던 음악이 흐르는, 따뜻하고 소박한 이별의 자리였다. 많은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그 이름 세글자를 다시금 각인하는 시간이었다. 안동림 선생을 떠나보내는 그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의 아쉬움을 담아, 소박하고도 치열한 시간을 살아온 선생의 흔적을 ‘객석’ 지면을 통해 전한다

어릴 때 가장 충격적인 물건에 접한 것은 유성기라는 기계였다. 사람의 노랫소리가 조그만 바늘을 통해서 울려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유행가를 들었다. 물론 저쯤 떨어져서 엿듣기만 할뿐 절대 그 귀중품에는 접근 금지였다. 그러나 그 신기한 ‘소리 나는 기계’는 곧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만져보는 일조차 금지된 물건이므로 차츰 관심에서 떠나버렸다.

대신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이라는 신세계를 찾은 일이었다. 부모는 기특하게도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부 소년용(일본어)으로 번안한 동서양 고전문학 작품이었다.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무척 가난하고 외로웠던 그 시절(1960~1970년대)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가락이 있었다. “뜰 앞의 추초(秋草)도, 벌레 소리도, 인제는 다 지어서 쓸쓸하고나. 아 백국화야, 아 백국화야, 너 홀로 남아서 정답게 피었고나”였다. 이 노래가 스코틀랜드의 민요 ‘The Last Rose of Summer’(한떨기 장미꽃)라는 사실은 훨씬 뒤에 알았다. 진한 향수와 더불어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고독이 그 노래에 묻어 내 둘레를 감쌌다. 이를 계기로 중학교 1학년 때 배운 노래가 꼬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그런 노래들이 내 클래식 음악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고향을 잃고 사는 인간에게 갖가지 성악곡은 가슴을 저미는 절실한 향수의 노래가 되었다. 온갖 삶의 애환을 가슴 저리게 노래한 오페라 아리아는 더욱더 지병처럼 내 가슴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불러도 소리쳐도 안 오는 이를, 기다리다 시드는 헛된 물망초, 심은 사람 어디서 저 달을 보랴” 읊조리던 음악 선생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 안동림의 유작이 된 ‘내 마음의 아리아’의 서문 중

중학생 시절, 내가 살던 인천시 주안동에는 제법 큰 악기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가게는 음악과 관련된 별의별 걸 다 취급하는 곳이었던 거 같다. 카세트테이프와 매달 인천시향의 티켓을 구매했던 곳도 그곳이었고, 매달 ‘객석’을 구입했던 곳 또한 그곳이었다. 아저씨는 당시 발행되던 ‘월간음악’의 CD부록 재고가 남으면 하나씩 챙겨주기도 하셨다.

그때,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카세트테이프는 검정색 몸체에 노란색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걸 사면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 워크맨에 바로 꽂아 넣었다. 하루는 그 안에 담긴 곡들에 대해, 주인아저씨가 제법 귀찮아할 정도로 물어보니 책 한 권을 건넸다. 안동림 선생이 쓴 ‘이 한 장의 명반’이었다. 상당히 고가였던 거 같은데, 다만 기억나는 건 아저씨는 내게 용돈이 모일 때마다 책값을 조금씩 갚으라고 했고, 혹시 엄마에게 아들이 이런 책 읽는다고 말하면 책값을 당장 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정말이지 그 날 식탁에 책을 턱하니 올려놓자 엄마는 책값을 당장 내주었다.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내용을 알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었다.

고등학생일 때, ‘이 한 장의 명반’은 내 사물함 속에 늘 자리했다. 늘 즐겨 읽었다. 지금 말로 하자면, ‘음악을 글로 배웠다’고 해야 하나.

3년 동안 내 짝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여학생은 플루트를 전공했다. 그 여학생에게 첫 고백을 담은 편지와 함께 그리그의 ‘페르귄트’ 음반을 선물할 때, 이 책의 글귀를 몇 글자 적으면 멋있어 보일 듯해 그 편지에 인용했던 기억도 난다.

대학 시절에 우리 과에는 동양미학 과목이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수강해야 하는 필수과목이었다. 학년과 교수가 바뀌는 강의 첫 시간마다 선생들은 한 학기 동안 교재로 삼을 동양철학 번역본을 추천했다. 선생들은 출신학교도 제 각각이었고 연구 분야도 달랐지만 ‘장자(莊子)’에 있어서는 일제히 ‘현암사 판 안동림 번역’의 ‘장자’를 추천했다.

 

동양인으로서 서양문학을 전공하면서 부자유스러움을 계속 느꼈어요. 그 불편함이 어린 시절 배운 한학 실력을 가지고 ‘장자’를 다시 읽게 만들었습니다. ‘장자’는 전국시대라는 대혼란기에 인간정신의 자유를 가장 먼저 부르짖은 사상가였어요. 문학적 향취도 풍부하고 후대 중국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죠.” – ‘동아일보’ 1997년 5월 20일자 안동림 인터뷰 중

나는 그때 ‘장자’를 번역한 ‘이 안동림’과 ‘이 한 장의 명반’을 쓴 ‘그 안동림’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클래식 좋아하는 학생은 이 분이 쓴 음악 관련 책들 읽어봐요. 재밌어”라며 의문의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음악은 즐기는 데서 왔습니다. 태고적부터 감출 수 없는 흥을 분출하는 수단으로 돌이나 나무를 두드리는 데서 음악이 생긴 거죠. 음악사가들도 타악기가 최초의 악기였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 흥과 음악, 그건 바로 자유의 정신이고 노장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하지요.” – ‘동아일보’ 1997년 5월 20일자 안동림 인터뷰 중

 

전 청주대 영문과 교수인 안동림이 지난 7월 1일 급성폐렴으로 별세하셨다. 3년간 ‘객석’에 연재한 34인의 지휘자 이야기를 묶어 2009년에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를 출간했고, 2011년 79세에 출간한 ‘내 마음의 아리아’는 고인의 마지막 저작이 되었다.

음악평론가·영문학자·동양고전 번역가 등으로 불릴 만큼 다양한 저작을 내놓았던 고인이 남긴 문화적 자산은 ‘읽기’의 즐거움인 것 같다. 고인은 음악의 추상성을 구체적인 글로 구상하고 조각하여 귀로 듣는 즐거움 못지않게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또한 동양철학서 번역에 있어서도 한자와 그 행간에 숨 쉬고 있는 의미를 번역이라는 문화적 행위를 통해 후대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그런 고인의 업적이 기억되고 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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