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리가 그려낸 완벽한 기사도
KBS교향악단 제684회 정기연주회
7월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KBS교향악단은 비르투오소 두 번째 시리즈로 첼리스트 대니얼 리와 R.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키호테’를 선보였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는 R. 슈트라우스가 공연장에 자주 등장하는데, 서울시향과 지앤 왕이 ‘돈키호테’를 선보이는 12월까지 그 향연이 이어질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작곡가와 관련된 기념 해를 잘 못 챙긴다는 세간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러한 행보를 보면 R. 슈트라우스가 서운해하지는 않을 듯싶다.
1부에서 KBS교향악단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과 베베른 ‘파사칼리아’ Op.1을 선보였다. 지휘자 클라우스 페터 플로어의 지휘봉이 올라가자 콘트라베이스의 무게를 중심 삼아 저음 현악기가 단단한 울림을 냈다. 플로어의 지휘는 부드럽게 오케스트라를 감싸는 듯했으나 클라리넷의 연주는 다소 밋밋했고, 플루트와 오보에를 비롯한 목관악기는 운율성이 부족한 연주를 보였다. 이어진 베베른의 ‘파사칼리아’에서 현악기의 피치카토는 쓸쓸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관악기는 앞서 연주한 슈베르트 교향곡 8번보다 안정된 연주를 보였다.
2부가 시작되자 대니얼 리가 등장했다. 대니얼 리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마지막 제자로 열다섯 살에 데카와 5년 전속 계약을 하며 일찍이 주목을 받은 첼리스트다. 최근에는 솔로 활동보다 세인트루이스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대니얼 리의 표정은 여유로워 보였다. 긴 모험을 앞둔 ‘방랑 기사’의 늠름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플로어의 지휘봉이 움직이자 목관악기의 감칠맛 나는 경쾌한 선율이 긴 탐험극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지는 현악기의 음색은 풍부했고, 단원 모두 긴 여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비장함을 보였다.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한껏 젖어 있던 대니얼 리는 어느새 신중한 표정으로 ‘돈키호테’ 주제 선율을 연주했다. 대니얼 리는 활을 넓게 쓰며 자신감 넘치는 연주를 보였다. 변주할 때마다 그 스토리에 맞게 대니얼 리의 표정은 역동성이 넘쳤고, 그가 소리 내는 음 하나하나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돈키호테로 완벽히 분하여 그 캐릭터를 100퍼센트 소화하는 모습이었다.
‘돈키호테’에서 첼로만큼 중요한 악기는 산초 역할을 맡은 비올라다. 이번 비올라 솔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 중인 김영도가 연주했다. 김영도가 그려낸 산초는 다소 둔탁했으나 비올라 특유의 감미롭고 중후한 음색을 잘 살렸다. 이후 오케스트라는 후반부로 갈수록 강렬한 다이내믹을 보이며 스토리를 극적으로 전개했다.
10개의 변주가 끝나고 대니얼 리는 잔잔하게 미끄러지는 글리산도로 자신의 긴 여정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내 청중도 ‘돈키호테’의 힘찬 투쟁에서 벗어나 황홀한 감정으로 현실에 귀환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이어지자 지휘자 플로어는 포디엄에 걸터앉아 대니얼 리에게 앙코르를 요청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니얼 리는 자신이 편곡한 김동진의 ‘진달래꽃’을 연주했다. 긴 여정을 끝낸 방랑 기사는 어느새 고국으로 돌아와 짙은 향수가 담긴 연주를 들려줬다. 한국의 정취를 가득 품은 진달래꽃 내음이 콘서트홀 안에 요동치는 듯했고, 그 아련함이 전달돼 눈물을 보이는 청중도 있었다. 이번 연주에서 대니얼 리는 해석의 진중함과 탁월한 음악성을 보여줬다. 앞으로 이어질 그의 행보에 큰 기대를 건다.
장혜선
온 몸으로 그려낸 명화의 탄생
연극 ‘잠깐만’
7월 29일~8월 10일 대학로 게릴라극장
명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설명을 듣지 않고 그저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만 감상한다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여러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연극 ‘잠깐만’은 이러한 어려움을 풀어주기 위해 유명 작가들의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예술가의 삶과 인간의 감정, 자연의 본질 등을 연극적으로 풀어낸다. 대중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모네·밀레·클림트·뭉크·고흐의 작품을 통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텅 빈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 3명, 대사는 “잠깐만”이 전부다. 짧은 대사뿐이지만 관객과의 어울림을 바탕으로 극을 이끌어가기에 연극을 보고 나온 관객들의 입에선 “이야, 생각 잘했네”라는 말이 나온다. 공연은 각 그림에 따른 재현 동작만 강조할 것이라는 생각은 선입견에 불과한 것을 알게 한다. 관객들은 단순히 명화가 재현된 모습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명화가 그려진 시대와 예술가의 생각 속으로 ‘잠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림이 지닌 여러 의미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대사 없이 명화가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마다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처음 등장하는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에서는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미술 작품 속 여인은 잔잔한 바람을 맞지만 무대 위 배우들은 바람을 강하게 표현했다. 배우의 손에 이끌려 무대로 나온 관객이 배우들을 향해 부채질을 시작하면 배우들은 마치 거센 태풍이라도 맞는 것처럼 연기했는데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한 바람의 과장된 묘사는 그림의 거친 붓 표현을 보여주는 듯했다. 무대로 나온 관객은 모네이고 부채는 붓, 배우들은 그림 그 자체라고 여겨졌다. 관객들이 모네가 그림을 그리는 상황을 지켜보며 모네의 열정, 거센 붓질로 완성되는 바람의 표현 등 그림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포인트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에서는 고흐가 그림을 그릴 당시의 생각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마치 고흐가 자화상을 그릴 당시에 가지고 있던 분열된 자아를 표현하고 있는 듯했는데 너무나 엄숙해서 숨소리조차 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림 속 고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남배우와 달리 나머지 배우들은 양옆에서 민소매 티와 속옷만을 입은 채 격렬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두 여배우는 자신의 몸을 때리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의상을 벗어서 몸의 형체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에 한 꺼풀 벗겨진 고흐의 깊숙한 내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극 ‘잠깐만’은 연극·미술·무용·마임을 적절히 조화시켰다. 여러 장르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상황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들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극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으며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사 없이도 관객과의 호흡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이지혜
역사를 음악으로 기억하는 방법
서울시청소년국악단의 ‘꿈꾸는 세종’
8월 1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매년 여름이면 ‘청소년’을 테마로, 더 정확히는 청소년을 ‘타깃’으로 삼는 크고 작은 음악회가 극장·국공립 단체·기획사별로 등장한다. 대개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주를 이루는 데 반해 올여름 유경화 단장과 서울시청소년국악단은 ‘미스터리 청소년 음악극’이라는 이름으로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소 파격(?)적이면서 흥미로운 공연을 선보였다.
‘세종실록’에 단 한 줄로만 적힌, 세종이 충북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123일간 머물렀다는 ‘미스터리한 여정’을 소재로, 서울시청소년국악단 단원들이 음악을 사랑하고 전파하기에 애쓴 세종의 업적을 조명한다는 스토리텔링이 음악극의 주요 골자였다.
지금까지 반복해온 기존의 음악회 형식에서 벗어나 음악극을 시도했다는 점, 여기에 유경화 단장과 단원들이 영상 속 주인공으로 직접 등장해 공연 주제를 정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극을 이끄는 장치로 사용하면서 영상·무대·음악의 유기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봐온 다른 청소년 음악회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어찌 보면 기본이라 할 부분이지만, 청소년을 위한 공연들 상당수가 그 ‘기본’조차 잊고 있지 않았던가!
무대 위 새로운 시도들도 눈에 띄었다. 대개 무대 중앙에서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국악관현악단을 배치하는 것과 달리, 이번 무대에선 단원들이 악기군별로 개개의 단 위에 자리 잡았고 그에 맞춰 조명도 분류됐다. 시각적으로도 참신했고, 훨씬 정돈된 느낌이었다. 더불어 국악기나 국악관현악단의 구성에 관해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직간접적인 학습과 이해의 폭을 넓혀줬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잡아 클로즈업으로 무대 중앙 벽면에 투사한 것은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이 흥미로워했던 부분 중 하나다. 그보다 앞서 같은 장소에서 열린 ‘청소년 음악회 썸머 클래식’과 비교했을 때 무대 배치 때문인지, 카메라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다양한 각도로 연주를 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이번 공연에는 종묘제례악에서 볼 수 있던 돌로 만든 악기 편경과 음높이를 재는 도구인 율관이 중점적으로 조명됐다. 덕분에 평소 늘 뒤편이나 외곽에 서 있던 편경과 편종이 무대 중심에 자리를 잡았는데, 평소 쉽게 듣기 어려운 악기들의 매력을 잘 보여준 곡이 ‘소리를 담은 돌’이었다.
관현악과 편경, 여기에 행드럼과 베이스가 더해지면서 대극장을 가득 채우는 이들의 연주를 보는 동안 문득 요요 마와 실크로드 앙상블이 떠올랐다. 동서양의 악기를 융합해 서양의 선율과 동양의 흥을 조화롭게 들려주는 실크로드 앙상블처럼, 또는 그들이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어쩌면 우리 단체들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더불어 율관을 제작하는 과정을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로 보여주고, 그것이 연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또한 흥미로웠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아이든 어른이든 1회의 공연을 기억하는 보편적인 방법, 체험과 기록 차원에서 말이다. 공연 전후로 대극장 로비에서 악기를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일반적인 방법론상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으나, 악기별로 1대만 설치해 인파를 다 수용하지 못했고, 다소 형식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덧붙여 프로그램북에 이번 공연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편경이나 율관에 대한 설명, 함께 등장한 다른 악기인 행드럼·철현금·베이스 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면 무대와 개별 작품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어느 연령대를 이번 공연의 타깃으로 삼았던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스터리 청소년 음악극’이라는 테마에 걸맞게 주인공들의 여정을 지도나 추리 일지 같은 형식으로 간단히 작성해 프로그램북에 삽입하거나 별지로 모든 관객에게 배포했다면, 가가호호 아이들의 일기장이나 방학 과제물 노트에 올라가는 호사(?)를 누려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좋은 작품을 그 자체로 느끼는 것에서 더 나아가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지는 결국 대다수 청소년 음악회가 갖는 숙제일 것이다. 김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