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제주국제관악제&제18회 아시아·태평양관악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올해도 제주에는 황금빛 울림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올해 제주국제관악제는 60년 전 제주 관악 운동의 씨앗을 뿌린 ‘제주 관악의 은인’ 길버트 소령을 조명하며 그 뿌리를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정체성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2014제주국제관악제와 제18회 아시아·태평양관악제의 폐막 공연이 열린 8월 15일 오후 8시 제주해변공연장. 첫 곡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관악 작곡가 만프레트 슈나이더가 제주국제관악제를 위해 쓴 ‘제주 심포니’의 웅혼한 울림이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제주합창단과 서귀포합창단, 그리고 제주윈드오케스트라를 필두로 한 연합 오케스트라의 위용만으로도 축제의 대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어 야외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을 향해 무대 위로 수줍은 미소를 잔뜩 품은 외국인 여성이 등장했다.

“제게 지난 한 주는 60년 전, 비극적인 한국 전쟁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나라를 치유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던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곳 제주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쉴 곳과 먹거리를 주는 것 외에 음악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영적인 희망까지 나눠주었습니다. 아버지는 60년 전에 자신이 뿌린 씨앗이 제주국제관악제를 통해 꽃피운 것을 천국에서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축제조직위의 초청으로 저와 남편은 제주에서 영원히 간직하게 될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만큼 저의 아버지를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클라리넷콰이어가 연주한 곡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불러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얼마나 사랑스러운 음률인지요.”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국경과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음악의 힘이자 축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예순여덟 살의 그녀는 바로 찰스 길버트(1912~1998) 소령의 딸 다이앤 아널드였다.

 


▲ 길버트 소령의 딸 다이앤 아널드

60년 전, 제주 관악 운동의 씨앗을 뿌린 길버트 소령

1951년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참전한 미 공군 대령 딘 헤스는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전쟁고아 1,000여 명을 수송기를 이용해 안전한 제주로 이동시키는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다. 헤스 대령의 천사와 같은 행적은 1957년 미국에서 록 허드슨이 주연한 영화 ‘전송가(Battle Hymn)’로 만들어지기도 했을 정도다. 지금도 헤스는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부모 잃은 어린 영혼들은 제주 한국보육원에서 머물게 되는데 길버트 소령은 이듬해 UN 민간기구 협력단체의 제주 책임자로 오게 된다.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던 길버트는 소질 있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나눠주었다. 어디서든 연주가 가능한 관악기는 안성맞춤이었다. 길버트의 지도를 받은 40명이 넘는 아이들로 이뤄진 관악대는 연주하는 어린이나 연주를 듣는 어린이 모두에게 그야말로 ‘생명의 양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일반인에게 신기했던 관악 밴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한국보육원 외에도 오현고·제주중·제주농업중학교에 관악 밴드를 만들어 직접 지도했다. 바로 제주 관악 운동의 도화선이자 씨앗이었다. 특히 오현고 관악대는 먼저 창단된, 바다 건너 ‘육지 학교’의 밴드들이 입시라는 미명 아래 해체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직까지 건재하며 전국 최고 수준의 고등학교 악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오현고에 자리한 음악관의 이름은 ‘길버트 홀’이다.

1953년 길버트 소령이 임기가 끝나 본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제주항에 정박한 군용화물선 앞에서 한국보육원 관악대를 비롯한 밴드들은 환송 연주회를 열어주었다. 부두는 온통 눈물바다였다. 그리고 길버트는 배 위에서 직접 트럼펫을 불면서 땅에 있는 자신의 악대를 지휘했다.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극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오현고 음악교사였던 고봉식 씨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흑백사진으로 담아 지금껏 길버트의 숨결이 생생히 살아 숨 쉴 수 있게 했다. 축제조직위는 3년 전부터 길버트의 자취를 찾기 시작해 1998년 그가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과 딸이 생존해 있는 것을 밝혀내고 올해 축제에 초청했다. 여기에 전쟁 당시 제주를 찾았던 대통령 앞에서 ‘매기의 추억’을 연주한 한국보육원의 ‘클라리넷 소녀’ 유인자 씨를 함께 제주로 초청해 길버트 소령의 딸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제주 관악인들의 자원봉사로 일궈온 축제

1995년, ‘섬, 그 바람의 울림’이라는 타이틀로 국내 여름음악축제의 시작을 알린 제주국제관악제. 제주의 오름과 바람 그리고 관악기만으로도 충분히 축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제주 관악의 은인’으로 불리는 길버트 소령에 관한 이야기를 부활시키며 그 뿌리를 찾았을 뿐 아니라 정체성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그동안 매년 여름이면 세계 최고의 관악 거장과 관악 앙상블, 관악대가 제주를 찾았다. 세계에 내세울 만한 변변한 음악축제 하나도 없었던 19년 전, 제주국제관악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이벤트였다. 통영국제음악제, 대관령국제음악제가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제주국제관악제는 100퍼센트 순수 제주 관악인들의 자원봉사로 일군 쾌거였다.

또한 2000년부터 시작한 제주국제관악콩쿠르는 각국에서 몰려온 관악계의 동량들로 9일 동안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남자에게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이 콩쿠르는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된 세계 수준의 관악 경연장이다. 유포니움·베이스트롬본·튜바·타악기 부문에서 16개국 187명의 연주자들이 음악으로 경쟁하고 음악으로 하나가 되었다. 심사위원은 제주국제관악제 음악감독 스티븐 미드를 비롯해 세계 관악계 최정상에 서 있는 거장들이 기꺼이 제주로 날아와 옥석을 가렸다. 베이스트롬본은 아예 회천리조트에 캠프를 차려 5일간 집중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기에 아·태 지역 관악인들의 유일한 공식기구인 아시아·태평양관악협회에서 추진하는 아시아태평양관악제가 올해로 18회를 맞아 제주에서 함께 ‘나팔’을 불었다.

 


▲ 오이스테인 바드스비크


▲ 예수한

세계적인 관악 거장들이 선사한 부드러운 울림

8월 13일 오후 6시 30분 제주공항에 인접한 해변도로 옆 어영마을 레포츠공원. 축제 속의 축제 ‘저녁노을 음악회’는 붉게 물든 황혼을 배경으로 여전히 불어오는 제주 바람을 폐부 깊숙이 마시며 흘러가고 있었다. 안키네가 부르는 로맨틱한 노래에 이어 휴식 시간이 되자 후반부에 출연하는 독일 미텔하인 카펠레의 스태프가 때 아닌 ‘호객 행위’를 한다. 라인 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와인과 음료를 무료로 시식하게 해준 것. 관객들은 무료 공연에 무료 대접까지 받아 기쁨이 두 배로 늘었다. 진정한 축제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올해 제주국제관악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앨프리드 리드이다. 20세기 관악 작곡가 겸 연주자인 리드는 생전에 제주국제관악제를 여러 차례 참여했고 제주를 사랑했다. 8월 13일 오후 제주아트센터 연습실에서는 ‘앨프리드 리드와 그의 음악’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다음 날 오후 제주아트센터에서는 ‘앨프리드 리드의 작품 세계’를 타이틀로 한 특별 음악회가 있었다. 제임스 반스가 지휘하는 육군 군악대는 혼신을 다하는 연주로 갈채를 받았다. 타이완이 세계에 자랑하는 트럼펫 연주자 예수한이 앨프리드 리드가 자신을 위해 작곡한 트럼펫 협주곡 전 악장을 책임졌다. B트럼펫뿐만 아니라 트럼펫의 사촌 격인 플뤼겔호른과 코넷까지 무대에 내려놓은 예수한은 악기를 ‘갖고 놀았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객석을 쥐락펴락했다.

“월야상(月夜想)입니다. 집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달밤에 우는 것이죠.”

플뤼겔호른으로 연주한 2악장 ‘느린 블루스’에 대해 예수한은 상상의 날개를 더 달았다. 5악장 ‘삼바’가 끝났을 때 홀 안은 환호성이 터졌다.

8월 13일 오후 마에스트로콘서트가 열린 제주아트센터. 청중은 초절기교의 관악 연주에 넋을 놓았다. 튜바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인 오이스테인 바드스비크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바이올린보다 더 현란하게 신기의 묘기를 보여주었다. 누가 튜바를 최저음을 느리게 내는 악기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15일 아시아·태평양관악제의 폐막 공연에서 자신이 작곡한 ‘프누그 블루’에서 목소리와 호흡을 동시에 불어넣은 순환주법을 구사하며 다시 한 번 객석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뿐이랴. 이제 제주 사람이 다 된 음악감독 스티븐 미드는 역시 유포니움계 최고의 마에스트로였다. 15일 공연에서 토머스 도스의 ‘Sir Eu’를 연주한 그는 한 치의 오차가 없이 완벽한 음악을 마음껏 뽐냈다. 밸브를 누르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속주를 하는가 하면 관악기가 가장 부드럽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솜털처럼 가벼운 음색으로 여성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술’을 위한 ‘특별자치도’가 되는 그날까지

정상에 우뚝 선 제주국제관악제에 비해 우리 관악의 현주소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관악의 수준은 관악 밴드의 수가 지표가 된다. 현재 국내에는 제주에 있는 25개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400여 개의 관악대가 있다. 한마디로 형편없는 현실이다. 중국 베이징에만 600개의 밴드가 활동하고 타이완에는 1,900개, 일본에는 무려 1만 5,000개의 개미군단이 관악의 저변을 든든히 받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국제관악제는 국내 관악계의 생명수와도 같은 역할을 감당해왔다.

“한국의 현대, 기아 자동차가 세계를 누비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쓰는 악기는 거의 야마하더군요.” 예수한이 필자에게 던진 한마디에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관악 인구가 적으니 관악기를 만드는 기업도 당연히 없고 일본 악기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주국제관악제의 예산은 약 6억 원 정도로 대관령국제관악제의 4분의 1 수준이다. 출연하는 관악 연주자들이 제대로 된 개런티를 받는다면 어림도 없는 액수다. 제주도는 말로만 ‘특별자치도’를 외칠 게 아니라 강원도만큼이라도 예술에 대해 지원을 해야 한다.

완성도 높은 공연에 비해 홍보와 마케팅 부분에선 자원봉사자들로는 이제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적어도 제주를 오가는 항공기 기내에 축제 6개월 전부터 홍보 책자 하나 정도는 비치해야 하지 않을까. 각 항공사와 공항 측에 협의만 거친다면 충분히 외국 관광객과 육지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제주에서 보내면서 저녁에는 음악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사들도 중국인 관광객을 그저 그런 ‘돈벌이용’으로 대하지 말고 고급문화를 제주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를 위해서는 티켓의 유료화와 예매 시스템이 절실하다.

8월 15일 오후, 용눈이오름을 올랐다. 제주를 사랑한 사진작가 김영갑의 혼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 또한 관악제를 사랑했다. 용눈이오름의 분화구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 바람이 음악으로 화해 제주국제관악제의 바람이 전 세계로 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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