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디나르 페스티벌에서 만난 백건우

그의 심장은 제 역할을 위해 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건우’ ‘미자’. 디나르 페스티벌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각기 다른 애정과 이유를 갖고 모인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페스티벌의 심장은 바로 건우”라고 합창한다. 하지만 백건우와 윤정희는 자원봉사자들 없이 페스티벌이 존재할 수 없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위대한 예술로부터 어떠한 규칙들을 도출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규칙들을 통해서 위대한 예술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은 자연과 가까운지도 모른다. 디나르의 에메로드 해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에클뤼즈 해변은 디나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깊고 크며, 바다의 색채 변화도 다양하다. 눈에 보이는 에메로드 해변의 색채는 태양과 물의 심도가 함께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러니 어쩌면 심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디나르의 전부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바다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는 굳이 어떤 특정 색으로 규정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바탕은 무엇일까? 규정지을 수 없는 푸름일까,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끝없는 색채의 변화일까? 바다를 안고 있는 혹은 바다를 받아들이는, 그러니까 누군가를 껴안기 위해 팔을 둥글게 한 사람을 위에서 본 형상을 한 에메로드 해변에 속해 있으면 자연히 이 형상이 내포하는 자장의 영향에 놓이게 된다. 아늑함과 개방성의 공존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휴식과 충전이 보장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예술가가 이곳을 찾았을 것이고, 백건우도 이곳에 닻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관객을 꿈꾸게 만든 특별한 무대

8월 2일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25회 디나르 페스티벌 개막 연주회의 첫 곡은 1994년, 그러니까 20년 전부터 이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백건우가 연주하는 리스트가 편곡한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였다.

디나르 페스티벌의 개막 연주는 무료입장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이날 저녁에는 약 1,200명의 청중이 찾아왔는데, 오후 9시 연주회를 위해 오후 4시부터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가족 단위로 피크닉을 겸하기도 했다. 브르타뉴 지방에 속하는 디나르는 여름 동안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프랑스 남부와는 달리 여름 기후변동이 잦다. 그런데 페스티벌 개막 연주회 동안에 비가 온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한다. 한 해에는 연주회 시작 몇십 분 전까지 비가 오다가 멈췄는데, 페스티벌을 위해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스펀지로 일일이 의자의 물기를 모두 닦아내고 나서 청중을 맞이한 뒤에 연주회를 했다고 한다. 이날 오후에 비는 오지 않았지만, 청중을 맞이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의자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백건우가 선보인 ‘왈츠’는 일석이조의 곡 선정이었다. 화려한 왈츠로 페스티벌의 서막을 알리면서도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선정된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와의 문학적 연관성도 지녔기 때문이다. 폭력과 파괴의 유혹자인 악마는 사실 우리 안에 늘 잠들어 있고, 이 악마는 불행히도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백건우에 의해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로 변모한다.

8월 8일 스크리야빈의 24개의 전주곡을 디나르에서 연주하는 그는 음악 속에도 악마가 존재할 수 있고, 이 악마를 부활시킬 줄도 안다. 자신의 악을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은 강하고 선한 사람일 것이다. 2010년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솔렌 파이다시, 파리 오케스트라의 수석 단원들 그리고 프랑스 배우 디디에 상드르가 낭송을 맡은 ‘병사의 이야기’는 페스티벌 개막 연주 프로그램으로 무리가 아닐지 생각했지만 기우에 불과했고, 오히려 특별한 선물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곡명만이 잘 알려져 있는 이 곡을 야외 연주로, 그리고 디디에 상드르의 낭송으로 듣는 것은 다른 차원의 감상을 가능케 한다. 아카데미 코메디 프랑세즈의 회원이기도 한 디디에 상드르는 최고의 낭송자다. 그는 관객들이 이야기를 흡입하고, 그와 함께 꿈꾸게 한다.

디나르를 만들어온 자원봉사자들의 힘


▲ 디나르를 만드는 자원봉사자들. 왼쪽부터 미셸 기예, 니콜 기예, 루이 퐁탕, 아닉 보놈, 파트리크 르 그엔, 마리 클레르 뮈사, 니콜라 드 리크, 조엘 드 리크, 미셸 보놈, 마리 테레스 피르노, 알랭 코에페

올해로 25주년을 맞이한 디나르 페스티벌은 이 지역 출신의 음악 애호가인 스테판 부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백건우의 열렬한 팬이었고, 페스티벌 두 번째 해인 1991년에 백건우를 처음 초대했는데, 부테는 백건우의 미국 연주를 듣기 위해서라면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을 정도였다. 페스티벌이 5년째 되던 해에 부테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페스티벌의 존립을 두고 백건우가 음악감독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디나르 페스티벌은 다른 차원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수많은 애호가는 물론이고, 다른 동료 음악가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 백건우의 초대를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는 그의 초대를 받고, 디나르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해 백건우는 디나르 페스티벌에서 첼리스트 알렉산드르 크니야제프와 함께 연주를 했다. 그리고 이 연주회 이틀 뒤에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들을 프로그램으로 한 독주회가 있었다. 크니야제프는 백건우의 연주회를 듣기 위해 자신의 일정을 조정했고, 백건우의 연주회를 듣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연주를 업으로 하는 이가 다른 연주회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일은 분명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페스티벌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페스티벌을 위해 일하고 있는 파트리크 르 그엔 역시 백건우를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한다. 자원봉사자로 일하다가, 2009년에 페스티벌 협회의 대표가 된 르 귀엔은 오늘날 디나르 페스티벌이 독특한 색채를 유지하는 세계적 수준의 페스티벌로 성장하는 데는 백건우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다고 힘주어 말한다.

백건우와 늘 동행하는 배우 윤정희는 이곳에서 ‘미자’로 불린다. 페스티벌 관계자 모두 그렇게 부른다. 이유를 굳이 묻진 않았지만, 미자라는 이름이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발음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영화 속 주인공 ‘미자’와 함께 보았던 몇 년 전 추억을 이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디나르 해변을 걷고,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미자’의 모습을 보는 것에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백건우 역시 ‘건우’로 불린다. 그래서 건우와 미자, 그리고 자원봉사자인 미셸·니콜·루이·마리 테레스·마리 클레르·아닉·파트리크 등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대가족을 이룬다. 디나르 페스티벌의 원동력 혹은 심장은 “바로 건우”라고 모두 합창한다. 하지만 백건우와 윤정희는 자원봉사자들 없이 페스티벌이 존재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전직 의사였던 미셸 봉옴은 10년 넘게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연주자들의 이동을 위해 자동차를 운전하고, 연주회장에서 관객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역시 백건우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백건우가 펜데레츠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마드리드에서 연주할 때 그곳에 있으면서 모든 연습과 연주를 지켜보았다며 그것이 마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같은 표정을 짓는다. 디나르 시의 문화부에서 일하는 아닉 올리베랭은 성악가이자 작곡가로, 과거 디나르 페스티벌의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2000년에 처음으로 디나르 페스티벌에 왔을 때, 나는 그녀가 자작곡을 노래하고 녹음한 음반을 디나르의 관광 안내소에서 우연히 샀는데, 그녀가 관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는 자원봉사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자원봉사자 마리 클레르 뮈사는 디나르 인근에 위치한 렌 대학교 음악학과 교수이며, 디나르 페스티벌의 프로그램 해설을 쓰고 있다. 과거 제과점을 운영했던 미셸 귀에는 취미로 색소폰을 연주하며, 디나르의 아마추어 합창단을 운영하고 있다. 항상 웃는 얼굴의 니콜라 드 리크은 교사이며, 그의 아내 조엘 드 리크도 과거 교사였으며 페스티벌을 위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일상의 백건우를 만나는 시간


▲ 백건우,윤정희 부부

한국어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프랑스어로 얘기할 때, 백건우는 조금 더 많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물론 그가 이 대가족의 구심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무대 밖에서 보는 백건우는 언제나 낯설다.

나는 대개의 사람들처럼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백건우를 조금 더 잘 알고 있다. 한동안은 무대 위 백건우와 무대 밖 백건우를 동시에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시’ 속의 ‘미자’와 디나르에서 만난 현실 속의 ‘미자’, 즉 윤정희가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화 ‘시’ 속의 미자는 그동안 현실 속에서 내가 알고 있었던 미자의 모습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대를 떠난 백건우는 낯설다. 무대에서 백건우는 보이지 않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청중을 환상과 꿈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의 피아노는 파리 근교 퓌토에서 사망한 체코 태생의 화가 프란티세크 쿱카가 그린 그림 ‘피아노 건반-호수’ 속의 피아노처럼 다채로운 색채를 뿜어내며 은밀하면서도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무대를 떠난 백건우는 너무나 평온하다. 그렇다. 일상에서 그가 보여주는 평온함이 그를 낯설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대에서의 그의 심장은 다양한 색채의 피아노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엄청나게 박동하지만, 일상에서의 그의 심장은 그저 제 역할을, 그러니까 다른 모든 사람의 심장처럼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백건우와 20년 넘게 함께 일한 파트리크 르 그엔은 백건우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페스티벌의 준비를 위해 연중에도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하고, 백건우는 겨울에도 일정 기간, 여름 페스티벌 기간 전후로는 대개 3주 정도 디나르에 머물지만 백건우는 음악감독이 된 이후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삶의 원칙이 있고,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평온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거짓과 변명을 늘어놓는 혼란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백건우는 무대 위에서처럼 일상에서도 분명한 삶의 원칙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과 하나의 일을 진행하는 데 생기는 숱한 잡음과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놀라운 힘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일상의 백건우와 무대 위의 백건우가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일 수는 없다. 페스티벌의 모든 관계자가 무대 위의 백건우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일상의 평온한 백건우에게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무료입장으로 모든 관객에게 열려 있는 페스티벌 개막 연주회는 디나르 페스티벌을 다른 페스티벌과 차별화하면서 백건우가 추구하는 디나르 페스티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작품들을 청중과 자연 속에서 나누는 것이다.

올해는 피아니스트 아그네 뒤부아스 쇼베와 배우이자 트롬본 연주자인 마르크 부트렐이 프랑시스 풀랑크의 ‘아기 코끼리 바바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는 아이들을 동반하는 부모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가족들을 위한 음악회가 된다. 그러나 혼자 혹은 커플로 오는 ‘큰 어린이들’도 눈에 띄었다. 백건우의 아이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 때문에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는 페스티벌의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한 해에는 페스티벌의 자원봉사자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를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8월 4일에는 현재 부산의 경성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레베데프가 독주회를 가졌다. 그는 2009년 부조니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는데, 진정으로 주목할 만한 피아니스트다. 오디토리움 스테판 부테에서 브로톤스, 하이든, 베토벤, 파야 등 작곡가들의 색다른 프로그램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연주회를 들려주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그의 하이든은 터치와 음악적 성찰 등 모든 면에서 빛나는 해석과 연주였다.

레베데프는 디나르 페스티벌에서 두 번째 연주하는 것이었는데, 그리고리 소콜로프를 비롯한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디나르 페스티벌에 다시 초대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파트릭 르 그엔의 귀띔이다. 디나르 페스티벌에 초대되는 연주자들은 어쩌면 이미 세계적인 연주자이거나, 앞으로 세계적인 연주자가 될 젊은 연주자들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는 백건우에 대한 존중에, 후자는 젊은 음악가들에 대한 백건우의 식견과 혜안에 기인할 것이다.

문득 디나르 페스티벌이 에메로드 해변과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려 있으면서도 아늑하고,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오늘날 디나르 페스티벌의 고유한 색채와 성공의 규칙들을 도출해내는 것은 간단치 않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페스티벌과 마찬가지로 에메로드 해변을 닮은 백건우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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