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 내한하는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

그들의 정체성은 예술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인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10월 내한한다. 이날 공연은 그의 75세 생일과 함께 예술감독 취임 25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유리 테미르카노프(1938~)를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12월 27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SPO)의 전용 홀인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열린 제3회 ‘예술광장축제’의 개막 연주회에서 슈만의 첼로 협주곡과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지휘하는 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겨울음악축제로 자리매김한 예술광장축제는 테미르카노프에 의해 1999년 창설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예술의 도시입니다. 표트르 대제는 그저 도시가 아닌 위대한 수도, 예술의 도시를 만들었던 것이죠. 여기에는 겨울에 사람들이 살았어요. 부자들이 모여들고 발레와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가구를 챙겨 전원으로 떠났지요. 그런데 소비에트 시대부터 완전히 뒤바뀌어 외국인들은 여름에만 이곳을 찾고 활기를 띠게 되었어요. 저는 이 도시의 겨울에 생명과 영혼을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해 페스티벌을 만들었습니다.”

축제 폐막 공연이 열렸던 2002년 1월 5일 공연 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겨울이야말로 예술의 계절이라며 힘주어 말하던 거장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0년 10월 SPO의 연주를 본고장에서 처음 보았지만 테미르카노프의 맨손 지휘는 볼 수 없었다. 1년을 기다려 축제 기간 내내 테미르카노프를 매일 만나면서 나중에는 그의 인간적인 면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테미리’라는 애칭으로 더 잘 통한다. 이후 지금까지 필자는 거의 매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테미르카노프의 연주를 지켜보았으니 가장 자주 만난 ‘외국인 지휘자’가 된 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테미르카노프는 마린스키 극장의 수장 게르기예프와 함께 최고의 클래식 스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일리아 무신을 사사한 것도 두 지휘자의 공통점인데, 테미르카노프는 마초적인 게르기예프보다 여성 팬이 월등히 많을 만큼 우아하고 귀족적인 면이 도드라진다. 그가 1988년 쉰 살에 필하모니홀의 포디엄을 장악했을 때, 전임자 므라빈스키의 ‘철권통치’에 익숙했던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테미르카노프의 지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시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으로 불렸던 오케스트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음악적인 면도 공산화 이전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물론 기본적인 사운드는 므라빈스키와 같이 정연한 하모니와 투명함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전통에 불어넣은 자유

테미르카노프는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하던 1938년 카프카스 산악 지대의 도시 날치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바르디노 발카르 공화국의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예술 애호가였다. 9세부터 음악 수업을 시작한 그는 13세부터 레닌그라드 영재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곧바로 레닌그라드 음악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비올라를 전공하고 다시 지휘로 방향을 틀어 전설적인 명교수 무신에게 지휘법의 모든 것을 전수받고 1965년에야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듬해 전 소련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한 테미르카노프는 키릴 콘드라신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유럽 투어에서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의 협연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테미르카노프는 승승장구했다. 레닌그라드 심포니에 이어 1976년부터 마린스키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해 1988년 사임할 때까지 므라빈스키 다음가는 인지도를 누렸다. 므라빈스키 시절 테미르카노프는 SPO를 지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창단 후 최초로 가진 단원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새 음악감독으로 선출되었다. 더구나 테미르카노프는 음악적인 전통을 건드리지 않고 악단의 운영 방식에 민주적인 요소를 도입해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 예로 테미르카노프는 1882년 황실 오케스트라로 창단할 때부터 고수했던 19세기 유럽 스타일의 악기 배치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서유럽 오케스트라가 스토코프스키가 고안한 고음 현악기와 저음 현악기가 좌우로 갈리는, 음향 위주의 편성을 지향하며 변화를 주도했을 때 소위 ‘레닌그라드 편성’으로 굳어진 옛 방식을 그대로 지킨 것에 대해 테미르카노프 또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므라빈스키의 음향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진중한 현과 오른편으로 치우친 금관악기의 포효는 정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음반 작업에도 박차를 가해 상당한 양의 작품이 리코딩으로 남게 되었다.

“므라빈스키는 55여 년 동안 아카데믹하고 이상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다이내믹과 정확성, 그리고 일사불란한 앙상블을 요구했죠. 므라빈스키와의 리허설은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맹훈련을 통해 ‘레닌그라드 피아노’라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약음과 단원들이 그 뉘앙스 안에서 믿기지 않는 다이내믹을 실현하게 되었죠. 테미르카노프는 이러한 므라빈스키의 업적에 많은 것을 더했습니다. 로맨티시즘으로 대변되는 레퍼토리의 확장을 통해 테미르카노프가 이끄는 말러 연주는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테미르카노프는 단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번에 다하지 않고 점점 요구 사항을 늘리고 확장해나가면서 자발성을 요구합니다.”

2000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열린 SPO의 바흐 서거 250주년 기념 축제에서 만난 악장 레프 클리쉬코프는 므라빈스키와 테미르카노프와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는데 테미르카노프의 스타일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1802년 러시아에서 유럽 최초로 필하모니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오케스트라가 창단한 것은 비록 200년이지만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은 러시아가 처음이고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었지요. 저는 오케스트라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에 거짓말을 자주 했습니다. 어제 부친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더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요. 러시아의 신흥 부자들은 문화를 TV로 보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는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차이콥스키·무소륵스키 등입니다.”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테미르카노프는 자신과 자신의 오케스트라가 러시아에 문화적인 면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고 활성화시키는 데 앞장서기를 바란다. 그의 꿈은 25년이라는 재임 기간 동안 착실히 이뤄져 이제 SPO는 마린스키 극장과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화사절로 우뚝 섰다.

2011년 이후 3년 만에 테미르카노프가 SPO와 함께 내한한다. 이번 무대는 각별하다. 그의 SPO 취임 25주년과 75세 생일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테미르카노프는 내한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국내 팬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레퍼토리 또한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차이콥스키·프로코피예프·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협연자로 나서 신구의 조화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10월 9일에는 차이콥스키 ‘프란체스타 다 리미니’,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연주하고 10월 10일에는 차이콥스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림스키 코르사코프 ‘세헤라자데’ Op.35를 연주한다. 올가을, 우리 정서와 가장 잘 맞는다는 러시아 작곡가의 음악이 테미르카노프와 SPO의 찰떡궁합으로 펼쳐진다. 테미르카노프의 맨손 지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마스트미디어

테미르카노프/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내한 공연

10월 9·10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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