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회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알프스 풍경 아래 펼쳐진 다채로운 축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알프스 그슈타트산의 청정하고 장엄한 능선을 따라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뮤직텐트·마스터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알차게 구성된다. 축제의 예술감독 크리스토프 뮐러는 “열린 레퍼토리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 바이올리니스트 야니너 얀선과 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가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연주를 마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Raphael Faux

지난 8월, 스위스의 클래식 음악 축제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이 축제는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 음악 마니아를 설레게 했다. 왜 아니겠는가. 동화 속 삽화 같은 알프스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그슈타트에 전 세계의 톱클래스 연주자들이 찾아와 50여 일간 환상의 무대를 선사하니 말이다. 올해 58회째를 맞이한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는 7월 17일부터 9월 6일까지 ‘움직임의 음악’을 테마로, 내공과 명성에 걸맞게 7주 동안 무려 22만 명이 넘는 청중을 불러 모았다.

필자 역시 터질 듯한 기대를 안고 지난 8월 22일, 파리에서 그슈타트까지 7시간의 긴 여정을 떠났다. 여독을 풀 짬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오페라 갈라 콘서트 ‘위대한 목소리’를 보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반반이라고 해두자. 여하튼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바리톤 토머스 햄프슨, 그리고 유시 비에링·엔리코 카루소에 비견될 만큼 수려한 음색을 지닌 테너 조지프 칼레하의 출연으로 공연장은 만원을 이뤘다. 안토니오 파파노/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선사한 첫 곡은 모차르트 ‘세비야의 이발사’ 중 피가로의 경쾌한 아리아 ‘나는 마을의 만능일꾼’. 오케스트라는 재기 넘치는 부점과 트릴로 귀에 익숙한 서곡을 짜릿하게 연주했고, 뒤이어 햄프슨이 아리아의 첫 소절을 부르며 등장했다. 이 곡은 흡사 빠르게 랩을 하듯 노래하는 파를란도(parlando, 말하듯이 연주하라는 뜻)로 유명하다. 햄프슨은 유머 넘치는 미소와 제스처로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대했던 햄프슨의 고음은 들을 수 없었다. 하이C는 커녕 중간C도 바로 내지르지 않고 G를 거쳐 C로 끌고 올라갔으며, 마지막 하이G 역시 강건한 바리톤의 음색은 들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어 발음도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렇게 햄프슨의 첫 무대는 과장된 연기와 치장된 퍼포먼스로 허둥지둥 끝이 났다.

칼레하는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중 네모리오의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렀다. 마치 자연스러운 들숨과 날숨처럼 텍스트의 흐름이 존중된 뛰어난 퍼포먼스 덕분에 연주회장은 달아올랐다. 담라우와 함께 부른 도니체니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영원히 잠든 무덤가에서’는 두 손을 높이 든 채 드라마틱한 제스처와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까지 완주하는 완벽한 고음을 선보인 담라우 덕에 무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푸치니의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은 멜랑콜리하면서도 잘 여문 과일처럼 풍부한 칼레하의 개성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그러나 사운드가 문제였다. 칼레하의 발성은 멀리까지 투사되는 것이 특징인데, 무대 위 배우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재중계되는 그슈타트 공연장에서는 경직된 숨소리까지 울려 퍼지며 부담스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화룡점정은 베르디의 아리아로 담라우가 부른 ‘라 트라비아타’ 중 ‘아! 그이인가’와 ‘언제나 자유롭게’, 그리고 햄프슨과 듀오로 선보인 제르몽과 비올레타의 아리아 ‘오, 가련한 내 운명’이었다. 그녀는 1부에서 선보였던 붉은 드레스와 대조적인 검은 벨벳 드레스로 등장해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곡에서는 깨끗한 발성과 완벽한 하이C로 청중을 압도했다. 수려한 모놀로그를 보는 것 같았다. 악보에 적힌 음표를 읽는 대신 온몸으로 울고 웃으며 회환과 환희에 찬 비올레타의 복잡한 내면을 토로했다.

햄프슨과 담라우의 무대는 오페라가 아닌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이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받쳐주어 가능했던 일이지만, 둘의 퍼포먼스는 오케스트라가 사라진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둘만의 시·공간을 구축했다. 이 아리아는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와 알프레도와 헤어질 것을 길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내용이다. 비올레타가 초반에는 거부하다 점차 체념하며 제르몽의 청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관건이다. 담라우는 최고의 컨디션을 기반으로 테크닉의 난제를 유감없이 해소하며 비올레타와 하나가 되었고, 객석은 일체감에 숨을 죽였다.

햄프슨의 보컬은 제르몽을 표현하는 데 로시니의 오페라를 부를 때만큼이나 부족했다. 그러나 보컬 이상의 초월적 경지에서 텍스트가 지닌 단어 하나하나, 프레이즈 하나하나에 존재감을 뽐냈다. 텍스트가 마치 현존하는 캐릭터처럼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이 점에서 햄프슨이 분한 제르몽이라는 캐릭터는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발성을 강요하거나 인위적으로 인토네이션을 다듬을 필요도 없었다. 단지 텍스트가 품은 힘에 그 자신을 맡길 뿐이었다. 그가 텍스트와 멜로디를 한데 어우르며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리트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 진한 아쉬움을 남겼던 그는 2부에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했다.

완숙한 울림으로 그슈타트 청중을 사로잡은 대전시립합창단


▲ 빈프리트 톨/대전시립합창단이 자넨 교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대전시립합창단

8월 23일, 안토니오 파파노/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야니너 얀선과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미모와 재능 그리고 개성을 지닌 네덜란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야니너 얀선은 율리아 피셔와 함께 요즘 세계 바이올린계를 대표하는 젊은 재원으로 꼽힌다. 버르토크 협주곡 1번은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에게 현정된 곡으로, 1악장의 첫 주제가 마지막 주제로 다시 등장하며 곡을 끝맺는 것이 특징이다. 얀선은 위대한 건축물처럼 분석적이면서도 스케일이 큰 보잉과 디테일한 테크닉으로 버르토크 특유의 역동적인 리듬을 풀어갔다.

이어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의 2막이 연주됐다. 영화 ‘호두까기 인형’의 OST를 여러 차례 연주하기도 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플루트와 클라리넷 특유의 기술적인 힘과 내레이션을 마음껏 뽐냈다. 유수한 오페라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는 파파노와 함께 그들은 클래식한 발레의 리듬감과 표현력이 풍부한 연주를 선사했는데 ‘중국 인형의 춤’이나 ‘꽃의 왈츠’ 등 귀에 익숙한 곡을 연주할 때는 벌떡 일어나 춤추고 싶은 기분이 들 만큼 흥겨웠다.

8월 23·24일 양일간 지휘 아카데미를 참관했다. 축제에 참여한 전 세계의 젊은 지휘자 중 14명이 선정됐다. 그중 두 명은 일본인이었다. 그들은 3주간 레오니트 그린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네메 예르비의 지도하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했다. 겐나디 로즈데스트벤스키는 초빙 교수로 참가했다. 지휘자에 따라 연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한 지휘자는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에서 지휘자가 팔을 흔들 때는 리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음악적 흐름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다시 지휘를 시작하니 템포가 느려지고 색감적 뉘앙스가 표출되어 확실한 차이가 느껴졌다. 잠시 후 범상치 않은 연주가 시작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오케스트라를 실제로 지휘하는 건 학생이 아니라 뒤에서 팔을 흔들던 예르비였다. 77세에도 건장한 체구와 날카로운 눈을 지닌 그는 손가락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예르비는 “손을 통해 음악을 표현하는 지휘가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대화할 때처럼 누군가는 금방 이해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죠. 저에게는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일련의 경험이 있으니 방법을 젊은이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8월 24일, 자넨 교회에서 열린 제러미 메뉴인과 그의 친구들이 펼치는 실내악 연주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넨 교회는 페스티벌이 출발한 곳이자 메뉴인이 데뷔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친구들과 함께 연주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밝혔는데 그의 친구들은 바로 유명한 첼리스트 게리 호프먼과 바이올리니스트 헤닝 크라예루드였다. 세 사람이 연주한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2번 2악장은 각별히 아름다웠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배리 린던’에서 등장했던 선율과 트리오 중 안단테 콘 몰토의 주제는 메뉴인의 거시적인 통찰력과 밸런스 감각 아래 감동스럽게 울려 퍼졌다.

대전시립합창단은 7월 31일 ‘바흐와 패르트의 아름다움’이란 주제로 자넨 교회에서 바흐의 모테트 ‘모든 만민들아, 주를 찬양하여라’와 아르보 패르트의 ‘7개의 마니피카트 안티폰(7 Magnificat Antiphons)’을 연주했다. 8월 2일에는 브루크너의 모테트 ‘55 천사가 보호하니’와 새뮤얼 바버의 ‘아뉴스 데이’, 그리고 누리아 리알을 포함한 네 명의 유럽 솔리스트와 함께 로시니의 ‘작은 장엄미사’를 불렀다. 그슈타트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대전시립합창단의 연주에 대해 예술감독 크리스토프 뮐러와 대화를 나눴다. 그 즐거웠던 시간을 전하며 3일간 숨 가쁘게 이어졌던 음악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글 배윤미(파리 통신원) 사진 Menuhin Festival Gstaad·대전시립합창단

INTERVIEW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예술감독 크리스토프 뮐러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한 대전시립합창단의 연주를 평가한다면.

매우 심오하고 아름다웠다. 지휘자 빈프리트 톨은 서로 잘 아는 친구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부터 나의 앙상블 포이닉스 바셀과 주기적으로 작업해온 동료이기도 하다.

보컬 테크닉이나 텍스트의 이해는 어땠나?

수준이 아주 높았다. 전문적인 기질이 엿보이는 뛰어난 기량의 보컬이었다. 또한 텍스트의 이해도 명료했다. 각 단어가 표출하는 표현성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연주였다.

로시니의 ‘작은 장엄미사’에서는 유럽 성악가 네 명과 대전시립합창단의 협연을 시도했는데 누구의 발상이었나.

두 문화권의 교류를 의미하는 협연은 내 생각으로 계획됐다. 솔리스트와 작품 발상은 내가 맡았고 피아니스트 아이템은 톨이 담당했다. 그 결과 연주회는 환상적이었다. 특히 로시니의 오페라는 오페라적인 형태를 지녔지만 내적으로는 종교음악이기 때문에 놀라운 연출을 할 수 있었다.

현지 청중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호응이 매우 좋았다. 이 지역 언론에서 이처럼 뛰어난 합창 연주가 더 많이 프로그램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서 내년에도 전문성을 지닌 합창단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여러모로 구상 중이다. 대전시립합창단과 또 한 번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싶다. 톨 그리고 합창단 매니지먼트와 이에 대해 논의 중이다.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항상 열린 레퍼토리를 보여주고 있다. 대전시립합창단과의 연주가 당신의 판단력을 관철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나.

바흐와 아르보 패르트를 하나로 묶은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일종의 실험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경험을 반복하고 싶다. 음악은 내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영적인 차원의 음악으로 청중의 눈길을 끌고 싶다.

이번 연주를 통해 느낀 빈프리트 톨 지휘 특유의 특징이 있다면.

그는 카리스마가 대단한 캐릭터에 음악적 표정이 아주 강렬한 사람으로, 바로크 시대 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비극을 담은 연주도 매우 좋아한다. 성격도 확실한 데다 성악가 출신이라 보컬 테크닉도 많이 알고 있는, 여러모로 완성된 리더다. 이러한 맥락에서 합창단은 그의 스타일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합창단은 바흐든 낭만주의 작품이든 합창곡으로 잘 알려진 아르보 패르트의 곡이든 상관없이 시대를 초월해 작품 자체가 지닌 독특한 스타일을 잘 반영한다.

대전시립합창단 역시 그슈타트에 온 것이 긍정적인 자극이 됐을 것이라 생각된다.

매우 고무적이었다. 사실 그들의 에너지와 프로페셔널리즘에 대단히 놀랐다. 하루 종일 프랑스의 몽블랑 주변 샤모니산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바로 리허설을 하더라. 나로서는 생각도 못할 험난한 여정이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이 한국에 알려지게 돼 매우 기쁘다. 한국 청중의 열정을 볼 때마다 한국은 클래식 음악이 사랑받는 나라라는 걸 실감한다. 이 음악 여정을 글로써 한국에 전할 수 있게 되어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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