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미나시/일 포모도로의 헨델 오페라 ‘타메를라노’

강렬한 배역과 정제된 연주가 공존하는 바로크 문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 자비에르 사바타 (타메를라노)/막스 에마누엘 첸치치 (안드로니코)/존 마크 에인즐리(바야제트)/카리나 고뱅(아스테리아)/리카르도 미나시(지휘)/일 포모도로
(Naive V 5373) (3CD, DDD) ★★★★

‘타메를라노’는 스키타이의 양치기에 불과했으나 무시무시하게 성장해 한때 서아시아 일대를 지배한 티무르 제국 황제(타메를라노)를 다룬 헨델의 걸작 오페라다. 오스만 제국의 바야제트 1세를 포로로 잡고 그의 딸 아스테리아를 강제로 왕비로 들이려 하자 바야제트가 번뇌와 슬픔에 빠져 포효하다가 장렬하게 자결하고, 타메를라노는 그의 의로운 죽음을 존중해 욕심을 거둬들이고 아스테리아를 놓아준다는 것이 극의 주된 이야기다. 헨델의 작품 가운데는 유일하게 알토 카스트라토 이중창이 들어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고 수많은 카운터테너들에게 궁극의 마력으로 여겨져왔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바야제트를, 메조소프라노 모니카 바첼리가 타이틀롤을 맡은 폴 매크리시의 마드리드 실황(Opus Arte)이 근년의 가장 인상적인 공연이자 레코딩이다. 비발디와 헨델·코렐리·베라치니의 곡을 통해 바로크음악 스페셜리스트로서 가장 창의적인 면모를 서서히 각인시키고 있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리카르도 미나시는 폴 매크리시의 그것과는 또 다른 강렬한 배역과 정제된 연주로 또 하나의 특별한 타메를라노를 기록했다. 그가 이끄는 당대연주 앙상블 일 포모도로의 절제된 연주는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중세와 동방, 기묘한 남성성과 슬픔이 교차하는 독특한 대비를 바로크 시대의 문법 그대로 섬세하고 안전하게 뒷받침한다.

타이틀롤은 카탈루냐 출신으로 색소폰과 성악을 함께 전공한 카운터테너 자비에르 사바타가 맡았다. 그는 지난해 아파르테 레이블에서 헨델의 악역 아리아집 ‘악인들’을 리카르도 미나시의 일 포모도로와 함께 발표해 화제를 모으며 명확한 캐릭터 포지셔닝에도 성공한 바 있다.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서아시아의 지배자 타메를라노 역을 카운터테너나 메조소프라노가 맡아온 전통 안에서, 이 욕망과 전의에 들끓는 다혈질이지만 위엄을 잃지 않는 인물 역에 자비에르 사바타만 한 적역도 현재로선 드물 것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카운터테너의 음역을 벗어나 바리톤으로 돌아가 노래 부를 것 같은 급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거침없이 터뜨리는, 탁하고 어두우며 두터운 음색과 악한다운 외모까지 말이다. 맑고 투명한 음색, 여성 못지않은 아름다움의 미소년이라는 상징을 간직해왔던 카운터테너의 신개념을 정립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에 그의 타메를라노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되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본작에서 가장 일관되고 안정감 있는 가창을 요하는 배역 중 하나인 안드로니코 역을 맡은 막스 에마누엘 첸치치는 같은 카운터테너임에도 사바타와 대비되는 투명하고 알맹이가 또렷한 밝은 음색을 가졌다. 타메를라노와 바야제트, 아스테리아 사이에서 사랑과 외교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비잔틴 제국 왕자 안드로니코의 난처한 내면의 고뇌를 정확한 피치와 또렷한 비브라토, 음색으로 노래한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카운터테너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현재 활동하는 카운터테너 중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첸치치와 무섭게 진화하고 있는 사바타의 묘한 경쟁 구도를 떠올리는 것도 흥미롭다.

타메를라노에게 포로로 잡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바야제트 역을 맡은 테너 존 마크 에인즐리는 이전까지 가장 인상적이고 독특한 바야제트를 연기한 플라시도 도밍고의 잔향을 깨끗이 지워버리기엔 파워가 약하나 어쩌면 포로 치고는 너무 카리스마가 강렬했던 도밍고보다 바흐가 그린 인물의 원형에는 더 가까울, 패배자의 고통을 절제 속에 드러낸 인물이자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바야제트를 품격 있게 노래한다. 바로크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프라노 카리나 고뱅은 청아한 콜로라투라 음색으로 바야제트의 딸 아스테리아를 역시 안정감 있게 노래한다. 필요 이상 화려한 감도 다소 없지 않지만 두 카운터테너가 전체를 압도하며, 아리아와 레치타티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네 시간에 걸친 3막짜리 오페라에서 귀를 정화시키는 콜로라투라의 빛을 발한다.

이 배역과 리카르도 미나시, 일 포모도로 연주를 실제 무대에 올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마도 폴 매크리시의 ‘타메를라노’에서 도밍고의 바야제트가 명실상부 비극의 주인공 노릇을 해냈다면 리카르도 미나시의 그것에서는 타이틀롤이 그대로 주인공이 되는 흥미로운 광경이 가장 명민한 젊은 지휘자의 앙상블과 함께 펼쳐질 테니 말이다.

글 강민석(음악 칼럼니스트)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