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레퍼토리로 돌아온 당 타이 선

건반을 울리는 희망의 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4년 만에 내한 공연을 갖는 당 타이 선이 10월 19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연주하는 프로코피예프·슈만·라벨 레퍼토리는 최근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20세기 피아노 음악 연구에 일환으로 보여진다

세상 돌아가는 일과 상관없이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예술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평소의 신념이 무너지거나 바뀌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일도 짜릿하다. 필자의 예를 구체적으로 들자면 과거에는 음악을 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나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였고, 차츰 나의 행위가 청중과 학생들, 나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된 케이스다. 최근 들어 다시 그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는데, 작은 재능이지만 내가 가진 능력이 사회의 다수에게 전달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순기능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되었고, 타인을 위한 내 역할이 커질수록 그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확신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듯하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만나는 환경을 본인이 선택할 수는 없고 거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도 각자의 운명이겠지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각자의 씨줄날줄이 얽혀져 나타나는 다양한 인생은 결국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다.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 타이 선이야말로 자신의 환경이 주는 어려움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불가능할 수도 있었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설계를 이상적으로 실천해낸 인물이다. 세상과 더불어 사는 그의 인생계획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지난해 NHK에서 만들어진 한 프로그램에 당 타이 선이 등장했다. 프로그램은 스나미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후쿠시마를 방문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오래 전 그가 베트남 전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한 끝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경험을 그들에게 전달하여 많은 감동을 주었던 바 있다. 1958년 생으로 유소년기에 베트남 내전을 겪었고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나무 판자 위에 그린 건반으로 피아노 연습을 계속하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음악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일화인 바, 당 타이 선은 자신의 쓰라린 기억을 새로운 희망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지금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지금도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자 용기를 주는 것은 당 타이 선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아노 소리일 것이다.

 

연주의 대미는 라벨의 ‘라 발스’

서양음악의 무대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 힘든 베트남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하노이 음악원 교수였던 어머니를 비롯하여, 러시아에서 베트남을 방문해 그의 재능을 올바로 알아본 아이작 카츠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사한 블라디미르 나탄손·드미트리 바시키로프 등의 훌륭한 스승들과 만난 것은 어려움을 겪었던 유년시절을 거친 후 당 타이 선이 받은 행운이었다고 하겠다. 이제는 전설로 남아있는 1980년 쇼팽 콩쿠르의 우승은 돌발 스타 이보 포고렐리치의 등장과 심사위원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사퇴 등으로 기억되지만 홀대받던 약소국의 연주자가 당당히 차지한 1위는 당 타이 선의 쇼팽 해석에 더욱 확실한 권위를 붙여주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도 보여진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연주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당 타이 선은 작은 체구와 크지 않은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이다. 작은 손의 연주자 중에도 낭만파 이후의 레퍼토리를 큰 스케일로 연주하는 인물이 있지만, 당 타이 선은 자신의 손이 지닌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독자적인 손 모양을 주법에 사용한다. 손등과 손가락의 각도를 급하게 꺾어 손가락의 길이를 최대한 늘여 건반을 ‘찌르듯’ 누르는 방법인데, 자칫 무리가 갈 수 있는 이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의 뛰어난 이완 능력이다. 손목과 팔꿈치의 유연한 움직임은 다른 근육에 가해질 수 있는 긴장을 풀어주고 피아노의 공명감각을 더욱 섬세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나긋나긋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그의 장기인 쇼팽 작품의 서정성을 표현하는데 절묘하게 어울린다. 대곡이나 소품을 가리지 않고 안정감있는 루바토와 밀도 짙은 음상으로 설득력있는 연주를 하는 것이 당 타이 선의 최대 장점이다. 장기인 마주르카의 연주에서는 과장되지 않은 리듬감과 선율선의 우아함 등이 특징으로 나타나며, 폴로네즈와 발라드 등의 대곡에서는 당당한 품격과 모나지 않은 프레이징이 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최근 시대악기로 연주한 음반과 동영상이 공개되어 많은 이들에게 화제로 다가왔던 협주곡 2번에서는 단정하고 균형잡힌 다이내믹과 젊음이 살아있는 리듬감각으로 믿음직한 연륜과 싱싱한 감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2010년 이후 4년 만의 내한 공연을 갖는 당 타이 선의 이번 레퍼토리는 최근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20세기 피아노 음악 연구에 일환으로 보여진다. 세 작곡가의 작품 모두 저마다의 상징성을 다채롭게 띠고 있어 풍성한 느낌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찰나의 환영’ Op.22는 매우 개성적인 소품들로 구성돼 있는데, 작곡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암시와 비뚤어진 듯한 감성을 자유롭게 펼쳐놓은 문제작이다. 전곡이 연주되는 계기가 흔하지 않은 탓에 당 타이 선이 어린 시절 배웠던 러시아의 피아니즘을 어떻게 풀어놓을지 궁금하다. 이어 연주되는 슈만의 ‘다비드 동맹 춤곡집’ Op.6은 초기 슈만의 문학적 상상력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프로코피예프와 다른 시각을 지닌 채 그려지는 가상 인물들의 묘사와 변화무쌍한 악상이 인상적이다. 우아함과 귀족적 정서를 빚어내는 데 능한 당 타이 선의 손끝이 어떤 재주를 부릴지 기대된다.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짙게 받은 베트남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섬세한 기질과 빈틈없는 기교를 가진 당 타이 선의 라벨은 매우 흥미롭다. 지극히 절제된 서정성과 율동미가 고풍스럽게 나타나는 소나티네, 인상파의 핵심인 ‘물의 유희’를 지나 최종적으로 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할 곡은 ‘라 발스’ 이다. 근육질적인 비르투오시티가 난무하는 이 작품의 해석에 당 타이 선 식의 접근 방법은 분명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빛깔의 조명으로 변화하여 작품의 구석구석을 비춰줄 것이라 예상된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마스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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