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협연, 테미르카노프/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정통의 힘, 호연지기로 무대를 장악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1월 1일 12:00 오전

10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거장은 결코 거창하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 맨손 지휘, 그러나 그는 거인이었다. 이번 내한 공연은 75세 생일을 맞은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취임 25주년을 맞이한 기념 공연이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이 명지휘자와 명문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강점인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을 선보였다. 정통이라는 자부심이 도저하게 흐르는 풍성하고도 거침없는 연주였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오케스트라와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젊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으로 역동성과 참신함이 더해졌다. 이날 연주는 광활한 기운과 신선한 바람이 넘실대는 충만한 축제였다.

첫 곡은 차이콥스키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였다. 단테의 장편 서사시 ‘신곡’ 중 ‘지옥’ 편에 나오는 연인,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작품으로 차이콥스키 음악 특유의 비탄과 갈등이 긴장감 있게 전개됐다. 이 극적인 작품에서 테미르카노프는 절제된 동작으로 큰 울림을 이끌어냈다. 그는 현란한 손놀림과 완벽한 암기력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케스트라에 대한 장악력과 작품을 꿰뚫는 통찰력은 명확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그의 작은 손짓 하나로 방향을 틀었다.

이 작품에서 클라리넷 솔로는 잊지 못할 시간을 선사했다. 미동도 없이 마치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한 신비로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클라리넷 연주자의 솔로는 지옥의 문도 연다는 오르페우스의 선율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마음 깊이 각인시키는 감동적인 목관 파트와 달리 이날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은 투박하고 굼뜬 금관 파트로 다소 의아한 순간들을 만들었다. 강렬한 것과 거친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특별히 금관 파트를 목관 파트 뒤쪽이 아닌 오른편 현악 파트 뒤쪽에 둔 독특한 배치는 지휘자와의 거리뿐만 아니라 음악과 금관과의 거리감도 더한 듯했다. 목관 파트의 여운과 달리 금관의 느린 반응은 후반부의 세련미로 가득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에서도 여전한 아쉬움을 남겼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협연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노예술가의 예술혼이 청년 음악가의 패기와 손잡은 현장이었다. 연륜 있는 노장의 여유와 열정적인 청년의 추진력이 어우러졌다. 조성진은 폭발적인 기교와 경묘한 음색으로 청중을 사로잡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은 콘체르토가 원래 가진 경쟁이라는 의미를 극대화시켰다. 힘겨웠을 씨름이었지만 이들과 맞붙은 조성진은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이들을 재촉하며 배포 있게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쳐나갔다. 이들을 이끄는 테미르카노프는 조성진이 자신을 따르는 모습을 때때로 긴 시간 지긋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그의 배려의 손길, 격려의 눈길에서 음악가의 진정한 품격이 느껴졌다.

이후에 테미르카노프는 열정을 통제하는 지휘로 호연지기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천일야화’를 배경으로 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는 하루하루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천일동안 처형이 미뤄진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테미르카노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은 이 모험담을 이미 수도 없이 가본 노련함으로 풀어냈다. 관현악으로 색채의 마법을 부린 듯한 이 작품의 참신한 묘미는 덜 살아났으나 호연 속에서 오랜 시간 쌓인 실력과 전통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 어른들의 동화에 푹 빠져든 사이, 어느새 공연은 끝이 나 있었다. 천일을 하루같이 만드는 거장의 음악에 경외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진 마스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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