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파란만장한 예술 세계를 펼친 낭만주의 영웅
1811 헝가리 라이딩 근교에서 출생
1824 푸가와 대위법을 공부
1832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다녀온 후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
1847 바이마르 궁정에서 일함
1861 로마로 이주
1865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헌신
1869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 등에서 연주
1876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침
1886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연주 여행을 가던 중 폐렴으로 사망
연주 도중 객석을 향해 악보를 던져버리면서 자신의 암보 실력을 뽐낼 정도로 쇼맨십이 지나쳤던 기교파 연주자, 헝가리 태생으로 뭇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는 등 타고난 집시 기질을 숨기지 못했던 난봉꾼, 연주 활동을 접고 나서부터는 근엄한 표정에 사제복까지 입고 은둔 생활을 했던 사색가,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고국 헝가리에 대한 애국 충정을 듬뿍 담아 헝가리 고유의 민속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지만 정작 마자르어는 거의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 전 유럽을 누비면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로 활동했던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이들 얘기의 주인공이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와 그 사이사이를 음악으로 수놓은 그의 작품을 대충 들여다봐도 매우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상반된 평가가 나오게 마련이다.
진정한 비르투오소로 남은 리스트
피아노 독주회라면 몰라도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협주곡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작곡가이기에 앞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19세기에는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작곡가를 겸했다. 작곡과 연주의 전문화 또는 영역 분리가 철저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르투오소 연주자들은 독주회나 협주곡 무대에서 남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피아니스트이든 바이올리니스트이든 자신이 연주할 음악을 직접 만들 줄 알아야 했다.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로 유명한 주세페 타르티니, 진짜 악마로 오해받은 니콜로 파가니니,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선 리스트가 대표적이다. 쇼팽·파가니니·리스트·라흐마니노프는 연주가 본업인 작곡가였지만, 다행히도 이들 작품 중 상당수가 서양음악사에서 명곡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름을 기억한다. 리스트와 동시대에 활동한 명피아니스트 중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도 많다. 지기스문트 탈베르크(1812~1871)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런던에서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이그나츠 모셸레스는 탈베르크의 연주 테크닉이 워낙 뛰어나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탄복했다.
앙리 허츠(1803~1888)·프리드리히 칼크브렌너(1785~1849)도 오늘날엔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당시에는 한때 유럽에서 가장 잘나갔던 명피아니스트였다. 1781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빈 궁정에서 프란츠 요제프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피아노 시합을 벌였던 모차르트와 무치오 클레멘티처럼 리스트와 탈베르크도 불꽃 튀는 시합을 벌였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는 건반 위에 헝겊을 깔고 피아노 치기, 안대로 눈을 가린 채로 피아노 치기 등 별별 희한한 방법으로 연주 기교를 판가름했다. 하지만 리스트와 탈베르크는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 다 눈부신 연주를 들려줬고 유럽의 청중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 라이벌 의식이 싹튼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서로 상대방의 연주 일정과 행선지에 촉각을 세웠다. 리스트가 연주하고 지나간 곳에는 탈베르크가 나타나 뜨거워진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결국 같은 코스로 연주 여행을 돌았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주변 상황이 시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로 몰아갔다. 결국 탈베르크가 리스트에게 도전장을 냈다. 막상막하의 실력을 뽐냈지만 테크닉에서는 탈베르크가 약간 우위였다. 하지만 탈베르크는 음악사책에서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다.
‘리스토마이나’를 탄생시킨 폭넓은 예술관
19세기에는 훌륭한 작곡가로 인정받으려면 교향곡이나 오페라로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베토벤은 ‘피델리오’ 외에는 유명한 오페라가 없지만 한 묶음에 9곡이 들어 있는 ‘교향곡 세트’를 내놨다. 그중 어느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슈베르트는 500곡이 넘는 가곡을 남겨 ‘가곡의 왕’으로 추앙받고 있었지만 성에 차지 않아 오페라를 16곡이나 작곡했다. 하지만 생전에 한 번이라도 공연된 것은 3곡뿐이다. 지금은 단 한 작품도 공연되는 게 없다. 베르디는 변변한 교향곡 하나 없어도 주옥같은 오페라 때문에 음악사에 빛나고 있다. 리스트도 문학과 미술 작품에 영향을 받아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긴 했지만 베토벤이나 말러처럼 일련번호를 붙여가면서 쓴 교향곡은 없다. ‘B단조 소나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오페라 하이라이트를 재구성한 피아노 패러프레이즈이고 베토벤 교향곡이나 슈베르트 가곡을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 곡이다. 리스트는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을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 반주의 가곡으로 나누어 편곡했다. 그가 관현악곡이든 가곡이든 남의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한 것은 자신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트가 생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매우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처럼 그가 긴 예술적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 한 사람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적 안목에 일찌감치 눈을 떠서 ‘유럽 음악계의 대부’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헨델·슈베르트·베버·베토벤·바그너·베를리오즈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신독일악파의 리더였다. 음악에만 매몰되지 않고 철학·문학·미술·연극과도 적극 소통하면서 작품 세계의 지평을 넓혀갔다.
피아니스트 리스트는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리스토마니아’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특히 여성 관객에게 인기였다. 낭만주의 영웅이 보여주는 놀라운 파괴력 앞에 여성들은 속수무책으로 집단적 히스테리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리스트는 현지에서 티켓 판촉을 벌이면서 음악 팬들이 연주자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갖도록 유도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일주일 만에 4만 프랑을 벌었다. 당시 고급 주택 한 채 값이었다. 1840년대 리스트가 순회 연주로 벌어들인 돈은 무려 22만 프랑이었다. 그는 1845년, 베토벤 탄생 75주년을 맞은 본 시내의 광장에 베토벤 기념상을 세우기 위해 음악가들에게 모금을 독려하는 등 추모 사업에 앞장섰다. 부다페스트 음악원 건물 신축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었으며 자신도 거액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부다페스트 음악원 로비에는 리스트 기념상이 놓여 있다. 그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유럽음악가동맹’의 총재였다. 그는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화려한 무대 대신 내면에 집중했던 황혼기
리스트의 생애를 다룬 더크 보가드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끝없는 노래’에는 눈물 나도록 애잔한 분위기의 관현악이 흐른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에 나오는 선율의 단편을 편곡한 것이다. 전기 작가 피터 라베는 이 작품을 가리켜 “성공과 실패, 사랑과 증오로 얼룩진 리스트의 일생을 요약한 자서전”이라고 했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는 ‘파우스트 소나타’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제2주제가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소나타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교향곡을 방불케 하는 풍부한 악상이 빼곡하다. 세 악장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하려는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인다. 널리 알려진 선율을 피아노로 편곡하면서 초절기교로 청중을 압도하던 무대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피아노 랩소디 ‘헝가리 광시곡’에서 엿보이는 자기과시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유럽 무대를 휩쓸던 리스트는 연주 여행을 중단하고 작곡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신부가 되어 교황청 부속 건물에서 1년 넘게 지낸 적도 있었다.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킨 연주 끝에 남는 것은 결국 허망한 느낌뿐이었다. 그는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피아니스트가 아닌 작곡가로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로마에 있으면서 남긴 오라토리오 ‘성 엘리자베트의 전설’과 ‘그리스도’를 들어보면 한때 바람둥이였던 리스트가 쓴 작품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는 훌륭한 피아노 교수였다. 60년 가까이 4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한두 번 레슨을 받고 나서 ‘리스트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다. 리스트는 이들을 가리켜 ‘하루살이’라고 했다. 독주회와 마스터클래스는 리스트가 창안해낸 것이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레슨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는 피아니스트라면 레슨이 아닌 연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철칙을 세워놓고 끝까지 지켰다. 당시에 레슨으로 떼돈을 번 테오도어 쿨라크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는데 리스트는 그의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들에게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한 기금에 돈을 기탁하라고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