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취재기
새 부대에 담긴 새 술처럼
새로운 것은 콘서트홀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수준급이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지난 11월 8일, 통영의 하늘과 바다는 함께 흐릿했다. 새로운 공간에서 처음 열리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을 목격하는 기대감을 안고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로 들어섰다.
이날 결선에서 연주한 총 4명의 결선 진출자는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순위를 가렸다. 프로그램은 베토벤·멘델스존·브람스·차이콥스키·드보르자크·윤이상의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한 곡을 선택하도록 되었는데 두 명씩 각각 브람스와 차이콥스키를 골랐다.
필자는 신발 상자 형태로 지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연주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1,300석의 홀, 풍성한 배음이 강조된 잔향은 장시간 들어도 피로하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1층 객석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심사위원장 김영욱(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한 강동석(연세대 교수)·수뮤엘 아시케나지(커티스 음악원 교수)·타냐 베커 벤더(함부르크 음대 교수)·사이먼 블렌디스(오케스트라 앙상블 가나자와, 수베르트 앙상블 수석)·보리스 갈리츠키(파리고등음악원, 에센폴크방예술대 교수)·시미즈 다카시(도쿄예술대 교수)·통웨이둥(베이징 중앙음악원 교수)·장 피에르 월레즈(제네바 음악원 교수)가 이번 콩쿠르 심사를 맡았다.
결선 진출자 4인의 4색 무대
독일·일본·오스트레일리아 등 각국 오케스트라의 주자들이 모인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이하 TFO)가 무대에 나왔다. 이어서 일본 센다이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 파스칼 베로와 첫 번째 결선 주자인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등장했다. 아르메니아계 벨기에인인 아바네시안은 2006년 예후디 메뉴인 콩쿠르, 2008년 카를 닐센 콩쿠르 우승자다. 긴 머리에 록스타 같은 외모의 아바네시안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택했다. 1악장에서 베로가 지휘하는 TFO의 전주는 풍성했다. 다소 신중하게 시작한 도입부의 보잉을 들어보니 아바네시안의 바이올린 음색은 얇은 편이었다. 실수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극적인 부분에서 음정을 얼버무리기도 했다. 2악장에서는 약간 살아나는 듯 음색이 온기를 띠고 빛이 났다. 그러나 간구하는 듯한 아름다움은 찾기 힘들었다. 여기서도 음정이 떨어지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쿵쿵쿵’ 마음을 울리는 고동 소리처럼 3악장이 시작됐다. 아바네시안은 활을 점검하더니 곧바로 연주에 들어갔다. 음색은 예쁘고 좋지만 전체를 아우르며 제어하는 힘이 부족하달까. 이어진 난조. 여기서도 음정 문제가 드러났다. 관계자로부터 아바네시안이 예선에선 뛰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결선에선 감정 조절에 실패했던 것일까.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설민경이 등장해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했다.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 재학 중인 설민경은 2010년 루이스 수포어 콩쿠르 준우승, 2013년 로돌포 리피체르 콩쿠르 4위 및 특별상을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다. 1악장은 느긋하게 시작했다. 절도 있는 폼이 눈에 들어왔다. 어려운 패시지를 연주할 때 힘들어 보이지 않는 기교도 돋보였다. 전체적으로 몸을 쓰는 방식이 탄력을 받는 구조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바로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총주 후에 목과 악기를 손수건으로 닦았고, 오케스트라 반주는 뜨거웠다. 카덴차에서는 최고음을 그을 때도 음에 장식을 넣어 이채로웠다. 다시 목과 악기를 닦고 들어간 2악장은 서정적인 패시지가 꿈결처럼 지나갔다. 3악장에서도 기교적인 문제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뭔가 뚜렷한 울림이 아쉬웠다. 빠른 패시지가 물 흐르듯 이어졌고 끝나갈 때쯤 설민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3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와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휴식 시간 뒤 중국계 미국인인 루크 수가 등장했다.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재학 중이고 어빙 클라인 콩쿠르 4위 입상 경력이 있는 그는 브람스 협주곡을 선택했다. 수의 첫인상은 독특했다. 회색 바지에 보라색 셔츠를 입은 그는 왼손에 바이올린과 활을 모아 쥐고, 오른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1악장 전주를 기다렸다. 신경이 약간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은, 왠지 모르게 괴짜다운 모습이었다.
곧 이어 반전이 있었다. 첫 음을 그을 때 남다른 텐션이 느껴졌다. 그는 모든 음을 명확히 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단단하고 견고한 연주였다. 1악장 연주를 상징하는 단어는 정확성·열정·치열함이었다. 그러나 음정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고, 반복구에서는 단조로움이 내려앉기도 했다. 2악장은 따뜻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3악장은 빛나는 음색으로 흠잡을 데 없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약간의 불안한 음정이 있기도 했지만 강인한 체력으로 일관성 있게 연주를 끝까지 밀고 갔다.
이어서 마지막 연주자인 우리나라의 배원희가 등장했다. 파리고등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에 있는 그녀는 2007년 로돌포 리피체르 콩쿠르 우승과 2014년 조르주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3위에 오른 바 있다. 배원희의 선택은 차이콥스키였다. 1악장은 자신감과 눈부신 음색으로 시작됐다. 연주하는 표정이 좋았고 움직임이 큰 편이었다. 날카롭고 역동적이었지만 오케스트라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부드러운 루바토로 미소와 더불어 템포를 늦추기도 하고 카덴차는 요염하고 풍윤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어긋나는 부분이 재차 노출됐다. 2악장은 낭만적으로 흘러갔고, 3악장은 오보에 연주 나오기 직전의 바이올린 기교가 약간 아쉬웠다. 소강상태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하모닉스로 예쁜 소리를 낸 부분이라든지 마지막 질주 때가 인상적이었다.
모든 결선이 끝나고 30분간의 휴식 시간이 흐른 뒤, 바로 수상자가 발표됐다. 2차 본선에서 윤이상의 ‘대비’를 가장 잘 연주한 참가자에게 수여하는 윤이상특별상과 더불어 1위는 루크 수에게 돌아갔다. 2위 설민경, 3위 배원희, 그리고 전도유망한 한국인 연주자에게 주는 박성용영재특별상은 김계희가 수상했다.
올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새로운 것은 콘서트홀뿐만이 아니었다. 참가 연주자 20명에게 처음으로 왕복 항공료 혜택이 주어졌다. 지난해까지는 시상식을 결선 마치고 곧바로 진행했는데, 올해부터 결선 당일에는 수상자 발표만 하고 이튿날 시상식과 축하 연주를 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연주자에게도 청중에게도 좋은 변화다. 녹초가 된 상태에서 늦게까지 시상식에 임하는 연주자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TFO의 연주가 수준급이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이제 각국의 피아니스트들이 꿈의 경연을 펼칠 2015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를 기다린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2014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수상자 3인 인터뷰
루크 수(1위·윤이상특별상)
아시아에서 열리는 콩쿠르는 이번이 첫 경험입니다. 이전에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열리는 콩쿠르 경험까지 세어보면 이번이 네 번째 콩쿠르예요. 개인적으로는 큰 기대를 안 했습니다. 상을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연주할 공간이 주어지는 것, 콘서트 연주 자체가 좋아서 참가했거든요. 콩쿠르에서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은 제한적이지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둡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고, 좋은 음악가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어디에서든 무대에 서는 건 연주자로 하여금 벌거벗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죠. 콩쿠르든 오디션이든 ‘경쟁’이 전제된 자리이니 부담감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하지만 거기에 연연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무대에 영향을 끼치니까 그냥 아시아에서 처음 연주할 수 있는 기회에 발을 내디뎠다는 것만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임했을 때 무대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결선 무대에서 브람스 협주곡 1악장 전주 때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던 건… 사실 제가 그랬는지 기억조차 없어요. 하지만 아마도 나름대로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이었을 것 같네요.
2차 본선 심사곡 중 하나였던 윤이상의 ‘대비’ 2악장을 준비하면서 이번 기회에 윤이상의 곡을 마스터하면 먼 훗날 제가 학생들에게 윤이상의 작품을 가르쳐줄 때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윤이상의 작품은 짧지만 난해하고 기교적으로도 어렵죠. 하지만 전 그런 작품을 좋아해요. 도전하고 극복하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 크거든요. 작곡가 윤이상을 좀 더 알아가고,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기뻤습니다.
저는 세 살 때 피아노를,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에 집중한 건 열두 살 때부터죠. 부모님은 태어난 지 9개월 된 저를 데리고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어요. 어머니를 비롯해 외가 쪽은 다, 증조할아버지까지 바이올리니스트예요. 어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엄격하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저도 어린 시절에 연습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민 세대인 부모님이 자연스럽게 미국 문화에 젖어들면서 차츰 변하셨죠. 제게도 연습을 더하는 것보다 음악을 왜 좋아하는지, 어떻게 좋아할 수 있는지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이러한 가족 덕에 제 안에도 음악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하이페츠와 밀스타인, 오이스트라흐를 존경합니다. 한국인 연주자 중에는 정경화를 좋아하고, 그녀의 음반을 자주 듣는 편이에요. 또래 한국인 연주자 중엔 김다미를 좋아합니다. 같이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다녔는데, 그때 들었던 그녀의 연주는 하나하나가 저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어서 기억에 남아요. 이번에 받은 상금은 어디에 쓸지 아직 생각 못했어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겠네요!
1990년 출생/뉴잉글랜드 음악원 재학/어빙 클라인 콩쿠르 4위(2014)/몬트리올 콩쿠르 특별상(2013) 외 수상
설민경(2위)
결선 무대는 생각보다 편안했어요. 평소 많이 긴장하는 편인데, 딱히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번 콩쿠르에 참가한 가장 큰 이유는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한다는 것과 결선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협주곡 때문이에요. 저희 선생님(사시코 가브리로프)이 작곡가 윤이상과 음악적인 교류를 주고받으셨던 분이라 그분께 윤이상 작품을 배우고 싶었어요. 윤이상 작품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악보를 읽는 데 어려움이 좀 있었지만, 그걸 지나고 나면 오히려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어서 심적으론 편했어요.
또 러시아 출신인 선생님께 이번 콩쿠르를 계기로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다시 배우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연주하면서 아름다운 멜로디만 생각했는데, 다시 공부를 해보니 끝도 없는 시베리아 벌판도 느껴지고, 아름다움 그 이상의 차가움도 다가왔어요. 그게 중요하고 또 좋았죠.
한국에서 열린다는 것도 꼭 참가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어요. 이번이 여섯 번째 콩쿠르 참가인데 자비 부담 면제는 둘째 치고 모든 참가자를 세세하게 배려하는 스태프의 서비스가 뛰어나 놀랐어요. 다른 해외 콩쿠르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죠.
앞으로 얼마나 더 콩쿠르에 나갈지 모르겠어요. 아직 배우는 중이고, 공부하는 기간 중에는 기회가 닿는 대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솔로 연주도 좋지만 지금으로선 오케스트라에 흥미가 많아요.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정말 신기하고, 그 웅장함은 혼자 연주하는 것과는 정말 다르잖아요. 이 생각도 언제 또 바뀔지 모르겠지만요(웃음).
1991년 출생/한스 아이슬러 음대 재학/로돌포 리피체르 콩쿠르 4위·특별상(2013)/루이스 수포어 콩쿠르 준우승(2010) 외 수상
배원희(3위)
통영은 제게 정서적으로 참 친숙한 곳이에요. 아버지 고향이 통영이고, 외가는 부산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콩쿠르에서 두 가족 모두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제 연주를 보여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었습니다. 한 달 전 참가한 루마니아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1위를 루마니아 출신 연주자가 받았는데, 수상 발표 직후에 모든 관객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자국민에 대한 프라이드가 엄청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피부로 와 닿는 순간 부러운 마음이 컸거든요. 이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고향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향한 발걸음이 저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네요.
2007년 로돌포 리피체르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1년간 연주 생활을 하다가 왼팔을 다치는 바람에 몇 년 동안 악기를 놓아야 했죠. 당시에 준비하던 콩쿠르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런던에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재활 치료를 한 끝에 2011년부터 다시 바이올린을 잡기 시작했어요. 2012년에 국제 콩쿠르 1위 수상자들만 참가할 수 있는 오션 클래시컬 어워즈에서 관객 투표로 수상자 1명이 선정되는데, 그때 상을 받으면서 독일 내에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이후 올해 에네스쿠 콩쿠르와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 참가했어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무엇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따뜻하게 대해준 게 기억에 남아요. 그 자리에서 제가 좋아하는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어서 더 기뻤고요. 무엇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연주를 할 수 없었던 기간이 있었기에 지금 어디서든 어떻게든 연주할 수 있고, 그런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1987년생/파리고등음악원 재학/로돌포 리피체르 콩쿠르 우승(2007)/조르지 에네스쿠 콩쿠르 3위(2014) 외 수상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통영국제음악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