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음악회장을, 예를 들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자주 찾는 청중이 원하고 바라는 것은 같은 공간을 늘 다른 매력과 색깔로 꾸미는 연주자들의 존재감일 것이다. 동일한 작곡가와 레퍼토리를 연주하더라도 각기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며 청중을 매료시키는 대가들의 모습은 그 음악성과 카리스마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흥미롭다. 한결같은 정중동의 모습이고 작곡가의 의도보다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드러내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모습이 늘 신선한 것은, 하나의 작품을 놓고 행하는 수많은 창조적인 실험과 해석의 적합성을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는 노력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무대에 공감하는 청중이라면 그가 누르는 건반 하나하나의 의미가 매우 크고 진지한 진통 끝에 탄생한 것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12월 2일 도이치 카머필하모닉과의 협연 무대에서 연주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협주곡 1번 이후 백건우의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신보의 등장이 가까웠다는 기대와 정갈하고 정돈된 브람스의 음상을 각인시켜준 특별한 기회였다. 들어가고 나올 때를 아는 현명한 피아노의 움직임은 분방한 흐름이 없이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진한 뒷맛을 남겼다.
지나치게 학자인 체하거나 중후한 맛을 풍기려는 의도는 백건우의 해석에서 보이지 않았다. 상큼한 느낌과 함께 부드럽게 율동하듯 움직이는 템포 감각은 첫 번째 악장의 서두부터 듣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피아노가 붙어 있는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브람스의 장대함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적 공간을 여유 있게 마련하는 연주자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됐다. 비장미와 세련미가 동시에 풍겨 나온 2악장 역시 균형 잡힌 호연이었으며 피아노와 각 악기 간의 앙상블도 마치 실내악을 감상하듯 정교했다. 흘러내리듯 매끈한 음상으로 연주된 첼로 솔로와 달콤한 음색으로 맞선 3악장의 솔로 파트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을 담은 고승의 선문답처럼 의미심장하면서도 간결한 울림을 빚어냈으며,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는 차분함 속에 연출된 피날레는 은근한 유희성과 숨어 있는 비르투오시티로 빛났다. 악장 간의 연결이나 파우제의 자연스러운 연출에도 많은 공을 들인 모습은 1·2악장과 3·4악장을 나누어 연주하듯 묶은 배열에서 드러났다. 청중의 기침 소리나 여타의 소음으로 집중력을 해치는 경우를 최소화시킨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재치와 순발력으로 똘똘 뭉친 듯한 모습의 파보 예르비는 20년을 함께해오며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된 도이치 카머필하모닉에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악상을 부여하며 흥미진진한 무대를 꾸몄다. 피아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밀당’의 기술에서는 여러 번 합을 맞춰본 대가들의 내공이 느껴졌고, 동시에 솔리스트를 위한 명민한 배려도 곳곳에서 돋보였다. 후반부 연주된 교향곡 1번은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에 귀가 익은 청중에게 색다른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베토벤과 슈만의 연속연주를 통해 단련된 공명 감각은 생동감 있게 살아났으며, 중간중간 만들어지는 예상 밖의 다이내믹 배열은 대곡 속의 적절한 서프라이즈였다. 후기 낭만의 오케스트레이션 속에서 양적인 팽창과 질적인 다양성의 조합이 흥미롭게 표현된 호연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