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광화문광장에서 김수영의 시를 외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월 1일 12:00 오전

2014년 11월 4~30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는 김재엽의 신작이다.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김재엽 역할을 맡은 배우 정원조와 촌철살인의 깨알 같은 웃음의 감초 연기를 보여주었던 배우 지춘성도 그대로 나오고, 극단 드림플레이 배우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있었다. 흡사 ‘알리바이 연대기 2’와 같은 작품이다. ‘알리바이 연대기’가 대한민국의 ‘상징적 아버지’인 박정희와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시대를 살아온 김재엽의 ‘실제 아버지’의 연대기를 병행시키고 있다면, 이번 작품에선 김재엽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부제는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다.

연극은 짧은 단편영화로 시작된다. 공연이 올라가는 남산예술센터를 배경으로 김재엽이 뒤통수를 보이며 서 있고 극중 김재엽 역할을 맡은 배우 정원조가 김수영의 시 한 편을 건네받으며 캐스팅 제안을 받고 있다. 이어서 김재엽은 대본 대신 시 한 편을 던져놓고 냅다 줄행랑을 치고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 캐스팅과 연습 과정, 공연 직전까지 대본이 안 나와 전전긍긍하면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읽으며 연습을 대신하는 실제 공연 제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한다. 얼핏 공연 제작 과정이 허술해 보이고 그야말로 제대로 공연이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은 조마조마한 상황에서도 ‘내 안의 김수영’을 찾고자 하는 작가와 배우들의 고민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역설적으로 현재진행형의 김수영을 만날 수 있다. 김재엽 특유의 능청이 여전하다.

이 공연에서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선택하고 있는 또 다른 연극적 장치는, 배우 강신일이 극 속에서 배우 강신일로 그대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의 혼란과 시인 김수영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이후 부역자 혐의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실을 강신일이 출연했던 영화 ‘실미도’의 북파공작원 이야기, 극단 연우무대의 1980년대 작품 ‘한씨연대기’의 한영덕, ‘4월 9일’의 인혁당 사건과 중첩시킨다. 시인 김수영이 온몸으로 자유를 노래하며 역사의 시간을 관통했던 사실을 현재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 강신일의 존재와 겹쳐놓으며 지금 이 시대의 연극을 고민하고 있는 김재엽 자신의 이야기로 살려낸다. 그래서 이 공연은 시인 김수영과 연우무대 배우 강신일에 대한 작가 김재엽의 헌사이자 고백록과도 같다.

더 나아가 김수영과 오늘의 관객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지점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광화문광장은 이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의 시 구절이 나오는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실제 배경이기도 하다. 이 시는 실제로 광화문광장에서 만나 강신일에게 캐스팅을 부탁했다는 일화의 소개와 함께 낭독된다. 그리고 그날의 풍경인 듯 경찰관이 따라붙는다. 시를 읊는 배우 앞에 경찰이 다가와 제지하는 광경을 보자, 순간 세월호 유족들의 천막 농성이 이어지고 있었던 광화문광장이 떠오른다. 김수영의 공간을 현재의 광화문광장과 중첩시킨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시민 모두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특별 성명을 방송하고 대통령 홀로 피난을 떠나면서 한강철교를 끊고,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났던 김수영 시대의 역사적 사실들이 지금의 상황들과 오버랩되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자유에 대한 김수영의 시를 외치는 일은 현재에도 여전히 불온한 일이라는 사실이 환기된다. 김수영의 시가 다시 들려오는 시대, 이번 공연에서 김재엽이 보여준 것이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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