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차이콥스키 콩쿠르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페터 그로테가 2014년 12월 초 한국을 방문했다. 에센 폴크방 국립 음대에서 첼로와 문학을 공부한 페터 그로테는 25년 동안 일본 음악 기업 가와이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했고 콘서트·레코딩·세미나·콩쿠르 등을 기획하고 주최하는 일을 해왔다. 그는 이날 많은 음악도들이 선망하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새로운 방향과 계획, 그리고 비전을 제시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이유가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한 연주자들이 한국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함으로 알고 있습니다. 클래식 수준이 높아진 한국 음악계에 반가운 소식인 것 같은데요.
만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도 국제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의미가 별로 없겠지요. 많은 경쟁을 뚫고 수상을 한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상금과 명예 이외에 연주할 무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좋은 연주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콩쿠르에서의 수상이 자신의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제 콩쿠르를 주최하는 측에서도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더 많은 지원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주최하는 우리 역시 수상 연주자들이 다양한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4년 1월부터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데, 콩쿠르의 감독을 맡으면서 특별히 역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5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콩쿠르이지요. 저는 자랑스러운 그 전통을 이으면서도 새로운 시대와 세대를 위한 다양한 비전을 품고 음악인 모두와 함께 나아갈 계획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 차이콥스키 콩쿠르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58년 우승자였던 반 클라이번을 보세요. 미국 출신인 그는 당시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적’처럼 보였습니다. 항상 진정한 예술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왔던 러시아 음악계에도 정치적인 영향이 미쳤던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그 후 15년 이상을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콩쿠르 결과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영향은 급기야 신뢰를 떨어뜨리고 스타만을 중시하는 문화로 서서히 변하게 되었지요. 지금 우리는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이전의 명성과 영광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전통과 권위의 콩쿠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선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음악가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신 것이 중요한 요인이겠지요.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레오니드 코간,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그레고르 퍄티고르스키·피에르 푸르니에·마리아 칼라스 등 정말 위대한 음악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었지요. 그 결과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안톤 아렌스키·발레리 소콜로프·미하일 플레트뇨프,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르 트레티야코프·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다비드 게링가스·안토니우 메네지스 등이 수상했습니다. 그들의 명성으로 인해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더욱 기대를 모을 수 있었지요.
국제 콩쿠르가 연주자로 데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을 점수나 당락으로 판단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콩쿠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등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연주자라고 말할 수 없는 건 당연하죠.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한 많은 음악가조차 국제적으로 훌륭한 커리어를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간혹 어떻게 예술을 스포츠처럼 등수를 매길 수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쟁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후원과 지원을 해도 아깝지 않을 인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세계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습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야망이 있는 그들에게 기회와 무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함께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위대한 것들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으십시오. 콩쿠르를 통해 입증해야 할 음악적인 자질과 강함은 그들의 중요한 경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질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은 틀린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콩쿠르는 숨어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한 훌륭한 수단인 것입니다. 만약 콩쿠르의 의미와 존재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제게 콩쿠르가 아닌 더 나은 방법과 아이디어를 주셨으면 합니다.
국제 콩쿠르 심사 기준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른 변화이기도 할 텐데, 요즘 국제 콩쿠르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무엇인가요.
국제 콩쿠르에서의 심사에도 수년간 변화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간단히 연주에 대해 투표하는 시스템이 일반적이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투표는 은밀하게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저의 25년간 콩쿠르 심사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그런 비밀스러운 투표 심사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많은 관객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심사위원의 투표를 제외한 다른 행사가 오픈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동안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 결과에 따른 스캔들과 의혹들이 간혹 있었던 것 역시 심사가 비밀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사위원으로 초청하는 저명한 음악가들은 왜 자신이 어떤 연주자에게 투표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능력과 경험과 신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콩쿠르에서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지 못한 연주자들의 심사위원 투표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예정입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의장단이 이 같은 의견에 따라주어서 매우 기쁩니다.
당신은 훌륭한 첼리스트이기도 합니다. 연주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연주란 어떤 연주라고 생각하는지요.
이 질문에는 좋은 연주란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지휘자나 악기,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었음을 느낄 수 있군요. 그렇습니다. 감동을 주는 연주는 뛰어남을 넘는 그 무엇이 필요하지요. 음악가는 사실 한 가지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객석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든 영혼을 깨워야 하지요. 섬세한 감성, 극적인 긴장감, 아름다움 등 이 모든 것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는 쉬워도 직접 연주로 전달하기는 어려운 것들입니다.
첼리스트로 독주와 실내악 연주를 해오다 콘서트와 콩쿠르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 년 전까지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흡을 맞춰 연주하기도 했지만 왼손에 이상이 생겨 이제는 연주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25년 동안 세계적인 피아노 악기 회사인 일본 가와이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차이콥스키 콩쿠르 음악감독으로서 제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고 그 시간과 열정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 콩쿠르가 행정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더 합리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들이 고려돼야 한다고 보는지요.
요즘 연주자들의 테크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콩쿠르를 주최하는 경영진도 더 깊은 신뢰를 가지고 더 공정한 결과를 통해 예술가들을 발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다른 콩쿠르에도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음악감독으로서 추진하고 싶은 계획과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만약 우리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을 계속해간다면 제 눈에는 이미 성공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콩쿠르 준비가 여러 이유로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콩쿠르의 계획과 준비, 콩쿠르 수상자를 위한 콘서트, 콩쿠르가 끝난 후의 사후 관리 등을 위해 영구 경영진이 필요합니다. 저는 제 파트너인 안드레이 말리셰프와 함께 이 경영진을 이끌 것입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새로운 미래를 기대해주십시오.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들이 먼 훗날 진정으로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지요.
콩쿠르에서는 예술가에게 필요한 특별한 재능이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끝없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테크닉적인 발전은 물론,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성도 필요하겠지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는 그 특별한 자질을 전 생애에 걸쳐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말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군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정말 평생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많은 에너지와 체력, 동기와 예술에 대한 사랑·지성·정직함·인내심 등이 필요하겠지요. 사진 이규열(라이트 하우스 픽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