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1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하이든홀
독창자가 슈베르트의 현신이나 철인의 모습으로 무대와 청중을 압도하던 ‘겨울 나그네’가 아닌, 음유시인의 고요한 독백을 마주한 연주회가 열린 2014년 12월의 저녁. 공연이 끝난 뒤 캄캄한 밤길로 향하는 발걸음엔 서랍 속에 구겨 넣어버린 겨울의 여정을 다시 나서야 할 듯 상념으로 가득 찼다. 한 해의 마지막 동네에서 가장 신뢰받는 구두 장인이나 무력해진 이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상담자처럼, 19세기 어느 절망한 젊은이의 겨울 여정을 전하는 마크 패드모어와 폴 루이스와 조용하지만 뜨겁게 교감한 그 저녁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긴 울림을 남겼다.
피아니스트와 연결된 영감의 선처럼 피아노에 한 손을 걸치고, 청중을 향해 내민 또 한 손은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삭일 여백과 함께 말을 걸었다. 마크 패드모어의 비음 너머 숨결 속으로 잦아들며 홀 구석까지 퍼져나가는 피아니시모는 이 겨울 이야기의 절박함과 무상함을 실낱처럼 섬세하게 이어갔다. 리트 전달자로서 마치 샤먼이 드리운 듯한 이 피아니시모는 긴 잔향을 남길 것이다. 현대적이면서도 빌헬름 뮐러와 프란츠 슈베르트의 창작 당시 영감에 가까워 더 고전적일 수 있는, 마크 패드모어의 비음 강한 목소리 톤은 평범한 듯하면서도 독특하다. 전성기의 이안 보스트리지의 그것이 북구 하늘에 번쩍이는 오로라의 잔상같이 예리하다면 마크 패드모어는 창문 너머 보이는 화목 난로로부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고도 둥글다. 특히 비브라토를 절제한 채 정확한 피치를 자로 잰 듯한 길이와 텐션을 지키다가 그 뒤에 올 여백이 충분히 노릇하도록 소리는 놓되 공간은 놓지 않는 호흡과 몸짓은 이 연가곡에 담긴 절절한 독백에 마음과 몸을 기울이게 했다.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의 젊고 도저한 카리스마는 방랑자로서의 슈베르트가 품은 강직한 내면을 담은 듯했고, 스물네 개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흐름의 텐션과 여백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면밀하게 조절해 그가 왜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영국의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인지를 증명했다. 음악회라기보다 한 편의 연극에 가까운 이 풍경은 슈베르트와 뮐러가 꿈꾼 음유시인의 미덕 속으로 쓸쓸하지만 풍성하게 청중을 이끌었다.
이날의 연주를 통해 다시 꼭꼭 새겨 넣게 된 ‘봄날의 꿈’과 ‘고독’은 객관적이면서도 심연까지 감기는 아득한 외로움을 던져주는 ‘겨울 나그네’의 하이라이트였다. 우리는 어쩌면 슈베르트와 뮐러, 마크 패드모어와 폴 루이스라는 창을 통해 오늘날 자신의 초상과 마주한 셈이다. 피셔 디스카우나 한스 호터, 마티아스 괴르네나 이안 보스트리지의 ‘겨울 나그네’에 익숙한 우리에게 마크 패드모어의 그것은 시대와 공간 너머에 군림하던 슈베르트의 자아가 어느 평범한 영국인의 옛날이야기로 현현한 것이다. 눈물 나게 벅찬 감정보다는 심연에 가득 차오르는 성찰의 동기와 만나는 모멘텀이자 꽉 막혀 있던 절망과 늙음과 성장이라는 화두를 향해 문 두드리는 의식인 것이다. 연주 내내 객석을 응시하던 마크 패드모어는 더 뜨거울 수 없는 호응 앞에 “경이로운 청중이여, 이 감동을 세레나데로 대신하고자 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마치 ‘겨울 나그네’의 스물다섯 번째 곡인 양 세레나데를 앙코르로 선보이고 홀 밖까지 흘러넘치는 공감의 기운을 오랫동안 음미했다.
우리 내면의 외상은 스스로의 성장의 힘으로 치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 또 다른 성장의 동기들은 외부에서 온다. 음악의 힘과 역할은 그를 위한 순간을, 자신 혼자만이 아닌 여럿이 나눠 갖는 것이다. 이날 공연에 오지 못한 이들에게 이 온도를 어떤 방법으로든 전해야겠다.
사진 고양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