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생으로 어느새 30대 중반에 들어선 힐러리 한은 재닌 얀센·제니퍼 고·레일라 조세포비치 등과 함께 신동에서 중견으로 성장해가는 미국의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명이다. 특히 힐러리 한은 그만이 갖는 냉정함과 명석한 모범생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연주자다. 그런 특성 때문에 지휘자들에게는 프로코피예프나 쇼스타코비치 등의 레퍼토리에는 높은 점수를 받는 한편, 낭만 레퍼토리 연주는 상대적으로 차갑다거나 흥미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제멋대로 흐르게 내버려두지 못하고 항상 통제하려 하는 힐러리 한의 완벽주의 기질에 기인한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짜임새 있는 디스코그래피와 그에 걸맞은 각종 수상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이미 10대 시절에 음악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훨씬 뛰어넘는 바흐를 연주해내는 등 성숙한 연주자로 찬사를 받았던 힐러리 한이지만, 20대에는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려는 융통성 없는 아티스트로 폄하하는 시선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5년 전쯤 필자가 뉴욕에서 지낼 때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 지휘자를 통해 ‘얼음공주’ 힐러리 한이 종종 특유의 완벽주의 성향으로 지휘자들을 힘들게 한다는 소문을 실제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트 연주자 힐러리 한의 음악적 행보가 최근 ‘달라졌다’는 것이 해외 언론들의 평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성숙한 비르투오소로의 비상
시계를 조금 뒤로 돌려보자. 2013년 11월의 어느 일요일 그리니치빌리지에 소재한 그리니치 하우스 뮤직 스쿨에서는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힐러리 한의 새 앨범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In 27 Pieces : The Hilary Hahn Encores)’의 출시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이 특별한 공연은 문자 그대로 ‘앙코르’가 주인공으로, 힐러리 한과 동료 피아니스트 코리 스미스가 새 앨범에 배치된 순서대로 27곡 전곡을 연주했는데, 오후 내내 진행된 일종의 마라톤 콘서트였다.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매된 이 음반은 2장의 CD에 27명의 작곡가에게 위촉해 받은 27곡의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곡들은 지난 몇 시즌 동안 힐러리 한의 리사이틀 레퍼토리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온 주인공들이다. 27곡의 작곡가들은 경탄할 만큼 다양한 나이·국적·스타일을 포함하는데, 아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나 발렌틴 실베스트로프 같은 베테랑 창작자들은 물론, 현대음악계의 월드스타라 할 제니퍼 히그던·마크 안소니 터니지·니코 뮬리 등과 떠오르는 신진 아티스트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다. 힐러리 한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들의 악보가 출판되도록 돕기도 했다.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 프로젝트는 앙코르 목록의 레퍼토리를 업데이트하고자 하는 힐러리 한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힐러리 한은 밤마다 몇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웹사이트를 넘나들면서 찾아낸 17개국 26명의 작곡가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본인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고 하는데, 참여 작곡가는 32세의 니코 뮬리부터 85세의 아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까지 이른다. 나아가 힐러리 한은 27번째 곡을 의뢰하기 위해 콘테스트를 열어 400여 명의 경합을 이끌어냈고, 마침내 하와이에서 온 신진 작곡가 제프 마이어스를 발굴해 전 세계에 소개하는, 든든한 음악적 메세나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리니치 하우스 뮤직 스쿨에서 열린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 행사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언론에서 높이 평가한 것은 전체 기획이 매우 짜임새와 일관성이 있었다는 점, 즉 힐러리 한의 영리한 기획 능력에 대한 부분과 아울러 그가 이질적인 테크닉과 분위기 사이에서 얼마나 솜씨 좋게 연속적인 전환을 협상해냈는지 하는 점이었다. 단순하게 앙코르곡들을 쇼케이스로 보여주는 대신 공동체 기반 이벤트에 덧입혀진 그녀의 시그너처 프로젝트에 대한 우연한 관련성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자 시도했다. 자신의 리사이틀 공연 전과 사이사이에 그리니치 하우스 뮤직 스쿨의 아늑한 홀에서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에 참여한 작곡가들에 의한 다른 작품들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잭 콰르텟, 틸트 브라스,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엘리엇 샤프, 피아니스트 앤서니 데 메어와 매캔지 마일메드 등 일단의 객원 음악인들이 힐러리 한이 선택한 작곡가들을 위해 흔쾌히 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힐러리 한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미국 언론의 반응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뉴욕 타임스’지는 ‘이보게 연주자들이여, 편안히 하시게’라는 헤드라인 아래 ‘연속된 긴 여행 끝에 어쩌다 한 차례씩의 사교 활동이 고작인,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들로 투영되어 있는 클래식계 스타 독주자들의 정형적 이미지를 깬’ 모범생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에 대해 흥분하며 보도했다. 마라톤 콘서트나 스쿨 데이, 카니발 등 어떠한 명칭으로 묘사되든지 간에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이른바 ‘아이패드 세대’의 소통형 사교 행사의 중심축이 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뉴욕 문화계의 자존감을 대변하며 냉소적 평가로 유명한 ‘뉴요커’지에서도 ‘연주를 꽤 잘하는 신동 바이올리니스트의 하나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던 힐러리 한이 가장 창의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비르투오소 중 하나로 성숙했다’며, 청중 앞에서 현대의 거장들과 현존 작곡가들을 위해 그의 스타 파워를 효율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주목해서 언급했다.
그보다 조금 이전인 2013년 상반기에 LA의 월트디즈니홀에서 힐러리 한이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에 담긴 곡들을 소개하는 리사이틀을 가진 뒤 ‘LA타임스’지 등 현지 언론의 평가는 더욱 열광적이었다. 새로운 작품들을 신나게 융합해낸 힐러리 한의 리사이틀에 담긴 절충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에 주목해, 냉정하리만큼 침착한 아티스트에게 놀라우면서도 환영할 만한 발전이라 평가했다. 아티스트가 새로운 음악의 수호자로서 큰 행보를 시작했으며 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2014년 4월 스트라스모어 연주 후 ‘워싱턴 포스트’지 역시 느낌표 일색으로 힐러리 한이 드물게 균형 잡힌 무대를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 클래식 스타 연주자이면서도 ‘인간처럼’ 청중과 소통했다는 것이다. 연주에서는 물론, 의상과 태도 등 전반적으로 힐러리 한의 인간미와 자연스러움 넘치는 모습이 화제가 된 무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실례 외에도 유튜브 페이지에 게재된 몇몇 영상물을 통해 변화된 힐러리 한의 모습을 어느 정도 관찰할 수 있다.
이번 리사이틀의 레퍼토리는 힐러리 한의 소통 지향적인 새로운 면모와 완벽주의 기질 모두를 확인할 수 있는 선곡으로 이루어졌다. 8세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연주해왔다는, 각종 리사이틀에서 그의 분신과도 같이 함께해온 바흐의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3번을 포함해 슈만과 드뷔시의 소나타, 그리고 동시대 동료들과의 컬래버레이션 실험을 통해 나온 동명의 앨범에 기초한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까지 담았다. 바로크에서 낭만, 현대까지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유럽 작곡가들의 대표곡에서 자신이 호흡하는 신대륙의 음악이라 할 현대음악 패키지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씨실과 날실의 프로그래밍을 선보인다.
8년 만에 만나는 힐러리 한의 내한 리사이틀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물론 ‘힐러리 한 앙코르-27개의 소품’이다. 27곡의 소품 중 몇 곡을 어떠한 형태로 듣게 될지는 연주자가 결정할 몫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앙코르’가 평소 연주회에서 흔히 기대하는 문자 그대로의 ‘앙코르’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힐러리 한의 행보를 비교적 관심 있게 지켜봐온 필자도 뉴욕 NPR 방송국의 ‘Tiny Desk Concert’ 시리즈에서 청바지와 페도라를 걸친 채로 깔깔거리며 소통하는 그의 모습을 직접 보기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10대, 20대에 보여준 완벽한 연주자로서의 모습에서 성숙한 비르투오소로 한층 진화하기 위해 소통형 코드로 무장 해제한 ‘아티스트 힐러리 한의 재발견’이라는 평가를 이번 내한 공연에서 즐거이 공유해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사진 마스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