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시벨리우스

핀란드의 역사와 함께한 교향곡의 대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월 1일 12:00 오전

1865 테바스테후스에서 출생

1880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

1885 헬싱키 법대에 입학과 동시에 헬싱키 음악원에서 작곡법을 배움

1889 헬싱키 음악원 졸업 후 장학생으로 베를린 유학길에 오름

1992 귀국 후 모교 작곡·바이올린 교수로 취임. 아이노 예르네펠트와 결혼

1897 국회 연금을 받고 교수직 사임. 자유로운 작곡 활동 시작

1900 파리 만국 박람회에 초청받음

1902 교향곡 2번 완성과 함께 귓병을 앓음

1904 헬싱키로 이주

1925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음

1957 92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

장 시벨리우스(1865~1957)가 태어났던 시기에 핀란드는 러시아에 속한 공국(公國)이었다. 이전에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유럽 원정으로 국력이 쇠잔한 스웨덴은 1809년에 핀란드를 러시아에 넘겨야 했다. 당시 러시아의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핀란드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도를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기고, 행정조직을 재정비해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그럼에도 핀란드의 법률과 대다수의 종교인 루터교를 인정하는 등 기존 문화를 유지하고 자치를 인정해 핀란드인의 반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1869년에 새로운 기본법이 제정되고 민족운동을 감시하기 위한 검열제도가 도입되는 등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져갔다. 니콜라이 2세가 통치하던 1899년에는 2월 선언으로 핀란드의 자치 권한을 폐기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러시아 동화정책과 언론통제가 강화되었다.

법학도에서 음악도로 전환

시벨리우스는 이렇게 핀란드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젊은 날을 보냈다. 시벨리우스가 태어난 곳은 투르쿠와 헬싱키 사이에 위치한 헤멘린나라는 소도시였다. 7세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나 14세에 바이올린에 매료되어 자신의 악기로 삼았다. 뒤늦게 시작한 탓에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작곡에서는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시벨리우스 최초의 작품은 16세에 작곡한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주곡 ‘물방울’로, 현재 악보가 남아 있다.

19세 때 가족의 뜻대로 헬싱키 대학에 진학하여 법을 전공했지만, 시벨리우스는 음악을 놓을 수 없어 헬싱키 음악원에도 등록했다. 물론 법 공부는 일찌감치 멀리하고 음악에만 열중했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뛰어난 작곡가였던 페루초 부소니(1866~1924)가 헬싱키 음악원 교수로 부임해 그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1889년에 음악원을 졸업하고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벨리우스는 작곡을 시작하고 음악원을 졸업하기까지 1880년대에는 몇 곡의 합창곡을 제외하고 전적으로 실내악곡만 작곡했다. 대부분 소품 수준의 습작이지만, 바이올린 소나타와 피아노 3중주, 피아노 4중주, 현악 4중주 등 제법 규모를 갖춘 곡들도 적지 않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고전적 형식을 갖추었고, 스타일은 독일의 낭만적 어법에 가까웠다.

시벨리우스의 유학 기간은 베를린에서의 1년과 빈에서의 1년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은 그를 민족 음악가로 변모시키는 데 충분했다. 고전적인 실내악곡들이 보여주듯 학창 시절 시벨리우스는 음악에 민족의식을 표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핀란드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로베르트 카야누스(1856~1933)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그의 교향시 ‘아이노’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음악으로 민족의식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 큰 감명을 받았다.

교향시 ‘아이노’는 핀란드의 전설을 집대성한 ‘칼레발라’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칼레발라’는 핀란드의 언어학자인 엘리아스 뢴로트(1802~1884)가 핀란드와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카리알라 지방에서 전승되는 전설을 모아 정리한 영웅서사시로, 19세기에 핀란드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시벨리우스도 이전부터 ‘칼레발라’를 잘 알고 있었지만, 카야누스의 곡을 듣고 ‘칼레발라’를 음악화하는 데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칼레발라’와 연관된 교향시와 합창곡이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을 채워갔다. 첫 단추인 합창 교향곡 ‘쿨레르보’(1892)를 비롯하여 유명한 ‘투오넬라의 백조’가 포함된 ‘레민캐이넨 모음곡’(1895), 피아노 모음곡 ‘퀼리키’(1904), 교향시 ‘포흐욜라의 딸’(1906), 성악곡 ‘루온노타르’(1913), 교향시 ‘타피올라’(1926)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칼레발라’를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시벨리우스에게는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내용의 음악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예가 ‘언론의 날을 위한 음악’(1899)이다. 이 곡은 전주곡과 핀란드의 역사적 사건을 그린 연극을 위한 여섯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세 곡은 관현악 모음곡 ‘역사적 장면 1번’(1911)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었으며, 마지막 곡인 ‘핀란드 깨어나다’는 이듬해에 수정을 거쳐 교향시 ‘핀란디아’(1900)로 재탄생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가로서뿐만 아니라 1892년에 열성적인 민족주의 집안인 예르네펠트 장군의 사위가 됨으로써 민족주의 집안의 일원이 되었다.


▲ 피아노를 연주 중인 시벨리우스

민족주의 메시지를 담은 교향곡들

유학이 끼친 부정적 영향도 있었다. 2년 동안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무절제하고 술과 담배를 과도하게 즐겨 평생 건강을 해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1897년부터 핀란드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음에도 종종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질 정도로 낭비벽이 있었다.

이렇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시벨리우스는 피아노곡을 썼다. 당시 피아노 소품은 음악가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에게도 팔릴 수 있는, 즉 비교적 쉽게 현금을 벌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시벨리우스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피아노곡을 작곡해 출판사에 건네고 돈을 받았다. 그는 관현악으로 쌓은 명성에 흠이 될 것을 우려해 해외에는 팔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지만, 출판사는 명성 높은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알렸다.

사실 시벨리우스의 피아노곡은 문헌으로서는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딸에게 피아노곡은 “빵 위의 버터”라고 말할 정도로 시벨리우스 자신도 피아노곡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100곡이 넘는 상당한 수인 데다 시벨리우스 삶 전체에 걸쳐 작곡되었기에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다.

민족주의적인 메시지가 강한 시벨리우스에게 표제 없는 번호 교향곡은 의외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리스트의 합창 교향곡의 영향으로 ‘쿨레르보’를 작곡했으며, 1898년 3월에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듣고 “아, 영감을 얻었어!”라고 감탄하며 표제 교향곡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빈 유학 시절인 1890년 12월에 접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은 절대음악으로서의 교향곡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합창·표제·절대음악 등 교향곡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은, 19세기 마지막 무렵에 구체적인 주제와 메시지는 교향시에 담고, 교향곡은 절대음악의 위치에 두는 것으로 정리가 된다. 그래서 번호가 붙어 있는 일곱 곡의 교향곡은 모두 절대음악의 견지에서 작곡되었다. 절대음악의 관점에서 보면 학창 시절 고전적인 실내악이 성숙한 낭만적 교향곡으로 확대 발전된 셈이다.

교향곡 1번(1899)과 교향곡 2번(1902)은 고전적인 형식을 갖추면서 서정적인 주제와 함께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확장된 음향을 추구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교향곡 2번은 대중의 인기도 높다. 비교적 긴 5년의 간격을 두고 작곡된 교향곡 3번(1907)은 다소 무게감이 더해졌다. 단편화된 주제들이 대위적으로 등장하면서 발전해가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며, 말러의 영향도 엿보인다.

20세기로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교향곡 2번을 작곡하던 시기에는 청각에 이상이 발생해 시벨리우스를 괴롭혔다. 시벨리우스의 명작 중 하나인 바이올린 협주곡(1903), 관현악곡 ‘슬픈 왈츠’(1904), 교향시 ‘포흐욜라의 딸’(1906)이 이러한 고통 속에서 탄생되었다. 그래도 1904년에 후원자였던 카펠란 남작의 도움으로 헬싱키 북쪽 근교에 위치한 예르벤패에 일생을 보낼 집 ‘아이놀라’를 지어 극단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이 집의 이름은 부인의 이름 ‘아이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교향곡 3번을 작곡한 뒤에 나타난 후두 종양은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1908년 5월에 헬싱키에서 수술을 했지만 완치가 되지 않아 베를린에서 무려 열 차례가 넘는 수술을 감행했다. 결국 종양을 제거했음에도 시벨리우스는 언제 암으로 발전할지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어둠을 헤치고 희망을 맞이하는 내용의 교향시 ‘야행과 일출’(1909)과 현악 4중주 ‘친밀한 목소리’(1909)가 이러한 시벨리우스의 심정을 대변한다. ‘친밀한 목소리’의 3악장에 숨겨 있는 은밀한 화음들은 그 두려움에 대한 속삭임으로 들린다.

그런 면에서 교향곡 4번(1911)이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침울한 분위기와 내면적 절제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곡은 교향곡 3번과 같이 단편적 모티프를 이용해 주제를 발전시키며, 관현악은 더욱 투명하고 가벼워졌다. 죽음과 악마를 상징하는 삼전음이 곡을 이끌어가며, 4악장에서는 조성 체계가 다소 흐릿해지기도 한다.

시벨리우스 자신이 교향곡 4번을 ‘심리적인 교향곡’이라고 말했듯이, 이 곡의 독특한 특징은 개인적인 상황에서 온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쇤베르크가 첫 무조음악 ‘여섯 개의 피아노 소곡’을 작곡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창작가들에게 불었던 탈고전적인 역사적 조류가 시벨리우스에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시벨리우스는 이후에도 이러한 시도를 이어가지 않았지만, 영국의 시벨리우스 연구가인 세실 그레이가 이 곡을 “시벨리우스의 가장 위대한 교향곡”이라고 평가한 것은 의미가 크다. 또한 이 곡은 20세기 초의 창작가들의 고민을 대변하는 작품으로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 노년의 시벨리우스 ⓒThe Finnish Museum of Photography


▲ 아이놀라에 묻힌 시벨리우스의 무덤 ⓒStephen J. Danko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노년의 삶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핀란드는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시벨리우스 역시 독일 출판사와의 금전적 거래가 끊기면서 생활에 지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 시기에 40곡에 이르는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이러한 와중에 시벨리우스는 탄생 50주년을 맞았으며, 정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그 행사의 중심은 교향곡 5번(1915)이었다. 이 곡은 과거 낭만음악의 토대에서 앞의 두 교향곡에서 보여준 고민을 끌어안았다. 밝고 풍부한 음향을 바탕으로 단편화된 선율들을 대위적으로 혹은 대화식으로 엮어가며 진행되는 특징은 교향곡 3번의 시도가 발전된 것이며,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선율과 현대적이고 탈고전적인 모티프의 완벽한 어울림은 교향곡 4번의 현대적 시도들의 결과였다. 즉, 교향곡 5번은 시벨리우스 음악 세계의 진정한 완성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염원하던 핀란드의 독립이 1918년에 성취됐다. 교향곡 5번을 작곡하면서 동시에 구상된 두 교향곡은 독립 이후에 빛을 보았다. 교향곡 6번(1923)은 ‘라단조’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도리안 모드를 사용해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교향곡 2번이 차분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로 성숙된 느낌인데 조국의 독립과 전쟁의 종결, 경제적 안정 등으로 정서적인 평안을 찾은 것 같다.

마지막 교향곡 7번(1924)은 단악장으로, 일반적인 교향곡의 소나타 형식·느린 악장·스케르초· 피날레의 네 악장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단일체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의 융합은 교향곡 3번과 5번에서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는데, 7번에서 그 완성을 이룩한 것이다. 시벨리우스는 이러한 형식 융합을 통해 자주 변하는 템포를 바탕으로 고도의 심리 드라마와 같이 매우 밀도 높은 음악을 만들었다. 대가의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시벨리우스는 피아노 연탄곡 ‘나의 사랑하는 아이노에게’(1931)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6년 동안 새로운 음악을 단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다. 1930년대 초에 교향곡 8번을 준비하고 초연 일정까지 잡아놓았지만 스케치를 하다가 포기하고 폐기했다. 독립이 성취된 조국에서 더 이상 작곡을 할 동력을 잃은 것일까? 현대적 조류에 대한 작가적 저항 혹은 양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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