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바로크합주단 Since 1965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의 50년

민간 실내악단으로 시작한 서울바로크합주단. 그들 앞에 세계가 놓여 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2월 1일 12:00 오전

서울바로크합주단 Since 1965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의 50년

민간 실내악단으로 시작한 서울바로크합주단. 그들 앞에 세계가 놓여 있다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50주년 기념 특별 정기연주회 첫 번째 공연의 막이 오르기 6시간 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단원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물으며 카메라 앞에 서는 동료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나오라고, 옷깃 하나에도 신경을 써준다.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은 음악가라기보다 50년의 시간이 만든 대가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그들의 50년사는 한국 실내악의 50년 역사이기도 하다. 1965년 첼리스트이자 서울대 교수였던 전봉초(1919~2002)에 의해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창단되었다. 1966년 창단 연주회를 시작으로 휴식기(1976~1979년)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국내외로 소화한 연주회 횟수는 541회 이상. 145회 이상의 정기연주회를 가졌고,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반영한 아이디어를 기획 공연으로 발전시켜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으며, 후학을 위한 데뷔 콘서트 등을 진행해왔다.

초대 악장을 지낸 김민이 독일 유학 후 1979년부터 지금까지 이끌어온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우리나라 최초로 지휘자 없는 악장 중심으로 무대에 올랐으며, 20~30명으로 구성한 전문 실내악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15년을 기점으로 현악 중심의 실내악단을 넘어 오케스트라로 도약을 꾀하고 있다. 현재 음악감독 김민을 중심으로 바이올린 43명, 비올라 14명, 첼로 17명, 더블베이스 3명, 쳄발로·피아노·클라리넷·바순·트럼펫·플루트 각각 한 명으로 구성된 멤버들이 연동되어 활동 중이며,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예술고문으로 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의 무대는 바로크 음악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작곡 시대별 연주 횟수를 보면 바로크·고전·낭만·현대 레퍼토리의 횟수가 균등한 것도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자랑이다. 이런 레퍼토리를 지금까지 총 16종의 CD에 담았다. 김성태·김정길·김용진·구본우·백영은·장선순·류재준·최명훈·정승재 등 국내 작곡가에게 창작곡을 위촉해 초연의 순간을 많은 청중과 교감하며 창작 음악의 활성화를 주도했고, 윤이상의 곡으로만 구성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1987년 일본과 미국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고, 1995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외 공연은 파리 유네스코회관, 뉴욕 유엔본부, 베를린 필하모닉 체임버홀, 핀란드 난탈리 페스티벌, 독일 라인가우 페스티벌과 슈파리어 페스티벌, 에스토니아 모차르트 페스티벌, 폴란드 베토벤 부활절 페스티벌, 룩셈부르크 에히터나흐 페스티벌, 이탈리아 아스콜리피체노 페스티벌, 루마니아 에네스쿠 페스티벌 등을 비롯해 23개국 117회의 해외 공연을 가졌다. 특히 1999년 파리 유네스코회관과 2000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공연을 선보여 ‘유엔 공식 평화의 실내악단’으로 지정받기도 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바이올니스프 정경화·김영욱·막심 벤게로프·살바토레 아카르도·펠릭스 아요·장 피에르 발레즈·자하르 브론, 비올리스트 이마이 노부코, 첼리스트 아르토 노라스·다비트 게링가스·양성원,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 하피스트 마리사 로블레스, 피아니스트 시프리앙 카차리스·백혜선·최희연, 성악가 신영옥·연광철, 작곡가 펜데레츠키, 지휘자 랄프 고토니 등 국내외 음악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음악적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2000년부터는 콩쿠르와 여름음악캠프를, 2005년부터 음악 아카데미를 개설해 마스터클래스와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 음악 꿈나무들이 ‘실내악’으로 한데 묶여 작은 숲이 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미래의 음악가 발굴과 실내악 주자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대선배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그들은 이렇게 50년이란 시간을 달려왔다.

Korean

Chamber Orchestra

The Korean Chamber Orchestra(KCO) was founded in 1965 and has established itself to be the leading chamber orchestra in the country. It has given over 541 concerts inside and outside of the country and acquired a growing international reputation by embarking on numerous international tours. KCO has released 17 CDs, encompassing a wide range of repertoire, which have established a new standard of excellence in the field of classical music.

KCO appeared in major concerts of which highlights include the UNESCO Concerts for peace in Paris and ‘UN staff Day Concert’ in New York where it was appointed an official UN Chamber Orchestra for Peace. For recent decade(2000-2011), KCO has built worldwide reputation with extensive international concerts such as Rheingau Festival(Germany), Naantali Festival(Finland), Beethoven Easter Festival(Poland), International Mozart Festival(Estonia), Echternach Festival(Luxembourg), Speyer Festival(Germany), Max-Reger Festival(Germany), Ascoli Piceno Festival(Italy) along with many other successes in Croatia, Denmark, Czech, Austria, France, China, Japan.

Until 2015, KCO is engaged more concerts in Russia, China and Poland to name a few.


▲ 김재윤(Va)김현경(Vn)안신영(Vn)김남중(Va)김정아(Vn)유진섭(Vn)이소정(Vc)김민(음악감독·Vn)조윤정(Vn)전진주(Vn)최정현(Vn)문명환(Va)김정아(Vn)황윤정(Vc)

▲ 전성해(Vn) 이선이(Vn) 김홍준(Vn) 권상희(Vn·수석) 위찬주(Va·수석) 김선희(Vn·수석) 이재민(Vn·수석) 나정혜(Pf) 박지선(Vn) 윤진원(Va) 김용식(Vc) 곽효일(Db·수석)

서울바로크합주단의

50년 역사

국내에 내린 뿌리와 세계로 뻗은 발자취를 살펴본다


▲ 1970년경 중앙국립극장 연주. 전봉초 지휘/서울바로크합주단


▲ ‘동아일보’ 1966년 10월 15일자

창시자 전봉초

첼리스트이자 서울대 음대 교수였던 전봉초(1919~2002)가 한국에 실내악단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1960년 9월 프랑스에서 개최한 제8차 국제음악협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였다. “1960년은 나의 음악생활에 있어 개안을 안겨준 해라고 하겠습니다. 구라파 악단을 두루 살필 수 있었던 나는 발길이 닿는 도처에서 현악합주단의 연주를 들으며 깊은 감명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우리네 연주단체들의 취약성은 바로 이러한 서구음악의 정수인 바로크시대 음악의 여과 없이 낭만시대 음악을 접목시킨 결과라고 나 나름대로의 진단을 해보았습니다”(‘객석’ 1985년 5월호).

그는 유럽에서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와 로마의 이무지치 등을 접하며 독주가 주류를 이루던 국내 음악계와는 다른 실내악단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면서 국내에도 이처럼 훌륭한 실내악단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창단을 위해 초석을 다지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전봉초는 김성태 학장에게 현악 전공자들이 현악합주를 교과과정으로 해 정식 이수할 것을 건의한다. 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스승과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앙상블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1965년 6월 이수자와 졸업생으로 구성한 앙상블을 만들었다. 나중에 서울바로크합주단의 리더가 된 김민 외에 박은성, 이수철 등이 모였다. 전봉초는 바로크 시대 음악의 중요성을 절감했기에 이름도 ‘바로크’라 지었다. 젊은 현악족(族)은 새 역사를 쓰기 위해, 바로크 음악의 보급과 실내악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느슨한 활을 팽팽히 했다.

1966년 창단연주회

1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때는 왔다. 1966년 10월 18일 7시 30분, 명동에 위치한 국립극장에서 창단 연주회의 막이 오른 것. 연주곡은 비발디 ‘사계’, 볼크먼 ‘세레나데’ 등. 이 중 ‘사계’는 바로크라는 상징성을 강하게 내세운 엠블럼과 같았다. 당시는 현대사 격변기로 국민의 대부분이 경제 발전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를 무대로 피아니스트 한동일·김덕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김영욱, 첼리스트 정명화, 작곡가 윤이상이 새로운 음악사를 쓰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클래식 음악은 물론 실내악이라는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창단은 새로움보다는 그야말로 낯선 도전이었다.

젊은 음악가, 후원회, 레퍼토리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미래를 개척할 젊은 음악가의 발판 역할을 했다. 1968년 12월 10일, 박은성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을 통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한다. “박씨는 서울음대서 바이얼린을 전공 후 4년 동안 바로크합주단의 멤버로 연주생활을 해오면서 지휘공부를 해왔다. 그는 2년 전부터 음대 오키스트러를 지휘하기도 했는데 공식지휘는 처음. 앞으로 외국에 가서 지휘공부를 할 예정(‘경향신문’ 1968년 12월 7일자).” 이후 “김종익 씨 등 다수의 명사들의 내락을 얻어 후원회를 강화(‘매일경제’ 1969년 12월 15일자)”한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해방 후 한때 서울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끈 김생려가 초빙되어 지휘봉을 잡았는가하면, 다양한 협연자들이 함께하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 ‘경향신문’1971년 10월 23일자 1면 기사

순수한 열정의 10년. 하지만 잠정기로

1975년 10월은 창단 1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울바로크합주단은 활동을 멈추고 끝을 알 수 없는 잠정기로 들어섰다. ‘영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10년이란 세월을 전봉초와 단원들의 ‘순수한 열정’만으로 이끌어온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었고, 전봉초가 학장직을 맡으며 바쁜 직무를 맡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그 저변에는 사회적 요인이 더 클지도 모른다. 마지막 무대를 앞둔 몇 달 전, 창단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관람한 서울대 서우석 교수는 이들의 앞날에 대해, 그리고 한국 음악계 저변에 깔린 불균형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 편의 글을 남겼다.

“이 단체가 뚜렷한 재정적 뒷받침 없이 단원들의 열의에 의해서 10년을 지속했다는 사실에 대해 한편에서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단체의 수명은 젊은이들의 순수한 정열 때문이었으며 (···)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에 대한 순수한 정열은 발전의 근원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이미 상당한 정도로 자본주의화된 사회의 움직임 안에서 그와 같은 비직업적 의식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하고 회의할 것이다. (···) 바로크합주단뿐만 아니라 국내의 거의 모든 음악회 표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독주자의 표처럼 팔려나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 결국 이는 우리 음악계가 심각하게 안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로 귀결될 것이고 바로크합주단의 앞으로 진로가 이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언제까지 우리의 음악활동은 그 활동의 정당성이 음악의 예술적 고유가치에만 근거할 수 있을 것인가”(‛서울평론’, 1975년 5월호).

서울바로크합주단은 기약할 수 없는 잠정기에 들어섰지만, 이들의 활동을 계기로 실내악이 터전을 다지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이화여대 교수 김용윤이 서울챔버오케스트라를 창단했으며, 1979년에는 ‘공간(空間)’의 주도 아래 ‘실내악의 밤’을 열었다. 국제문화회(회장 김용현)의 실내악 기획연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정재윤(Vc·수석)최재원(Vn) 박해정(Va·수석) 강재환(Db) 서정윤(Va) 윤동환(Vn)김현서(Vc) 박선경(Va) 문주원(Vc) 목혜진(Vc) 김윤선(Va) 김형석(Va) 정태현(Db)

내가 이어서 하겠습니다!

1979년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의 악장을 맡기 위해 귀국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은 유명무실해진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소식을 들었다. 전봉초를 찾아간 그는 “내가 이어서 하겠다”고 말했고, 전봉초는 당시 현금 50만 원과 많지 않은 자료를 건넸다. 그리고 4년의 공백기를 끝낸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서서히 부활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첼리스트이며 서울대 음대 교수인 전봉초 씨가 60년대에 ‘우리 연주단체들의 취약점이 바로 서구음악의 정수인 바로크시대음악에 대한 음미와 연구 없이 낭만시대음악을 접목시킨 결과’라는 판단 아래 서울대 음대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모아 만든 단체(···). 이렇게 출발한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당시 전봉초 씨가 바로 단장이었고 악장엔 지금의 국립교향악단 악장이 된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씨이다”(‘동아일보’ 1980년 12월 13일자).

서울바로크합주단의 부활을 놓고 김민은 새로운 멤버로 재구성할 것인지 고민했다. 결국 전통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4년이라는 공백기 동안 흩어져 있던 창단 멤버를 중심으로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재건한다.

“구성원을 보면 리더 김민(바이얼린·국향 악장·한양음대 교수), 나덕성(첼로·전 경희대 음대 교수), 박상연(비올라·국향 제1바이얼린 주자), 유소형(바이얼린·국향 제1바이얼린 주자), 오양구(콘트라베스·국향 수석주자), 유주화(바이얼린·서울음대 2년), 이승진(첼로·국향단원), 전용우(바이얼린·서울음대 3년), 정덕성(국향 제1바이얼린주자) 조윤희(국향 제1바이얼린 주자·서울음대대학원), 주일엽(국향 부수석), 채문경(챔발로·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주자) 등이다”(‘경향신문’ 1980년 12월 8일자).


▲ 1980년 중앙국립극장

▲ ‘경향신문’1980년 12월 8일자

부활

1980년 12월 14일 국립극장. 다시 돌아온 서울바로크합주단을 놓고 ‘부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정기연주회 횟수로 따지면 제22회. 이들은 1965년 창단 연주회에서 연주한 비발디 ‘사계’와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번, 그리고 서우석의 ‘현악합주를 위한 진혼곡’을 연주했다. 당시 지휘자 없는 악장 중심의 실내악단은 국내 음악계에서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또한 이 공연에서 국내 작곡가 서우석의 곡을 연주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이후 김용진·강석희·나인용·백병동 등 한국 작곡가들이 창작곡을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동아일보사와 독일문화원 공동 주최로 열린 공연에서는 베를린 필 악장인 레온 슈피러와 첼로의 에베르하르트 핀케를 초청했고, 1984년에는 대한민국국제음악제에 참여했다.

레퍼토리의 폭을 넓히다

1985년 10월, 리틀앤젤스예술회관(현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를 열었다. 연주한 곡은 로시니의 현을 위한 소나타 3번, 베를린 필의 첼로 수석 에베르하르트 핀케의 협연으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D장조, 쿠프랭의 첼로와 현을 위한 여섯 개의 소품과 그리그 ‘홀베르 모음곡’. 성숙기를 맞이한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연주곡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부터 레퍼토리의 폭을 과감히 넓혔다. 1980년 중·후반에는 멜로스 트리오, 메이 콰르텟, 페스티벌 앙상블, 예음클럽, 서울무지카, 서울챔버오케스트라 등 저명 연주자들이 참여한 실내악 활동이 활발했고, 서울바로크합주단은 그 중심이 되곤 했다.


▲ 김광훈(Vn) 임재홍(Vn) 지유진(Vn) 이원식(Vn) 양혜순(Va) 김현지(Vn) 김성철(Vn) 이윤미(Va) 최예선(Va) 현혜진(Vc) 오주희(Cem) 이주연(Va) 이동일(Vc) 김창헌(Vc)

▲ 전재성(Vn) 강보라(Vn) 김형선(Vn) 안지윤(Vn) 김민(음악감독·Vn) 박혜진(Vn) 박진경(Vn) 서민정(Vn) 김현곤(Cl·수석) 나윤아(Vn) 이현애(Vn) 이윤영(Fl·수석)

해외 무대 첫 진출

1987년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해외 진출 꿈이 이루어진 해로, 도쿄와 워싱턴·뉴욕·캔자스시티 등 빡빡한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이성재의 ‘가야금과 현을 위한 도드리’를 이재숙의 가야금 협연으로 선보여 현지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중 워싱턴 케네디 센터의 연주회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한국관 설치를 위한 모금 음악회였다.

1990년 창단 25주년

어느덧 스물다섯 살이 된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소식은 각종 신문·잡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1990년 5월 28일에 치른 25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스트라빈스키의 현을 위한 발레모음곡 ‘아폴론 무자게’(한국 초연), 토렐리 트럼펫 협주곡, 그리그 ‘홀베르 모음곡’을 선보였다. 같은 해 12월 3·8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다.

첫 음반(SKC)도 발매했다. 재킷에는 ‘Korean Chamber Ensemble, Seoul’이, 그리고 영문으로 표기한 작곡가 김병곤의 이름이 텔레만·슈타미츠·버르토크와 나란히 놓였다. 1991년 16명의 단원은 동남아 투어를 했고, 1992년 3월 30일 50회 정기연주회를 올렸다.

1992년, 김민 KBS교향악단 사임하다

1981년부터 KBS교향악단의 악장직을 맡아온 김민은 겸직 금지 조치에 따라 교향악단을 사임하며 큰 역할 하나를 덜어냈다. 1960년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생 신분으로 KBS교향악단에 입단했고, 이후 국립교향악단으로 전환과 KBS교향악단으로 재창단할 때도 늘 함께해온 그였다. “이제 오십을 넘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어요.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세계적인 악단으로 키우는 것과 나 자신의 연주활동의 기회를 늘리는 것. 바로 그겁니다”(‘객석’ 1995년 4월호).

세계를 향해 박차를 가하다

“오래 한 것 자체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국제시장에 가서 도대체 ‘얼마짜리’ 단체가 되는지 평가를 받아보렵니다. 승부를 걸어서 되면 되고, 안 되면 관두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죠”(‘객석’ 1993년 6월호).

박은희가 이끄는 한국페스티벌앙상블과 금호 현악 4중주단 등 국내 실내악단은 국내외를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1995년 서른이 된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세계 굴지의 매니지먼트사인 CAMI와 계약한 후 10월과 11월 미국·캐나다 9개 도시를 순회공연했다. 김민은 “그동안 미국·일본 등 네 차례의 해외 공연을 통해 ‘뉴욕타임스’ 등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본격 연주는 이번이 처음인 만큼 30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보여줄 생각(‘동아일보’ 1995년 10월 10일자)”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그 후 서울바로크합주단 기사에는 미국·캐나다 순회공연 이력이 문장 어딘가에 늘 자리 잡게 되었다.

1995년에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의 터줏대감이자 1981년 KBS교향악단에 입단한 전용우가 김민의 뒤를 이어 KBS교향악단 악장으로 부임했다. 1996년 4월 30일 연주회에는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당시 이름은 클라라 강)이 8세의 나이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터키’를 협연해 국내에 데뷔했다.

세계에 이름을 알리다

1997년 외환위기(IMF)로 국내 경제는 물론 예술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해외 음악가의 내한은 점점 줄었고, 국공립 음악단체는 예산의 절감과 삭감을 피할 수 없었다. 민간 실내악단도 화려했던 명성을 뒤로하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서울바로크합주단의 해외 순회공연의 본격적인 궤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97년 유럽, 1998년 중국, 1999년 오스트리아·프랑스, 2000년 유럽·싱가포르, 2001년 중국, 2002년 덴마크 등. 이 중 1998년 제1회 베이징음악제에는 아시아 국가에서 유일하게 선발되어 참여했고, 1999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한 해로 기록된다. 특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미라벨 궁전에서 가진 두 차례의 공연은 유럽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100회 정기연주회를 맞은 2003년에는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6곡)을 연주했다. 2008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매년 해외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 1999년 11월 14일 파리 ‘유네스코 평화의 음악제전'(유네스코 컨퍼런스홀)

▲ 2000년 9월 25일 ‘유엔 스태프데이 2000콘서트'(유엔본부 총회홀)

▲ 1997년 7월 유럽투어 중 크로아티아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텃밭을 만들다

단원들은 연주자이자 예술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활동하는 교육자들이었다. 세계시장 진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이들은 다음 세대의 새싹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2000년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콩쿠르와 여름음악캠프를 시작했다. 콩쿠르는 처음에 현악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2006년부터는 피아노, 관악·타악으로 분야를 확장했다. 2005년에는 음악아카데미를 개설해 마스터클래스와 특강을 시작했다. 어린 나무들이 ‘실내악’으로 한데 묶여 작은 숲이 되는 즐거움을 선사했고, 미래의 음악학도와 실내악 주자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대선배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 세계를 챙겨야 할 때가 왔다

1988년을 시점으로 2015년까지 총 16종의 음반을 발매했다. 음반 작업은 국제적 수준을 향한 연습이자 국제시장에 내미는 명함이나 다름없었다. ‘Korean Chamber Ensemble, Seoul’로 시작해 1999년 발매한 8집에서는 ‘Seoul’을 뗐고, 2012년 15집부터는 ‘Korean Chamber Orchestra’로 영문명을 바꾸었다. 국내에서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이라는 이름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해외에서는 다채로운 레퍼토리와 상관없이 바로크 음악만 연주하는 단체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문명을 바꾼 것. 그렇다! 이제 서울바로크합주단은 국내는 물론 세계 음악계의 안목 또한 신경 써야 하는 ‘세계적인’ 악단이 된 것이다.

창단 50주년을 맞은 2015년. 서울바로크합주단에게는 뉴욕·런던·빈·모스크바·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순회공연과 국내 무대가 기다리고 있으며, 목·금관 주자를 영입해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새롭게 탄생시킬 변화를 꾀하고 있다. “내게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무엇일까?”라며 자문하는 김민. 그가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이끌어온 의지가 반영된 말과 생각을 다음 장에서 만나보자.


▲ 2007년에 오보이스트 하이즈 홀리거와 협연

▲ 2014년 서울국제음악제에 초청된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 2009년 작곡과 지휘를 맡았던 펜데레츠키

행동을 낳은 말,

꿈을 현실로 바꾼 말

‘객석’에 담긴 김민의 말과 기사를 한데 모아 보았다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50주년 기념 특별 정기연주회가 있던 1월 14일. 콘서트홀 무대에 김민 음악감독이 보인다. 50년의 역사를 목도해온 서울바로크합주단의 터줏대감. 김민은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보면대 옆을 지나다 슬쩍 들여다보고 흐트러진 열을 직접 맞춘다. 하프시코드 옆에 가서는 위치를 확인하고 남성 단원들이 옮길 때 손 하나 더 보탠다.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하니 끝에 있는 계단으로 에둘러 가지 않고 ‘영차!’ 하며 무대 아래로 곧장 뛰어내린다. 그는 그렇게 직선으로 달려왔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히 신경 쓰며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이끌어왔다.

1984년 창간한 ‘객석’은 김민과 만날 때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어제와 미래를 물었고, 그는 성심껏 답해주었다. 그런 대답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오늘을 일구기 위한 그만의 각오였을 것이다. 김민과 그가 남긴 말을 실은 ‘객석’의 기사들을 다시 한 번 들춰보았다.

김민의 어린 시절을 담은 기사 중 김민의 아버지 김재인은 저명한 서예가이자 플루트도 다룰 줄 아는 음악 애호가였고, 그의 어머니 이재순은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연주가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중에 있을 때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울 작정으로 일본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소장하고 있던 바이올린을 구입했다고 한다. 일곱 살 무렵에는 어린 그의 손을 잡고 정봉렬 교수에게 데려가 레슨을 받게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그의 가족도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때도 부모님은 보따리 안에 바이올린을 챙겨 넣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서울로 돌아와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부모님과 첨예한 갈등을 빚은 것은 서울예고 진학을 앞두고였다. 그의 스승 이재헌은 그에게 음악을 선택하도록 권유했다. 이재헌은 서울예고 시절의 김민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그 학교에서 바이올린 외에 교내 오케스트라도 지도하고 있었죠. 하루는 김민이 오케스트라 연습 시간에 늦게 들어와 그에게 가볍게 주의를 주었어요. 그런데 한참 연습을 하다 보니 그가 안보이더군요. 연습을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김민을 찾아오라고 시켰어요. 그런데 그는 오지 않더군요.” 섬세하면서 개성 강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1989년 2월호

‘객석’의 ‘명연주단체 순례’ 연재의 첫 회로 꼽힌 서울바로크합주단과의 인터뷰 중 외국에 나가 연주할 기회는 지금도 많아요. 그러나 그냥 한번 가서 연주하고 돌아오면 뭘 해요. 중요한 건 우리의 음악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고, 연주가 끝난 뒤 그들의 감동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죠. 1985년 5월호

서울바로크합주단 35회 정기연주회를 마치고 그동안 앙상블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음악적 차원을 높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5월 19일 호암아트홀) 1986년 6월호

동남아 투어를 마치고 우리 합주단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과 앞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과제가 많습니다.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이제는 음악도 그 연주력에 따라 얼마든지 상품화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죠. 개인적으로 많은 세계 연주 여행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동남아 순회 연주만큼 보람 있고, 다각적인 차원에서 뜻깊은 연주를 해보지는 못했죠. 이것은 우리가 역시 인간이고 인간적으로 닿을 수 있는 연주가 가장 보람된 연주가 아닌가 하는 당연한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최고를 추구하는 욕심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연주를 목적으로 하는 연주단으로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시점이 되었기에 이러한 결론을 내려봅니다. 1992년 1월호


▲ 1980년 10월. 김민과 전봉초

▲ 1965년 10월 중앙국립극장 연주. 바이올린 김민·이남수 지휘/KBS교향악단

제52회 정기연주회를 마치고 계속 연주회를 하다 보니 앙상블 능력이 갈수록 향상되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단원들의 변동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어요. 이젠 이런 잠재력을 바탕으로 연주회 때마다 단원들 중 솔리스트를 선정해 앙상블뿐 아니라 개개인의 솔로 능력을 배양하는 데 힘쓰려 합니다. 지금까지 연주 단체는 자신의 영역을 다 이루어놓은, 이른바 유명 솔리스트와의 협연 무대만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이들 못지않게 좋은 연주자가 많습니다. 우리 악단은 이런 연주자들의 발굴에도 힘쓰려 합니다.(11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92년 12월호

제1회 데뷔 콘서트를 마치고 그동안은 기성 연주가가 아니면 솔리스트가 될 수 없었어요. 바로크합주단의 전통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청소년층이나 젊은 세대 중에도 좋은 연주가가 많아요. 그들에게도 제대로 무대에 내세워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12월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93년 1월호

독주회를 앞두고 이제 오십을 넘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어요. 답이 나오더군요. 30주년을 맞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세계적인 악단으로 키우는 것과 나 자신의 연주 활동 기회를 늘리는 것, 바로 그겁니다.(4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95년 4월호

‘객석’의 ‘만나고 싶었습니다’ 코너 중 해외 진출을 묻는 독자에게 이제는 우리 단체도 세계무대를 겨냥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지상 목표이기도 하죠. 상품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서울바로크합주단은 해외에 아홉 번 정도 나갔죠. 지금까지는 체재비와 항공료 그리고 약간의 개런티 정도로 만족했지만, 이젠 완벽한 상품화 과정을 거쳐 세계가 인정하는 프로 연주단으로서 면모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런티가 그 단체의 연주력과 지명도에 따라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 목표를 70%가량 달성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CD를 제작해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등 각종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음반의 경우, 매년 두 장씩 제작해 2000년까지 총 10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1998년 12월호

‘객석’의 ‘커버 스토리’에서 1980년부터 1994년까지는 나의 모든 것을 서울바로크합주단에 바쳤습니다. 기획, 디자인, 섭외 등을 혼자 다 했어요. 혹시 다른 데서 수입이 생기면 여기에 쏟아부었고. 행정이란 것을 배워본 적도 없어요. 예술가에겐 약한 부분이거든요. 따로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잘 점검해보고 균형만 잃지 않으면(Check And Balance) 될 것 같아요.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부서마다 사람이 있잖아요. 균형을 잡아주고, 한 사람만 손해 보지 않도록,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약점이 있어도 궁지에 몰면 안 되고, 좋은 점을 찾아주고. 행정의 달인? 난 절대 아니에요.

그리고 신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멋쟁이는 맞는 것 같네요. 넥타이를 선물받으면 난감해요. 성의를 생각하면 매고 가야 하는데, 그걸 못하겠는 거예요. 예전에 남미 칠레에 갔는데, 인상 깊었죠. 길고, 섬이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내게 긴 휴가가 주어진다면 차에 화구를 싣고 그곳의 4000km 해안 도로를 일주하고 싶어요. 와인이 유명한 곳이고, 왠지 쓸쓸하기도 해요. 가다가 멈춰 풍광을 화폭에 담고…. 그러고 싶어요. 2005년 4월호

50년을 머금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을 보며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인생이 덧없고 짧게 스쳐가는 바람같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들 하죠. 나는 좋아하는 실내악 그리고 서울바로크합주단과 50년을 함께함으로써 허무한 인생에서 자그마한 의미라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객석DB 서울바로크합주단

16종의 음반

바로크부터 현대음악이 상생하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음반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아우른 레퍼토리는 서울바로크합주단만의 힘이자 자랑이다. 음악평론가 진회숙은 “알려지지 않은 레퍼토리를 발굴해 청중에게 들려주는 초연 무대”와 “국내 작곡문화의 활성화에 기여”한다고, 이석렬은 “각 곡마다 다채롭고도 이질적인 분위기를 소화해내야 하는 음악회”라고 평한 바 있다. 박제성은 1965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 레퍼토리를 크게 바로크·고전·낭만·현대음악으로 구분해 분석한 결과 “거의 정확하게 4분의 1씩 다루었다”며, “시대별 레퍼토리가 매우 균형 잡혀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렇게 바로크부터 현대음악을 아우르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의 특징은 16종의 음반에도 잘 반영되어 있기에 다음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집(1988) 서울바로크합주단

텔레만·슈타미츠·버르토크·김병곤 | SKC

2집(1994) KBS 한국의 연주가 시리즈: 관현악과 실내악곡집

백병동·아렌스키·바흐·쥐페 | KBS

3집(1995)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30주년 기념음반

텔레만·바흐·슈타미츠·김병곤 | Midas Classic

4집(1997) 서울바로크합주단 앙코르 모음

모차르트·비발디·파헬벨·차이콥스키 | Sony Classical

5집(1997) 서울바로크합주단

바흐·페르골레시·레스피기 | Sony Classical

6집(1998) 서울바로크합주단 백만인의 클래식

코렐리·차이콥스키·알비노니 외|Sony Classical

7집(1998) 서울바로크합주단

브리튼·그리그·쇼스타코비치 | Sony Classical

8집(1999) 서울바로크합주단 Live in Salzburg 1999

모차르트·드보르자크·헨델·엘가 | Arch Classic

9집(2001) 2001 베를린 필하모닉 체임버홀 실황

헨델·얼윈·윤이상·멘델스존·쇼스타코비치 | CREDIA Classics

10집(2002) 제95회 특별정기연주회 실황:

Celebrating the Polish National Holiday of the Constitution

표트르 보르코프스키(지휘) | 최우정·조성온·강석희·크라우제 외 |

Global Sound Media

11집(2002) 사계

캐서린 조(바이올린) | CREDIA Classics

12집(2003) 바흐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전곡 녹음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6번 | 2CD | EMI

13집(2005) 베이스 연광철&서울바로크합주단

로버트 쾨니히(지휘) | 모차르트·로시니·베토벤·푸치니 외 | ENE Media

14집(2005) 윤이상

표트르 보르코프스키(지휘) | NAXOS

15집(2012)음악이 있는 곳에: 1999 잘츠브루크 실황

김민(지휘) | 모차르트·드보르자크·헨델·엘가 | DAEYOUNG AV

16집(2015) Korean Chamber Orchestra

윤소영(바이올린)·크세니야 코간(피아노) |

피아졸라·슈베르트·고레츠키·차이콥스키·멘델스존 | 2CD | DUX

해외 투어

23개국에서 177회 공연한 그들의 발자취

민간 실내악단인 서울바로크합주단은 1987년부터 꾸준히 해외 투어와 초청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부터 ‘한국’이라는 이름이 낯선 나라까지, 그들이 걸어온 궤적을 살펴본다.

일정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