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데미덴코 협연, 요엘 레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
2월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익숙함 속에 새로움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이 누군가는 발전하고, 누군가는 퇴보한다.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히 무한 반복한들 현상 유지 이상은 되지 못한다. 뚜렷한 정체성과 명확한 지향점을 확립해야 한다. 음악밖에 모른다고 해서 음악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음악으로 살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은 탁월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안팎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는 사이 KBS교향악단은 오랜 정체가 이어졌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향악단 중 하나라는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당면한 문제다. 이날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 ‘비르투오소를 만나다’ 첫 번째 시리즈인 ‘익숙한 속에 새로움’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은 듯했다.
첫 곡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은 낯선 장소를 방문한 외국인이 본 파리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시시각각 다채로운 소리가 유쾌하게 펼쳐지는 이 작품을 KBS교향악단은 다소 경직되고 예상 가능한 전개를 보여주었다. 성실한 연주였으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유머와 유연성, 그리고 참신한 감각이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5번은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데미덴코가 협연했는데, 무표정하게 등장한 그는 연주가 시작되자 전혀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피아노 위에서 일가견을 이룬 장인같이 그는 단호하고 긴장감 있는 태도로 무궁무진한 음색을 만들어냈다. 프로코피예프의 현대적 감각과 실험적 정신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이 그의 날 선 손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오케스트라는 이 피아니스트의 손길에 조금씩 둔하게 반응했는데, 예리하고 정확한 리듬과 명료하면서 섬세한 터치가 만든 구별된 소리의 층으로 마치 피아노 주변에만 명도와 채도를 높인 그림을 보는 듯했다. 느리고 서정적인 4악장에서 그는 광활한 음악의 품 안으로 조금씩 거리가 있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모두를 하나로 끌어당겼다. 이어서 음들이 흩뿌려지는 신비로운 스케일이 돋보인 마지막 5악장에 이르기까지 협연자의 역할을 넘어 음악가의 역량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2부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에서 KBS교향악단은 여유와 추진력을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애조 띤 선율과 웅장한 화성, 그리고 역동적 리듬을 살려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인위적으로 음악을 만들던 ‘파리의 미국인’, 얼추 맞춰나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과 비교해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풍부한 작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이해력은 뛰어났다. 연주의 전달력에 비례해 청중의 호응 역시 뜨거웠다. 묵직한 1악장, 여유로운 2악장에 이어 춤곡의 흥취가 절로 흘러나온 3악장,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4악장에 이르기까지 유연하게 완급을 조절해가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하나 되어 장중한 서사시를 빚어냈다. 이들은 그간 잃어버렸던 안정감을 되찾고 있다. 뛰어난 균형감과 정확성을 지닌 상임지휘자 요엘 레비와 함께 단원들 개개인의 섬세하고 세련된 연마가 더불어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서로 타성에 젖지 않게 될 것이다. 창조적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발전이 필요한 때다.
글 서주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KBS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