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식스틴 내한 공연
3월 13일
LG아트센터
역사와 상징으로 빛난 첫 만남
흔히 영국은 합창 음악의 강국이라 불린다. 하지만 이런 합창 음악 전통은 결코 공짜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까지도 거의 모든 칼리지 합창단과 성가대는 지극히 평범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위대한 르네상스 합창곡도 대부분 잊힌 상황이었다. 오늘날 영국 합창 음악의 높은 수준은 몇몇 선구자들이 애써 합창단의 수준을 높이는 한편, 음악 학자들이 옛 음악의 보고를 발굴하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영국 합창 음악 전통은 어떤 면에서는 20세기의 산물이다. 칼리지 합창단의 전반적 수준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약적으로 올라갔다면, 1980년대부터는 정교한 성인 앙상블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새로운 도약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영국 보컬 앙상블의 선두주자이자 21세기 이후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보여주는 더 식스틴의 내한 공연은 더욱 반가웠다.
이번 연주회 프로그램은 2013년부터 진행해온 ‘합창 순례’의 연장선상으로, 팔레스트리나와 알레그리, 제임스 맥밀런의 음악을 엮어 가톨릭 교회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는 흥미로운 콘셉트로 진행되었다. 특히 팔레스트리나와 맥밀런은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모두 당대의 시대적 여건과 한계를 극복하며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교회음악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 작곡가로, ‘예술음악’인 동시에 ‘실용음악’인 교회음악의 본질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날 연주회는 맥밀런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맥밀런의 ‘미제레레’가 백미로, 참회와 슬픔을 넘어선 희망의 메시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알레그리보다 시편 가사의 핵심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식스틴이 드러낸 비르투오시티와 폭넓은 표현력이 빛을 발한 연주였으며, 청중도 유독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라틴어 전례문 및 르네상스 영국 음악에 대한 통찰력, 스코틀랜드 민속음악풍 드론과 로리젠을 연상시키는 클러스터 화음이 돋보인 모테트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연주였다. 한편 2부에서 팔레스트리나 작품 사이에 르네상스적 어법이 두드러지는 맥밀런의 ‘오 빛나는 새벽이여’를 넣어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로그램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좋은 아이디어다.
프로그램 중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는 흔히 들을 수 있는 20세기 영국 판본이 아니라 현재 알려진 여러 필사본을 엮어 작품의 역사를 추적한 일종의 ‘역사적 하이브리드’ 판본이다. 이미 1980년대부터 몇몇 학자들과 연주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작업이지만 시대적 변화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만 대체적으로 이질적인 장식음을 배제해서인지 판본이 다소 평이한 느낌이었고, 연주 역시 아름다웠지만 양식적 차이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독창 그룹을 과연 어디에 배치할지도 궁금했는데, 연주장 구조를 볼 때 무대 뒤에 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팔레스트리나의 복합창 작품에서는 좀 더 강한 대비를 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더 식스틴은 시종일관 빼어난 인토네이션과 명쾌한 발음, 따뜻한 음색으로 폴리포니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몇몇 작품, 특히 팔레스트리나에서 연주자들의 개별적 음성이 살짝 튀어나오는 부분이 있었는데, 앙상블이 고르지 않다기보다 이들의 차별화된 개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식스틴은 이번 연주회에서 르네상스 합창 음악 하면 떠올리기 쉬운 창백한 아름다움이 아닌 활력과 강렬한 표현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가사에 담긴 감정을 전달하는 힘에서 독보적이었다. 빠른 시간 안에 이들의 바로크 연주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이준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