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연/경기필하모닉 멘델스존 ‘엘리야’

‘소리’보다 ‘음악’으로 마주한 시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4월 1일 12:00 오전

성시연/경기필하모닉 멘델스존 ‘엘리야’
3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소리’보다 ‘음악’으로 마주한 시간

180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럽 최초로 필하모니 협회가 발족한 이래 각 도시에 있는 협회 산하 악단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명명하면서 동시에 합창단의 필요성도 더욱 높아졌다. 합창이 포함된 곡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빈 필하모닉과 빈 징페라인, 베를린 필하모닉과 베를린 징아카데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필하모니아 합창단은 그 대표적인 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연주할 수 있는 기반이 일찌감치 세워진 셈이다. 반면 우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시·도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따로 움직이다 보니 합창이 포함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따로 예산을 마련해야 했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추는 것은 고사하고 리허설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결국 작품 연주 횟수를 가뭄에 콩 나듯 하게 만들었다. 연주의 질마저도 평균 이하였다.

경기필과 성시연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경기필 데뷔 무대에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로 화제를 뿌린 성시연은 버르토크·시마노프스키 등 중량감 있는 레퍼토리로 전임 지휘자가 가꾸어놓은 아카데믹함과 역동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이제 경기필의 공연장에 가면 어떤 ‘소리’보다는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지 기대감이 앞서게 된다. 3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만석이었다. 더구나 국내에서 거의 제대로 연주되지 않던 멘델스존의 ‘엘리야’를 선곡한 경기필의 도전은 장안의 평론가들의 발걸음을 한데 모이게 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살아계신 여호와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바리톤 사무엘 윤의 도입부 서창은 그가 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역으로 매년 초청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의 엘리야는 바알 사제의 목을 치던 격정적이고 영웅적인 선지자를 그대로 대변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불사른 다음 엘리야가 부르는 ‘주의 말씀은 불같지 않더냐’에서 사무엘 윤의 목소리는 드넓은 콘서트홀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특히 2부의 하이라이트 ‘나는 만족합니다. 내 생명 거둬주소서’는 깊은 영성의 세계로 안내했다.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의 활약도 돋보였다. 적재적소에서 오페라와 차별화된 교회음악 발성의 진면목을 뿜어내며 감동을 선사했다. 소프라노 장유리와 테너 김재형의 역할도 부족함이 없었다.
1989년에 창단한 서울모테트합창단은 교회음악에 관한 한 국내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서울시합창단과 함께한 합창은 경기필과 충분히 리허설을 하지 못했음에도 수준 높은 음악성을 일궜다. 발음도 탁월했는데, 독일어 프레이즈의 마지막 자음까지도 모든 단원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 모든 장점이 하나로 용해되어 나오기까지는 지휘자 성시연의 역할이 가장 컸을 터. 바알 사제들과 엘리야의 대결 장면은 음악을 만들어가는 데 급급한 게 아니라 극의 서사적 면까지 아우르는 명연주였다. 대위법적인 부분뿐 아니라 합창에서도 성시연의 통찰력은 빛을 발했다.
내홍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서울시향과 재단법인 출범 이후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KBS교향악단이 주춤하는 사이, 경기필은 실력뿐 아니라 레퍼토리 면에서도 일취월장하며 국내 정상을 향해 도약하고 있다. 엑스트라 없이 105명의 3관 편성으로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한 당국의 의지와 성시연 지휘자, 그리고 혹독한 리허설을 감내하며 연주력을 다듬고 있는 단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경기필하모닉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