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예술가들이 주목받았던, 다채로운 공연 속으로 들어가 본다
홍콩 아트 페스티벌이 지난 2월 27일부터 3월 29일까지 전 세계 49개 팀(개인)이 참여한 가운데 137개의 공연을 올렸다. 올해는 UN이 선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 40년 된 것을 기념하며, 다양한 여성 아티스트와 작품 속에서 여성이 주축인 장르의 공연을 페스티벌 전반에 걸쳐 선보였다.
1973년에 시작해 올해 43회를 맞은 홍콩 아트 페스티벌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 축제로 손꼽힌다. 매년 2~3월 한 달여 기간에 클래식 음악·재즈·월드뮤직·연극·무용 등 다채로운 공연이 무대에 오르고, 이를 관람하기 위해 페스티벌을 찾는 관객 수는 연평균 15만 명에 달한다.
개막 2개월 전 인 지난해 말, 홍콩 아트 페스티벌의 티켓 현황을 보니, 전체 공연 티켓의 60%가 팔린 상태였다. 일찍이 높은 예매율을 보인 공연은 네덜란드 내셔널 발레의 ‘신데렐라’, 볼쇼이 발레의 ‘보석들’, 바비 맥퍼린, 두다멜/LA 필, 볼쇼이 오페라의 ‘차르의 신부’, 크리스티안 텔레만/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바비 맥퍼린, 핑크 마티니 등으로 페스티벌의 다양성과 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동시에 이것은 관객의 기대?만족?재방문의 선순환 구조 속에서 탄탄하게 자리한 페스티벌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홍콩 아트 페스티벌은 매년 관객을 불러모으는 데 무척이나 ‘똑똑하게’ ‘열심’이다. 이들은 ‘Festival PLUS’라는 이름 아래 전년도 11월부터 공연 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페스티벌 기간 중 마스터클래스·워크숍·백스테이지 투어·전시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250여 개에 달하는 프로그램 중에는 무료로 진행하는 예술가와의 만남부터, 약 5000원만 지불하면 참여할 수 있는 백스테이지 투어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워크숍이나 마스터클래스의 경우 약 2만5000원의 비용이 드는데, 가장 비싼 워크숍이 4만 원대인 것을 감안하면 기꺼이 값을 치뤄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싶게 만든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참여한 공연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시아의 서정적인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로 주목받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리사이틀(3월 6일), ‘아시아 퍼시픽 댄스 플랫폼(Asia Pacific Dance Platform Ⅶ)’의 일환으로 벨기에 레 발레 세 드라 베 소속 무용가 예효승이 ‘Traces’ 공연과 함께 안무 워크숍을 3월 5~7일에 가졌다. 페스티벌의 마지막 주말인 3월 28일에는 ‘월드뮤직 위켄드(World Music Weekend)’로 음악 듀오 숨(Su:m)과 정가악회의 공연, 그리고 스페인 플라멩코 밴드 라스 미가스가 정가악회와 ‘판소리, 플라멩코를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컬래버레이션 공연을 치렀다. 올해 예효승, 숨(Su:m), 그리고 정가악회의 홍콩 방문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 아티스트 해외 초청 지원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센터스테이지코리아’가 지원했다.
숨×정가악회, ‘월드뮤직 위켄드:한국 음악’
홍콩 아트 페스티벌에서 ‘월드뮤직 위켄드’는 올해 처음 선보인 섹션이다. 2012년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에서 숨(Su:m)과 정가악회의 쇼케이스 공연을 눈여겨본 홍콩 아트 페스티벌 프로그램 디렉터 소궉완이 이들을 초청하면서 새롭게 마련한 것. 한국에서 비행기로 3시간 30분 거리인 홍콩에 두 팀이 오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3월 28일, ‘한국음악’을 타이틀로 공연하는 숨과 정가악회를 만나기 위해 시티홀을 찾았다. 몇 주 전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리사이틀을 봤다는 한 페스티벌 관계자는 “젊은 나이에 굉장히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춘 것에 놀랐다”며 이번에 한국음악을 하는 연주자들에게선 어떤 영감을 받게 될지 기대된다는 말을 건넸다.
이날 공연의 전반부는 숨, 후반부는 정가악회가 각각 맡았다. 공연 시작 전, 주최 측의 요청에 따라 전통악기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숨의 박지하가 피리·생황·양금·가야금 등 국악기의 간단한 구조를 설명하고, 악기 소리를 들려주는 사이 10여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숨은 고음의 피리 소리가 인상적인 ‘열림:신(新)신방곡’으로 객석의 공기를 틀어쥐기 시작했다. 이후 서정민이 연주하는 25현 가야금의 날렵하면서도 진중한 소리 위로 박지하는 글로켄슈필과 양금, 생황으로 호흡과 채색을 바꿔가며 ‘도시 아리’ ‘Passing Rain’ ‘안개 속 나무를 바라보며’ ‘거울자아Ⅲ’까지 물 흐르듯 연주했다. 전통악기로 만들어내는 현대적 음향과 선율 사이에 내비치는 논리적 즉흥성과 공간감은, 동서양의 문화와 예술이 교차하는 홍콩의 관객에게도 통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홍콩 아트 페스티벌 직전에 다녀온 북미 최대의 축제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 세 번의 쇼케이스에서 전석 기립박수를 받은 이유까지도 공연을 마치기 전 객석을 향한 박지하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숨이 연주하는 악기는 모두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들이지만, 음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 직접 작곡했습니다.”
중간 휴식 후 정가악회가 공연의 후반부를 맡았다. 생황(이향희) 연주를 시작으로, 가야금(이지애)·거문고(박다울)·해금(박수민)·장구(김진혁)가 차례로 무대에 오르며 ‘평창 아라리’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창작곡 ‘알리오 ver.2’를 연주했다.
깊고 짙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한복 치마를 입은 소리꾼 이승희가 무대에 등장하자, 정가악회는 심청가의 주요 대목 중 하나인 ‘범피중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연함과 긴박함이 오가는 심봉사와 심청이의 노래에 더해진 소리꾼의 짙고 묵직한 감성은 객석을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채,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며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엄청난 박수가 쏟아졌다. 이후 봄의 기운을 노래하는 ‘염양춘’과 브라질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베라 크루즈’가 이어졌고, 소리꾼 왕희림이 나서서 경기민요 ‘난봉가’와 제주 민요를 모티프로 한 ‘이야옹’을 선보이며, 판소리와 또 다른 민요의 정서를 관객에게 선사했다.
모든 순서가 끝난 후 공연장 로비에는 음반을 구입하고, 숨과 정가악회 멤버들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한참 동안 북적였다. 다인종·다문화 도시답게 줄을 선 관객의 생김새는 제각각 달랐지만, 20~30대 여성이 상당수였다. 사인을 받기 위해 줄 선 몇몇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니, 이날 한국 전통음악을 처음 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케이팝에 호감이 있던 터에 한국 전통음악이 궁금해 공연장을 찾았다는 이도 있었다. 홍콩에 거주 중인 10대 후반의 한 여학생은 “숨의 음악이 마치 영화 O.S.T 같이 느껴졌다. 중국의 악기와 큰 차이가 없는데, 서양적이면서 또 처음 들어보는 선율을 연주해내는 것이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건넸다. 각각 유럽과 남미 출신으로 홍콩에서 유학 중인 여대생들은 “이날 공연을 보면서 개별 연주자의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다양한 악기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는 후기를 남겼다.
정가악회×라스 미가스, ‘판소리, 플라멩코를 만나다’
3월 28일 저녁 ‘판소리, 플라멩코를 만나다’ 무대에서는 정가악회와 플라멩코 밴드 라스 미가스의 알바 카르모나(보컬)와 마르타 로블레스(기타), 이날 공연을 위해 특별히 참석한 알레익스 토비아스(퍼커션), 사라 바레로(춤)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전통음악과 스페인 플라멩코 음악이 정서적으로 유사한 것에 주목해온 정가악회는 2012년 스페인 빅 라이브 뮤직 마켓(MMVV)에 참여하면서 라스 미가스와 첫 컬래버레이션을 갖고 네 곡의 레퍼토리를 개발해 쇼케이스를 통해 선보였다. 이후 지속적인 음악 교류가 이뤄지면서 2013년 바르셀로나 플라멩코 페스티벌과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 무대에 올랐고, 같은 해 남산국악당에서 합동 공연을 이어갔다.
이번에 정가악회와 라스 미가스가 선보인 ‘판소리, 플라멩코를 만나다’는 홍콩 아트 페스티벌 공연 중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현지 관객에게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음악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 기대작 중 하나였다.
이날 전체 프로그램은 두 팀의 컬래버레이션 작업과 각 팀의 개별 연주가 서로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플라멩코 리듬 중 하나인 탕길로스에 국악의 타령 장단을 얹은 곡을 시작으로, 플라멩코 보컬의 노래와 소리꾼의 쑥대머리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는가 하면, 가야금·장구·생황 연주에 맞춰 플라멩코 보컬의 구슬픈 노래가 이어졌다.
각자의 장단과 리듬이 따로 또 같이 흐르는 그 사이로 마치 작고 파란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했다. 서로의 다른 에너지를 긴밀하게 주고받으며 점점 증폭되던 음악은 진초록색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선 사라 바레로의 플라멩코 춤과 함께 극장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막바지, 플라멩코 기타와 우리 악기, 판소리의 구음과 플라멩코 보컬이 켜켜이 쌓아올리는 긴장과 이완, 대립의 구조 속에 공연은 마무됐다.
공연 종료 후 마련된 ‘예술가와의 대화’에는 관객 100여 명이 자리에 남아 국악과 플라멩코의 공통점을 비롯해 서로 다른 음악으로 컬래버레이션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비슷한 악기를 사용하는 중국과 한국 전통음악의 차이점에 대한 궁금증뿐 아니라 컬래버레이션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에 대한 예리한 질문도 나왔다.
한국의 전통음악이든, 스페인의 플라멩코든 각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관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월드뮤직 위켄드’로 각 단체가 조명될 때 음악에 대한 문화적 배경 지식이나 관객 체험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마련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중화권 예술가들의 공동 제작, 실험극 ‘군중(The Crowd)’
그간 이뤄진 홍콩 아트 페스티벌의 흐름을 보면, 홍콩을 포함한 중국의 공연 예술 및 아시아권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공연을 소개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홍콩 아트 페스티벌은 홍콩을 중심으로 중화권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해 자체 제작 및 공동 제작을 통해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무용이나 연극을 중심으로 기획부터 캐스팅·제작·홍보 전반을 맡아 페스티벌 기간 중 홍콩 아트 페스티벌에서 초연하는 방식이다. 제작한 작품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것 또한 주요 정책 중 하나다.
이러한 신작 시리즈의 일환으로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홍콩 문화센터 스튜디오 시어터에서 초연된 ‘군중(The Crowd)’을 관람했다. 홍콩 아트 페스티벌과 상하이 드라마 아트센터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르봉의 ‘군중심리’에서 영감을 받은 극작가 위룽쥔이 입센의 ‘민중의 적’을 기반으로 대본을 작성했고, 탕와이킷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투쟁하는 노동자의 총에 사살된 모친에 대한 복수를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충칭·베이징·상하이·홍콩을 오가며 이어가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실험적 대본을 구현하기 위한 무대는 상당히 미니멀했다.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인 조명과 음악, 그리고 여섯 명의 배우들은 관객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이 모든 장치는 최상의 극적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무대 한쪽에 마련한 그랜드피아노는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떠올리게 했다. 한 명의 연주자(때때로 배우가 동원되어)가 극적 순간에 따라 연주하며 단절과 변질 사이에서 빚어진 아날로그 음향은 텍스트 중심의 서사 구조와 상호 보완을 이루며 작품에 아우라를 더해주었다.
중간 휴식 없이 2시간가량 이어진 극은 어느 한구석 명쾌한 부분이 없다. 그저 개인과 대중, 사건과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군중의 시대 속에 비친 개인의 초상을 보여줄 뿐이다. 역사성을 기반으로 한 보편적 명제와 문제 제시, 극의 실험적 형식이나 요소는 현지 관객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해 보였다.
공연장을 나오며 분명해진 생각은 또 있다. 개인의 취향을 떠나 완성도 높은 이 작품이 페스티벌을 찾은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극과 놀라움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홍콩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사진 정가악회·숨·홍콩 아트 페스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