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파질 사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5월 1일 12:00 오전

피아니스트 파질 사이

제14회 통영국제음악제 리뷰 ②


▲ 자작곡을 연주하고 있는 파질 사이

변화를 기대하는 관찰자

통영행 버스 안. 파질 사이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렜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좋아했고, 여러 영상을 통해 그의 재지한 연주를 자주 감상했다. 2004년의 내한 공연을 챙겨 보지 못했기에 그의 실연을 고대하고 있었다. SNS로 사이의 신보 ‘새로운 노래’의 발매 소식을 전해 들으며 바닷바람으로 촉촉한 통영의 하늘을 만났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 상주 작곡가이자 연주자로 참여한 사이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총 여섯 개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밤 10시에 시작하는 나이트 스튜디오에서 데이비스·나메카와 마키 부부의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변주곡(파질 사이 작곡) 아시아 초연을 지켜보고, 이튿날 오전 11시에 리사이틀을 여는 등 다소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직접 만난 사이는 다소 피로해 보였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연주에는 강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3월 29일에 열린 리사이틀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또 작곡가로서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이는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과 자신의 작품들로 1부와 2부를 각각 구성했다.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에서 사이는 무소륵스키의 대담한 화성 진행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며 독창성을 마음껏 드러냈다. 가벼운 터치에도 무게감을 동반하며 입체적 음향을 만들었다. 사이는 피아노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보였다.

2부에서는 ‘게지파크2’ ‘SES’ ‘나짐’ ‘검은 대지’ ‘사이트 파이크’ ‘니체와 바그너’ 등 총 여섯 곡의 자작곡을 들려주었다. 기자가 가장 기다렸던 곡은 그의 출세작 ‘검은 대지’였고, 역시 전체 연주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만했다. 이 곡은 터키 음유시인 아시크 베이셀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으로, 초반부터 프리페어드 피아노(현의 진동을 조작해 원래의 음향을 변화시키는 연주법)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터키 민속음악의 색채를 강하게 띤다. 거칠고 도발적인 연주는 사이 특유의 음울함과 저항성을 드러냈다.

‘게지 파크2’와 ‘나짐’에서는 사이의 또 다른 면인 섬세함을 엿볼 수 있었다. 첫 곡으로 연주했던 ‘게지 파크2’는 ‘게지 파크’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이스탄불의 반정부 시위 현장을 담아낸 곡이다. 사이가 “시위 현장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담아내려 했다”고 설명한 이 곡은 피아노 독주곡임에도 풍부한 질감이 느껴졌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듯 강렬한 슬픔을 전달했다. ‘나짐’은 나짐 히크메트의 작품을 바탕으로, 오라토리오 곡으로 먼저 발표한 후 일부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해 재발표한 곡이다. 평화를 노래하다 정부의 탄압으로 옥고를 치른 후 러시아로 망명한 인물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려는 듯 진지하고 세밀하게 감정을 확장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리사이틀이 끝나고 “저 사람 이름이 뭐라꼬? 파질 세이? 파질 사이?” “어느 나라 사람이라꼬? 오매, 잘하네” 하는 감상평이 들려왔다. 길게 늘어선 팬 사인회 줄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하고 있는 데이비스와 사이

파질 사이가 말하는 ‘오늘’의 음악

터키에서 나고 자라 독일에서 유학한 사이는 자유로운 연주 스타일로 ‘제2의 글렌 굴드’라 불리며 세계 음악계에 등장했다. 독일의 베를린·프랑크푸르트·라인가우·슐레스비와 프랑스 파리, 일본의 도쿄 등 세계 여러 지역의 극장에 레지던스 아티스트로 머물렀고, 최근에는 작곡가로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정치·종교·문화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때때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독창성과 탁월한 음악성을 지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사이는 주로 터키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곡을 쓴다. 그뿐 아니라 연주 기법 면에서도 자국의 전통적인 음악성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리페어드 피아노. 리사이틀이 끝난 후 만난 그에게 이 기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물으니 “터키의 전통악기인 사즈와 음색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터키의 민속적, 토속적인 소리를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음색뿐 아니라 화성적으로도 그렇죠. 특정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때도 있지만, 그건 음악을 듣고 느낄 청중의 몫이니 제가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1990년대 초반, 모차르트·파가니니의 곡을 재즈로 편곡·연주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것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사이의 작품 대다수가 재즈의 리듬감과 표현력을 지닌다. 사이는 파리에서 카무라 군데미르를 사사하며 즉흥연주를 배운 덕에 악보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작곡가는 모든 종류의 음악에 흥미를 가져야 있어야 합니다.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새로운 장르의 음악부터 작곡가 자신이 속한 민족의 전통음악, 재즈, 전자음악 등 여러 요소를 효과적으로 통합할 줄 알아야 하죠.”

사이는 2012년, SNS에 이슬람을 비판하는 풍자시를 올렸다가 터키 법원으로부터 신성모독죄로 집행유예 10월을 선고받고, 2014년 예정됐던 안탈리아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직에서 퇴출됐다. 최근 몇 년간 자국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 조심스레 물으니 “나는 ‘오늘’의 삶을 음악으로 표현할 뿐이다. 나의 삶, 사람들, 도시, 국가의 상황을 음악에 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이는 “올해에만 120개 공연을 한다. 5~6개 작품을 새로 쓸 예정이고, 3~4개 신보를 발매할 예정이다. 이것은 지난 몇 년간 계속되어온 나의 일상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말하며 아시아 작곡가 쇼케이스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채비를 했다.

쇼케이스에서 만난 사이가 젊은 음악가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듣고, 일일이 격려하는 모습을 보며 “음악으로 경쟁하는 건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하고 말한 게 생각나 웃음이 났다. 무뚝뚝하지만 늘 주변을 관찰하고 변화를 기대하는 부지런한 음악가. 사이의 손가락에서 살아 숨 쉬는 가능성을 보았다.

사진 통영국제음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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