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던 발레의 ‘폭풍의 언덕’

발레에 비친 문학의 감동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6월 1일 12:00 오전

고전문학의 감격을 공감각적 음악과 안무로 승화시킨 ‘폭풍의 언덕’. 초연한 지 13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한 이유

런던에서는 로열 발레와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가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런던 밖으로 눈을 돌리면 전·현직 감독의 레퍼토리가 균형을 이루는 버밍엄 로열 발레, 한때 파산 선고를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회생한 글래스고의 스코티시 발레 그리고 리즈의 노던 발레가 영국 발레의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로열 발레와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가 캐스팅과 감각적인 신작으로 자웅을 겨루는 사이, 영국 중북부 발레단은 공연 소재를 친근한 고전문학으로 넓히는 데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지난 3월 런던 새들러스 웰스에 오른 노던 발레의 ‘위대한 개츠비’와 스코티시 발레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전 공연이 매진됐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가적 명성과 안무가 데이비드 닉슨, 아나벨러 로페스 오호아의 해석력이 각각 만나 원전이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노던 발레는 4월을 전후해 셰필드와 사우샘프턴, 밀턴 케인스를 커버하는 ‘폭풍의 언덕’ 투어를 하며 고전문학의 발레화를 재차 시험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이 어떻게 무용 언어로 형상화됐는지, 초연한 지 13년이 지난 시점에서 ‘폭풍의 언덕’은 어떤 경쟁력을 갖췄는지, 노던 발레의 예술감독 데이비드 닉슨의 야심을 확인하려는 관객의 발길이 4월 28일부터 5월 2일까지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80km가량 떨어진 밀턴 케인스 극장으로 이어졌다.

노던 발레는 1969년 캐나다 태생의 무용수 겸 안무가 라버네 마이어(1935~2008)가 런던 이외 지역에서는 처음 설립한 프로페셔널 단체다. 창단 당시 맨체스터에서 10여 명의 무용수와 ‘노던 댄스 시어터’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1976년 후임 감독 로버트 워런이 ‘노던 발레 시어터’로 개명하고(2010년 ‘노던 발레’로 개칭) 부르농빌과 크랑코 스타일을 섭렵하면서 영국 내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됐다. 1987년, 로열 발레 출신으로 20년 동안 BBC 드라마 배우로 활동한 크리스토퍼 게이블을 새 예술감독으로 영입하면서 현재 기조인 스토리텔링 발레에 박차를 기했다. 게이블과 노던 발레의 11년 동거는 1998년 게이블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지만, 후임으로 부임한 이탈리아 출신 스테파노 잔네티 역시 무용과 극 요소를 결합한 게이블의 노선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해 단체의 전통이 이어졌다. 잔네티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각색했다.

2001년 노던 발레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 지도력을 발휘 중인 데이비드 닉슨은 캐나다 내셔널 발레와 도이치 오퍼 발레에서 활동한 무용수 겸 안무가다. 애시턴과 맥밀런으로 이어지는 영국 발레 전통과 공유할 자산이 많지 않은 닉슨은 무용수들의 몸에서 우아함과 예술성을 뽑아내는 데 몰두하기보다,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즐겼을 대중적 텍스트를 발레로 변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노던 발레에 합류하기 전에는 ‘피터팬’ ‘드라큘라’ ‘미녀와 야수’ ‘삼총사’를 발레화하며 유명세를 탔고, ‘폭풍의 언덕’은 닉슨이 노던 발레에 부임해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다.

요크셔 지방에 근거를 둔 노던 발레가 동향을 배경으로 한 브론테의 원작을 작품으로 만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의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에게 음악을 맡긴 점은 작품의 전개 구조가 기존 발레의 성문법을 따르기보다 인물 사이의 갈등을 통한 스토리텔링에 있음을 시사한다. 닉슨은 초연에서 만족하지 못한 의상도 직접 보완했다. 드라마투르기를 맡은 퍼트리샤 도일은 책보다 먼저 윌리엄 와일러의 1939년 영화를 통해 확인했던 원작의 감동을 프로그램 노트에 서술했다.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가 도일이 원하는 이상적인 히스클리프상이었다. 발레 ‘폭풍의 언덕’이 우리네 드라마 ‘사랑과 야망’과 같은 멜로물로 흐를지, 2011년 앤드리아 아널드가 리바이벌한 영화처럼 참신한 이미지로 새로운 시공을 창조할 수 있을지, 열쇠는 안무가 닉슨이 쥐고 있었다.


▲ 발레 ‘폭풍의 언덕’중 이사벨라와 히스클리프

문학과 발레의 결합, 이상적인 조건은?

발레는 2막으로 구성했다. 연모하는 캐서린이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것을 알고 히스클리프가 집을 나가기까지가 전반부, 그 후 부자가 되어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온 이후의 복수 과정이 후반부를 채웠다. 개막 공연에서 캐서린 역에는 ‘위험한 관계’에서 열연해 2010년 영국 비평가상 여성 무용수 공연 최우수 부문을 수상한 마사 리볼트, 히스클리프 역에는 2012년 닉슨 버전의 ‘온딘’으로 극찬을 얻은 베테랑 토비어스 바틀리가 낙점됐다. 에드거 역에는 다카하시 히로나오가, 히스클리프를 자극하고 복수를 야기하는 힌들리 역은 줄리아노 콘타디니가 맡았다.

작품은 무언가에 홀린 모습의 히스클리프가 무대에 등장해 닥치는 대로 분노를 폭발하며 시작된다. 격노가 잦아들면서 히스클리프는 어린 시절 캐서린과 황야에서 놀던 모습을 회상한다. 닉슨 감독은 어린 시절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레이철 길레스피와 제러미 커니어에게 맡겨 액자식 구조를 시도했다. 작품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등장인물이 아역에서 성인으로 바뀌는 혼잡한 상황에도 극이 중심을 잃지 않은 건 쇤베르그의 음악 덕분이다. 뮤지컬 음악의 거장답게 쇤베르그는 기승전결에 따른 긴장과 이완에 능란했다. 쇤베르그는 프로그램 노트에서 “작품 안에 성악곡을 쓰지 않아도 됐기에 손이 가는 대로 곡을 썼다”고 밝혔다. 요크셔의 황야를 적시는 비와 언덕에 부는 바람 소리도 무대장치로 표현하기보다 쇤베르그의 음악을 통해 공감각적 교감을 시도했다. 영화감독 아널드가 이미지로 주인공의 심리를 노출했다면 쇤베르그는 건반 스케치와 윌리엄 데이비드 브론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상을 형상화했다.

전반부에서 발레 문법상 주목할 만한 장면은, 성장한 캐서린이 에드거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에 매료되는 과정을 코르드 발레를 시작으로 우아한 사교댄스의 2인무로 표현한 부분이다. 닉슨은 ‘온딘’에서처럼 아다지오 템포에 맞춰 파트너끼리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부양하는 테크닉으로 서로를 향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후반부에서는 육욕을 가누지 못하는 이사벨라(해나 베이트먼)의 본능이 선정적 몸짓으로 구체화됐다. 테크닉으로 관객의 마음을 빼앗는 패시지가 조금 더 늘었다면 작품이 한층 품위 있었을 것이다.

전편에 걸쳐 손꼽는 최고의 장면은 리볼트와 바틀리가 얼어붙은 광야에서 격한 감정에 서로 몸을 맡기고 황홀경에 빠지는 마지막 파드되였다. 기묘한 리프팅 기교가 파트너를 향한 절박한 사랑을 상징했다. 서로의 몸을 비벼가며 체온을 느끼려 하지만, 죽음 앞에 사랑이 어떻게 이어질지 번민하는 남녀가 오랫동안 엉겨 붙어 있었다. 히스클리프가 혼자 무릎을 꿇고 몸 위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숨이 멎길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은 문학의 감동을 무용 언어로 변환하는 닉슨의 수완이 무르익었음을 증명한다. 평소 귀공자 이미지로 역할이 제한적이던 바틀리는 드라마투르기가 원한 동명 영화 속 로런스 올리비에의 모습을 소화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 눈을 맞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히스클리프

발레와 고전문학의 결합은 국내에서도 흔한 일이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춘향’ ‘심청’ ‘흥부와 놀부’로 이어지는 고전 3부작을 구상한 적이 있고, 국립발레단은 국가 브랜드 사업의 일환으로 ‘왕자호동’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국내 뮤지컬이 포용하는 맥락과 노던 발레가 영국 문학에 관심을 경주하는 배후는 상통하는 면이 있다. 공연 후에도 감동의 여운을 이어갈, 책으로 된 텍스트가 있다는 점. 기존의 한국 전래 고전이 상상력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의 측면에서 발레화하기 적합한 소재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음악만 들으면 19세기 클래식 발레가 아닌가 싶을 만큼 장르 이해가 출중한 작곡가의 도움이 있다면, 보다 정련된 고전문학의 발레화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 Merlin He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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