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해석할 때가 왔다. 그램 머피와 만난 유니버설발레단은 지금까지 없던 ‘지젤’을 세계 초연한다
아주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난 호주 출신 안무가 그램 머피는 눈매가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헬로(Hello)” 하고 손을 내밀자, “오, 스위리~(Oh, sweetie)” 하며 두 손으로 팔을 흔드는 바람에 인터뷰를 준비하며 느낀 노곤함이 싹 가셨다.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신작 ‘지젤’을 선보인다. 문훈숙 단장은 한국 발레 수준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창작 레퍼토리를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콘텐츠 확보가 경쟁력이 될 미래의 공연 시장에 발레단의 지속적인 창작 작품 개발은 좋은 투자가 될 것이다.
그동안 유니버설발레단은 우리나라 고전문학인 ‘심청’과 ‘춘향’을 발레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번 신작은 기존 클래식 발레 작품을 재해석해 선보인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1841년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초연한 ‘지젤’은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극장 예술가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낭만 발레 스타일을 완성한 작품이다.
이러한 ‘지젤’을 리컴포즈하는 안무가는 그램 머피(Graeme Murphy)다.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난 그램 머피는 오스트레일리아 발레 스쿨을 졸업한 뒤 오스트레일리아 발레에 입단했다. 그는 수석 무용수가 되는 것보다 안무를 창작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안무가 로버트 헬프먼(Robert Helpmann)과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에게 자극을 받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무용수로서 커리어를 쌓았다. 1975년 호주로 돌아온 그는 프리랜서 안무가로 활동하다 이듬해 시드니 댄스 컴퍼니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2007년까지 역임했다. 그램 머피는 시드니 댄스 컴퍼니와 31년의 기간 동안 30개가 넘는 전막을 포함해 50여 개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램 머피 안무의 특징은 개념을 탈피한 해석과 전통의 재탄생이다. 그는 기존의 ‘백조의 호수’를 다이애나 비와 찰스 왕자, 카밀라의 삼각관계를 덧입혀 정신병원에 갇히는 오데트의 비극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호평을 받으며 그램 머피와 오스트레일리아 발레를 널리 알리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램 머피는 새로운 단어를 개발해 창조적 언어를 꺼낸다. 그의 또 다른 사명은 자신의 안무를 통해 무용수들의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는 오전에 유니버설발레단으로 출근한다. 여섯 시간가량 무용수들을 지휘하고, 쉬는 시간에는 아내이자 조안무가인 재닛 버넌(Janet Vernon)과 유니버설아트센터 안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신작 ‘지젤’ 발표를 목전에 두고 작품을 구체화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신은 새로운 ‘지젤’을 위해 무엇을 고민했나요.
아시아의 전설 중 복수를 담은 이야기들을 찾아봤습니다. 중국의 전설 중 한 맺힌 여성의 영혼이 내려와 복수하는 이야기가 많았죠. 신작 ‘지젤’은 기존의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은 똑같지만, 윌리들은 나약한 존재가 아닌 강한 존재입니다. 원작 1막에서 지젤은 굉장히 연약한데, 새로운 지젤은 의지적이고 강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독립적인 각자의 콘셉트를 갖고 있어요.
안무할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기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고착화됐었죠. 무용수들이 창작 작품을 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무용수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안무가가 무용수의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야 해요. 이러한 사명감을 갖고 안무를 합니다.
안무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어릴 적부터 안무에 대한 관심은 꾸준했습니다. 열여섯 살쯤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았는데, 춤보다 안무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오스트레일리아 발레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였던 로버트 헬프먼에게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발레의 미국 투어에서 루돌프 누레예프와 작업한 뒤 춤을 폭넓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컨템퍼러리 댄스에 대한 호기심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죠.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 다양한 춤을 배우고, 상주 안무가로 오스트레일리아 발레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존의 클래식 발레를 새로운 버전으로 재창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죠. 이러한 작업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원작을 그대로 공연하면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나만의 패션을 만들고 싶습니다. 클래식(고전)이란 것이 이만큼 지속됐다는 것은 우리가 그 작품을 새롭게 해석할 때가 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스토리와 음악은 관객에게 편안함을 주지만, 관객을 일깨우는 충격이 부족합니다. 열 개의 다른 발레단이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 관객은 작품의 흐름에 무뎌져 서사를 생각하지 않아요. 무용수들의 테크닉만 감상하는 거죠. 관객이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백조의 호수’를 재안무했을 때는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평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 발레의 전통 레퍼토리가 됐습니다. 매해 ‘백조의 호수’로 투어를 하는데, 관객이 매료되는 것을 느껴요. 현대적 작품에서 전통의 향기를 느끼는 것입니다.
안무를 작업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무용수들이 지금의 감정으로 접근하길 바랍니다. 동시대를 반영한 생생한 감정은 관객에게 더욱 공감을 줍니다.
어떠한 인연으로 유니버설발레단의 신작 ‘지젤’ 작품에 참여한 건가요.
‘지젤’을 안무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정해둔 발레단이 없었죠. 동료 중 한 명이 유니버설발레단을 소개해줬습니다. 호주에서 문훈숙 단장을 만났고, 그녀는 제가 안무한 ‘백조의 호수’를 인상 깊게 봤다며 협업을 제안했죠. ‘지젤’을 새롭게 창작해보면 어떨지 물으니, 자신도 ‘지젤’이 하고 싶었다며 굉장히 반가워했습니다. 기존 음악을 듣고 안무를 구상하면 원작을 답습할 것 같아서 음악도 새롭게 작업하기로 했어요.
음악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고든(Christopher Gordon)과는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도 함께 작업했죠.
영화음악은 제작자가 작곡가에게 요청하는 부분이 많아요. 저는 크리스토퍼 고든이 자유롭게 작업하길 원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주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죠. 많은 작곡가와 함께 작업을 해봤지만, 스토리에 딱 맞는 음악이 나오기가 힘듭니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멋진 음악을 뽑아내기 힘드니까요. 크리스토퍼 고든의 음악은 스토리와 잘 어울려요. 저를 든든하게 서포트하면서 자신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음악가입니다.
함께하는 무대 디자이너 제래드 매니언(Gerad Manion), 의상 디자이너 제니퍼 어윈(Jennifer Irwin), 조명 디자이너 데이미언 쿠퍼(Damien Cooper)와 오랫동안 함께했다고 들었습니다.
창작 작품 하나를 무대에 올리려면 무용수, 디자이너, 작곡가 등 많은 협업이 필요해요. 예술 중에서도 발레가 협업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신뢰가 강하고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며, 한국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길 원합니다. 누구를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죠. 협업은 춤이 가진 아름다움 중 하나입니다.
원작 ‘지젤’은 모든 배역과 춤의 비중이 발레리나의 기교와 표현에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남성 무용수들의 위치가 축소됐다는 평이 있죠. 신작 ‘지젤’에서는 남성 무용수의 비중을 어떻게 두었나요.
원작 ‘지젤’은 1막이 끝나면 남성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은 이제 집에 가도 된다며 농담하곤 합니다.(웃음) 이번 신작은 남성 무용수의 춤 비중이 훨씬 늘었고, 2막에서도 남성 무용수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지젤’의 조안무가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재닛 버넌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 발레 스쿨에서 처음 만났고, 시드니 댄스 컴퍼니에서 함께 안무를 했습니다. 싸우고 화내는 ‘다이내믹’한 관계였죠.(웃음) 창작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닛 버넌의 눈은 굉장히 섬세해요. 제가 다음 장면을 보는 편이라면, 재닛 버넌은 지나간 장면에서 무엇이 빠졌나 확인하죠. 선을 그리는 작업은 제가 하고, 재닛 버넌이 색을 채웁니다. 안무는 소설 쓰는 것과 똑같은 작업이에요. 계속 수정과 변화의 작업을 거치죠. 우리는 30년이 넘도록 약혼 관계였는데, 어느 순간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했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긴 약혼 기간이었을 거예요.(웃음)
시드니 댄스 컴퍼니와 함께한 30여 년의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 삶의 가장 중요한 날들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매일이 모험이자 실험이었어요. 31년 동안 매해 세 개의 전막을 올렸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10주 동안 공연한 적도 있습니다. 시드니 댄스 컴퍼니에서 작업한 안무는 90%가 장막이었고, 10%는 단막이었습니다. 춤은 클래식 발레와 모던 댄스, 컨템퍼러리 댄스가 상호 간에 영향을 주며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시드니 댄스 컴퍼니의 많은 무용수들은 클래식 발레와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필요한 테크닉을 갖췄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 실험적인 무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안무작은 무엇입니까.
1978년 시드니 로열 극장에서 초연한 ‘Poppy’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시인이자 소설가, 디자이너, 극작가, 영화감독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예술가 장 콕토(Jean Cocteau)와 협업한 작품이죠. 첫 번째 컨템퍼러리 장막 작품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컨템퍼러리 댄스가 보통 20~30분 동안 짧게 진행됐기에 이 작품은 획기적이었고,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뉴욕에서 공연했을 때도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어요. 이 작품이 시드니 댄스 컴퍼니에 유명세를 안겨줬죠.
오페라 감독, 영화 안무 등 다른 분야에서도 활동 중입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여유가 생기면 다른 분야로 채우고 싶어요. 특히 오페라에 흥미가 있는데, 오페라를 할 때 성악가들에게 더 많은 움직임을 요청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와 함께한 ‘투란도트’는 거의 발레 작품 같아요. 분야와 상관없이 관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 작품을 능동적으로 보는 자세입니다. 극장을 찾을 때도 마음이 이끌어서 갔으면 해요. 어떠한 작품을 볼 때, 작품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네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클래식 발레 중에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해보고 싶고, 뮤지컬과 오페라 작업도 힘닿는 데까지 하려고요. ‘마오의 라스트 댄서’가 뮤지컬로 만들어지는데, 제가 감독할 예정입니다. 전체적 그림은 안 나왔지만, 제작팀과 열심히 작업 중이에요.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무용수들의 삶입니다. 무용수로 산다는 것은 길지 않아서 매 순간 자신의 재능을 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무용수보다는 안무가라는 길을 택해 더 많은 재능을 꺼냈습니다. 제 직업은 무용수들에게 내재된 다른 정체성을 꺼내는 것입니다.
사진 심규태
유니버설발레단 그램 머피 ‘지젤’
6월 13~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황혜민·강미선·김나은(지젤 역)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이동탁·강민우(알브레히트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