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그를 피아노 앞에 가두지 말라.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휘자로서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빚어낼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진수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신문에서 제일 뜸하게 읽는 분야는 역시 비즈니스란이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읽어도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다고 해야 할까. 그나마 재미있게 읽히는 기사는 성공한 기업의 비결 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만약 문을 연 지 25년 된 회사가 그간 한 번의 부침도 없이 계속 세간의 좋은 평가와 인기를 유지하며 승승장구한다면, 그 기업은 신문 경제란의 톱기사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구소련 시대가 저물어가던 1990년, 탁월한 천재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뇨프(Mikhail Pletnev)가 만든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이하 RNO)의 성공 스토리는 오케스트라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듣듯 흥미로운 내용일 수밖에 없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올스타 멤버들이 플레트뇨프의 이름과 고르바초프 정권의 후원 아래 모였고, 독주자들로 뛰어난 기량을 갖춘 음악가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사운드는 그들이 연주하는 순간부터 전 세계 애호가를 사로잡았다. 내한 공연 때마다 90% 이상 객석 점유율을 보이며, 흥행 면에서도 늘 보증수표인 플레트뇨프와 RNO가 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진하고 강렬했던 첫 내한 공연
이미 지면에 여러 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이들의 공연 때마다 필자는 유학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창단한 이후 세계 음악계 뉴스의 핵으로 다뤄지던 RNO의 첫 번째 내한 공연 때 공식 통역으로 일했던 추억 때문이다. 음악가로서 생활 안팎으로 모두 독특했던 플레트뇨프와의 만남은 잊을 수가 없다. 공항에서 주최 측이 미리 준비한 환영 꽃다발을 건네자 그는 내게 자신과 동행한 어머니를 눈으로 살짝 가리키며 “마마”(엄마)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자신에게 온 꽃을 어머니에게 드리는 효자의 모습까지 갖춘 플레트네프의 일상은 그 천재성만큼이나 변화무쌍했다. 까다롭고 예민한 피아니스트이자 카리스마를 절제하는 영리한 지휘자,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촌철살인의 유머를 내뿜는 달변가이자 마마보이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플레트뇨프의 통역이었지만, 피아니스트였던 내가 오케스트라의 일을 구석구석 살펴볼 기회를 가진 것만으로도 당시의 일정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리허설 환경을 만들기 위해 무대감독과 오케스트라 매니저 사이의 기싸움이 들어간 토론을 옮겨주기도 했고, 한밤중에 급성 비염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단원과 함께 병원 응급실에 가야 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일보다 그들의 인상적인 연주가 더 생생하다. 특히 목관악기 주자들이 부분 연습까지 해가며 마지막 순간까지 프로의 모습을 보여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은 듣는 이의 등골을 밑바닥부터 짜릿하게 만들 만큼 강렬하고 날카로운 음향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연주의 가운데는 정중동의 모습으로 조용히 지휘봉을 움직이며, 음악적 역량 하나만으로 개성 넘치는 단원들을 하나로 화합하는 천재형 지휘자 플레트뇨프가 존재했다. 이후 RNO의 새로운 소식과 신보는 늘 내게 반갑고 신선한 활력소이자 어딘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내용으로 다가오며, 그날의 공연을 지켜본 청중에게도 지금껏 그래왔을 것이라 확신한다.
러시아 피아노 음악 팬들은 21세의 나이에 범접할 수 없는 깔끔한 피아니즘을 뽐내며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접수한 플레트뇨프를 가리켜 비범하지만 냉정하고 차가운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분신이랄 수 있는 RNO의 사운드 역시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덧입히려고도 했다. 어쩌면 오케스트라의 활동 초기 모습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창단한 지 불과 1년 만에 발표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녹음은 오케스트라의 기능적 완벽함을 뽐냈다. 물론 현재까지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과 지휘자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플레트뇨프의 탁월한 직관력과 카리스마가 RNO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75장이 넘는 음반을 발표하며 어떤 작품이든 평균 이상의 긍정적 평가를 팬들과 평단 양쪽에서 받고 있는 이들의 놀라운 성과를 한 사람의 재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평소 플레트뇨프는 푸르트벵글러의 상상력과 독특한 음향적 철학에서 나오는 세계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2007년 발표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음반은 이런 의견을 오히려 한 단계 뛰어넘은 결과물이었다고 하겠다. 교묘한 템포 설정과 독자적 음상, 유희성과 낙천성, 풍자성 등을 고루 갖춘 해석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2000년대 발표한 차이콥스키 관현악 작품은 한층 무게가 붙었다. 슬라브 음악 특유의 근육질적 텍스트가 정돈된 음향으로 다듬어져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펜타톤 레이블로 옮긴 후 오케스트라의 활동은 다양한 지휘자들의 면면과 함께 흥미롭게 변화하고 있다. 켄트 나가노·파보 예르비·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등의 이름과 함께 RNO의 사운드는 새로운 힘을 붙여가고 있다. 펜타톤의 고급스러운 음향이 러시아 오케스트라에 글로벌한 감각을 키워준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과거에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이젠 절대 실수 안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분야가 음악이죠. 좋은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한 비밀이나 비결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나 자신의 음악적 소신을 믿고 조심스레, 조금씩 전진할 뿐이죠.” 예전의 인터뷰에서 플레트뇨프가 언급한 내용이다.
백혜선이 협연하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늘 다루는 텍스트와 비슷비슷한 해석만 존재하는 듯 보이는 클래식 음악에도 분명 유행이 있으며,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 유행은 돌고 돈다. 이번 공연에서 메인 프로그램으로 준비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차이콥스키의 작품만큼이나 플레트뇨프와 RNO가 깊은 애정을 갖고 항상 어루만져온 작품이라 그 의미가 크다. 작곡가의 타고난 상상력과 환상성, 극한을 오가는 서정성의 매력이 최대치로 담긴 뛰어난 걸작은 도이치 그라모폰과 RNO의 첫 번째 작업 중 하나였기에 그들에게 더욱 특별한 레퍼토리라고 하겠다. 다소 투박함과 거친 맛이 느껴지면서, 음상의 양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 노력했던 이전의 연주에 비해 비교적 최근 연주인 2013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트홀에서의 동영상에서는 한층 가볍고 정갈해진 음향과 군더더기 없는 프레이징이 플레트뇨프가 지닌 작곡가에 대한 고유의 감각과 접근 방식의 변화로 느껴져 흥미로웠다. 러시아는 이제 더 이상 ‘동토의 나라’나 ‘베일에 싸인’ 곳이 아니며 막연한 신비로움을 갖고 러시아인의 음악을 감상하던 시기도 지났다. 이제는 그보다 짧지만 화려했던 사반세기 역사를 통해 RNO와 플레트뇨프가 간직하고 다듬어온, 다분히 ‘새로운’ 라흐마니노프를 돌아온 유행처럼 기쁘게 만나야 할 때라고 보여진다.
이번 공연이 진정한 러시아 올드 보이들의 귀환인 이유는, 협연자인 백혜선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열린 1994년, 그녀가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연주했던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의 전율은 지금껏 그 무대를 목격한 이들의 뇌리에 뚜렷이 남아 있다. 그간 화려한 독주 무대와 함께 교육 활동, 실내악 연주를 병행하며 알차고 단단한 내실을 다져온 백혜선의 또 다른 차이콥스키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선후배이자 2007년 공연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의 기막힌 ‘케미’를 보여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오케스트라의 짜릿한 재회가 기대된다.
사진 마스트 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