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그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김재영 바이올린 리사이틀
6월 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함께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무대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은 한국 실내악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노부스 콰르텟의 리더이면서 새로운 감성과 경험을 갖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연주자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2015년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에서 1위를 차지해 음악계를 놀라게 했지만, 실은 2012년 윌리엄 카펠 피아노 콩쿠르 1위와 2013년 센다이 음악 콩쿠르 우승으로 이미 피아노계에서는 주목받고 있는 연주자다. 패기 넘치는 두 청년의 이날 무대는 한국 음악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우선 이날 가장 돋보인 것은 레퍼토리였다. 솔리스트로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연주자의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이었다. 브리튼과 코른골트, 엘가와 거슈윈의 작품을 통해 그는 무대에 잘 올리지 않는 현대 레퍼토리와 영국 전원의 감성이 많이 드러나는 엘가의 선율, 그리고 재즈적 요소를 포함한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소적 테크닉을 고루 들려주었다.
김재영은 작품마다 작곡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색채를 섬세하게 연구, 밀도감 있게 표현해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의 조화로운 하모니는 젊음과 열정이 그대로 드러난 무대였다.
마지막, 거슈윈의 작품을 편곡한 프롤로프에서 보여준 다채로운 색채의 바이올린 음색은 마치 살아 있는 음표를 눈으로 보는 듯했다. 브리튼의 경쾌한 왈츠, 코른골트의 날카롭고 차가운 지성, 엘가의 따뜻하고 소박한 감성, 거슈윈의 자유로운 열정은 연주가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들이 들려준 청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대 뒤로 사라진 후 공연장 밖으로 나오자 초여름 바람이 시원했다. 계절이 푸르름을 향해 한층 깊어가고 있었다. 국지연

한여름 밤의 겨울 나그네
리처드 용재 오닐 비올라 리사이틀
디토 페스티벌 ‘겨울 나그네’
6월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올해 디토는 슈베르트가 생전에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 연주와 사교의 밤을 즐긴 ‘슈베르티아데’를 타이틀로 내세웠다. 슈베르트 코드를 내세운 이번 페스티벌에서 용재 오닐은 ‘겨울 나그네’ 전곡과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했다. 8년 전 그는 2집 음반 ‘눈물(Lachrymae)’의 기록적인 흥행 이후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겨울 나그네’를 담은 세 번째 음반 ‘겨울 여행(Winter Journey)’을 DG 레이블로 발매했다. 그해에 앙상블 디토가 데뷔했으니 이번 레퍼토리는 용재 오닐에게 분명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용재 오닐은 첫 순서로 슈베르트 가곡 ‘그대는 나의 안식’ ‘마왕’ ‘밤과 꿈’을 선보였다. 용재 오닐답게 편안한 연주였다. 음향학적으로 비올라는 바이올린보다 작고 낮은 소리를 내므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에도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숫자를 줄이며 전체적인 소리 밸런스를 조절한다. 이번 연주에서 비올라보다 피아노 소리가 크게 들린 것은 두 악기의 음량 합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악기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작품이다. 현재는 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 작품으로 편곡한 서정적인 곡이지만, 포지션 이동이 까다로워 난곡으로 통한다. 용재 오닐의 아르페지오네는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프레이징을 넓게 잡아 거시적으로 음악을 그렸고, 보잉과 음정은 정갈했다. 다만 마음을 뭉개는 애절함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 단조로운 해석이었는데,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특유의 깊게 파고드는 음악을 원했던 청중이라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2부에 이어진 ‘겨울 나그네’도 차분한 진행이었다. 고요한 어법을 구사해 기교를 과시하지 않는 초연한 음악을 보여줬다. 비올라를 든 나그네의 기나긴 여정이 끝났을 때 봇물 터지듯 청중의 환호가 쏟아졌다. 앙코르 요청에 용재 오닐은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로 답례했다. 커다란 화면에는 지난 4월 초 케냐 북부 투르카나 지역을 체험한 용재 오닐이 물 부족 문제를 호소하는 영상이 나왔다. 그는 비올라가 품고 있는 따스한 음색을 본인의 인간미에 연결시켰고, 나아가 사회 전체로 확장하려는 의식을 보였다.
디토는 대중의 입맛과 그들의 색깔에 맞춰 클래식 음악을 흥행시켰다. 이것은 용재 오닐과 그를 보좌한 크레디아의 기획과 노력의 결말이다. 용재 오닐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길 응원한다. 음악적 내실을 단단히 해서 디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개인적으로는 음악적 역량을 넓혀 아이돌이 아닌 아티스트로서 변화를 도모하길 바란다. 음악가의 음악성은 무대 위에서 증명된다.
2025년 초여름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열아홉 번째 시즌을 맞이한 디토 페스티벌을 보러 콘서트홀을 찾은 관객에게 “용재의 버르토크가 끝내주더라!” 하는 말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8년 전 ‘겨울 나그네’로 대중의 심금을 울린 용재 오닐은 어느덧 초여름을 상징하는 나그네가 됐다.
6월, 바야흐로 용재의 계절이다. 장혜선

 

욕망의 그림자
무용극 ‘클럽 살로메’
5월 22~25일
프로젝트박스 시야

살로메는 타락성의 희생자일까, 히스테릭한 광기를 지닌 악마일까. 그녀의 집착은 순결한 사랑에 대한 탐닉일까, 채워지지 않는 음탕한 색욕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여인 살로메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먼발치에서 최후까지 지켜보던 인물이다. 탐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 여인을 육욕에 불타는 관능의 화신으로 그려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이복형제와 결혼한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살로메는 세례요한을 갖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은 쟁반에 담긴 요한의 잘린 목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무용극 ‘클럽 살로메’ 공연이 열리던 5월의 어느 날, 공연장에 도착하니 로비에는 관객을 위한 칵테일이 준비돼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형광 빛의 초현실적 모습을 한 비보이들이 제각기 춤을 추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100명 남짓 수용할 만한 크기의 극장은 어두웠고, 무대 양 끝에 벤치형 좌석을 마련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모호했다. 마치 춤을 추기 위해 클럽에 놀러온 느낌이었다.
무대 중앙 천장에는 철창으로 된 구조물이 굵은 쇠사슬에 의지해 매달렸고, 그 안에는 요한(지현준)이 아슬아슬하게 갇혀 있었다. 살로메(최수진)는 요한을 향해, 그녀의 의붓아버지 헤롯(이동탁)은 살로메를 향해 욕망의 춤을 췄다. 비보이들은 각 인물의 또 다른 자아가 되어 그림자처럼 쫓으며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했다. 무대 앞쪽에서 ‘DJ’가 되어 전자음악과 피아노·기타를 연주하던 정재일과 그 외 배우들은 관객이 함께 춤추기를 권유하며 흥을 돋웠다.
최수진이 연기한 살로메는 실로 아름다웠다. 절제된 몸짓으로 찬란한 슬픔을 드러냈다. 특히 검은 천을 두른 그녀가 요한의 목에 안겨 춤추는 모습은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녀의 몸짓에 설득당할 때쯤 요한이 머물던 철창이 무겁게 흔들려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에 붙은 거울에 무대 전체가 비쳤다. 또 다른 살로메가 그곳에 있었다. 빠른 비트에 마냥 몸을 흔들던 몇몇 관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를 느꼈으리라. 김호경

 

귓가에 맴도는 그 노래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
6월 6~21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지난해 봄 공연계를 상기하는 계절을 보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장르와 지역을 불문하고 극장가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일찌감치 매진된 A공연에 하루 전날 취소표가 폭탄처럼 떨어지고, 2000여 석 규모의 객석을 잡은 B공연 당일 관객은 1층 객석, 1~2개 블록에 다 모아도 충분할 정도였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에 늘 등장하던 기침 소리는 자체 ‘뮤트’됐다. 몇몇 예술가는 “작년 이맘때도 이랬는데, 올해도 마찬가지다”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몇몇 공연과 행사는 취소되거나 일부 내한 공연은 미뤄졌다. 그 범위나 규모가 세월호 참사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실행 주체나 관객 모두 누굴 탓할 수 없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인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빈자리를 찾기 힘든 공연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으로 2005년 초연 이래 국내외 관객과 만나온 작품의 10주년 공연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2014년 내한 공연을 가진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의 ‘한여름 밤의 꿈’을 떠올렸다(이들에게 세계적인 유명세를 안겨준 작품이 영국 국립극장 ‘워 호스’다).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와 극단 뛰다의 각 작품은 ‘인형(퍼펫)’과 ‘셰익스피어’라는 키워드는 언뜻 비슷하지만, 연극과 음악극이라는 형식과 작품의 주제를 어떤 문화적 감각을 기반으로 풀어냈느냐는 점에서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희곡 속 주연 캐릭터’가 ‘인형’에게 ‘생명’을, 일상 속 ‘사물’에 혼을 불어넣어 ‘사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의 ‘한여름 밤의 꿈’이다. 반면, ‘광대’가 ‘인형’에게 ‘생명’을, ‘사물’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망자를 위로하는’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은 소재나 방법 면에서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비극이다.
기본적으로 인형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성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요구하고, 필요로 한다. 그 마술에 얼마만큼 자연스레 푹 빠져들 것인가는 실행 주체와 관객 모두에게 달려 있다. 지극한 상상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공연에서 무엇보다 ‘존재’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는 ‘햄릿’은 관객에게도 쉽지 않은 숙제 같은 작품이다. 때문에 햄릿의 넋을 위로하며 천도를 비는 진혼굿의 구조를 바탕에 두고 그 주체에 일인 다역의 광대를 세운 것, 노래하듯이, 노래로써 위로한다는 설정은 ‘창의적’이면서 ‘한국적’이다. 여기에 원작의 주요 지점을 영리하게 발췌해 그들만의 난장으로 채색한 무대는 ‘지속 가능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또 이를 위해, 즉 연극이 아닌 음악극을 관람한 관객 입장에서 좀 더 욕심내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극에 등장하는 음악 대부분은 화성보다 단선율의 멜로디가 주를 이룬다. 라이브 연주에 귓가를 맴도는 노랫말도 있다. 이 모든 게 작품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지나 몇몇의 의도된, 의도되지 않은 노래 발성은 오히려 극적 긴장감과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작품 초반 ‘노래’를 두고 광대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음정보다 호흡이 더 중요해.”
“정성을 다해서 가사 틀리지 말고. 음정은 좀 틀려도 돼.”
메시지의 중요성 면에서 동감한다. 그리고 네 명의 광대는 그들의 말대로 해냈다. 하지만 그 (덜 중요한) 음정 때문에 (더 중요한) 가사가 가려진다면? ‘귓맛의 차이’거나 ‘그날의 컨디션’이라 치부하기엔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더구나 해외 관객에게 앞으로의 ‘지속’ ‘가능성’을 획득할 의향이 있다면, 더더욱 배우-음악 간 조율과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연주자뿐 아니라 우리 프로덕션이 해외 페스티벌과 마켓에서 계속 뛴다는 소식을 이들이 들려줬으면 좋겠다.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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