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티스트 시리즈 장유진 바이올린 리사이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금호아티스트 시리즈 장유진 바이올린 리사이틀
5월 28일 금호아트홀

청순하고도 매서운 활 

잠깐의 암전 후, 핀 조명이 무대에 떨어졌다(금호아트홀에서 핀 조명을 쓴 무대를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그 안에서 장유진의 활이 움직였다. 웅크리고 있던 어린 짐승이 털을 곤두세운 늑대가 되어 관객에게 돌진하는 순간이었다. 알프레트 슈니트케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아 파가니니’. 허공에 던진 밤 한 톨을 100개로 조각내겠다는 검객의 활 놀림 같았을까. 활은 여러 각도로 허공을 갈랐고, 현을 부르르 떨게 했다. 청순한 이미지의 흰 드레스는 광기 어린 여인의 속옷 같았다. 섬뜩했다. 끝나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간 보지 못한 장유진과 독대하는 순간이었다. 장유진은 2008년 ‘객석’의 유망주로 선정됐고, 개인적으로 독주보다는 칼라치 현악 4중주단(바이올린 권혁주·장유진, 비올라 이한나, 첼로 심준호)을 통해 그녀와 만났다. 앳돼 보이는 마스크와 달리 제2바이올린의 장유진은 누이처럼, 이모처럼 권혁주를 든든하고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2부에서는 180도 달랐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소품 중 세 곡을 들려준 그녀는 앞서 보여준 모습을 싹 지우고 사랑이 가득한 연주를 선보였다. 제1곡 ‘추억’이 한없이 안아주고 싶은 연주라면, 제5곡 ‘춤의 목가’와 제6곡 ‘자장가’는 한없이 안기고 싶은 연주였다.
이번 리사이틀의 1부에서는 요한 파울 베스트호프 무반주 모음곡 6번, 슈만 소나타 1번, 슈니트케 ‘아 파가니니’를, 2부에서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소품 중 세 곡과 존 코릴리아노의 소나타를 선보였다.
프로그램의 해설을 보지 않고 들은 베스트호프의 곡에서는 바흐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알고 보니 바흐가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작곡하는 데 영감을 받은 곡이란다. 장유진이 훗날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선보일지 모를 바흐의 연주를 기대하게 했다. 오자와 가에의 피아노와 함께한 슈만 소나타 1번에서는 장유진만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신경장애에 빠진 작곡가가 체념과 절망으로 쓴 곡의 중저음을 중후하게 처리하는 그녀는 세상을 다 살아버린 작곡가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의 표정을 연주로 지어 보였다. 2부의 시벨리우스는 다시 듣고 싶은 연주로 가슴에 남았고, 코릴리아노의 소나타는 복잡다단한 기교를 훑으면서도 애틋한 감정이 서식하게 했다. 장유진이 새롭게 얻은 과다니니는 그녀와 잘 어울리는 명기였다. 특히 슈만 곡에서는 중저음을 돋보이게 했다. 장유진이 지닌 섬세한 힘과 잘 맞물렸다. 사륜구동 차량이랄까. 그녀는 능숙하게 몰았다.
작곡의 역사처럼 연주와 레퍼토리 구성에도 유행이 있는 듯하다. 199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한 작곡가나 사조에 집중하는 전곡 연주가 유행했다. 반면, 요새는 다양성이 유행이다. 특히 20~30대 연주자들은 여러 시대를 횡단하는 레퍼토리는 물론, 유학을 통해 습득한 ‘신상’ 레퍼토리까지 선보인다. 대비를 통해 숨은 면모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반전’의 연출도 적극적으로 구사한다. 이번 무대도 그랬다. 슈니트케와 시벨리우스에서 장유진이 가진 반전 매력을 볼 수 있었다면, 무반주(베스트호프·슈니트케)와 앙상블(슈만·시벨리우스·코릴리아노)의 호흡을 가늠할 수 있었고, 슈만과 코릴리아노로 뜨거운 감정과 차가운 기교를 느낄 수 있었다.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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