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현장 취재

경연장을 넘어 세계인의 축제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8월 1일 12:00 오전

발레리 게르기예프 영입 이후 새롭게 변화한 콩쿠르 모습과 한국인 경연자들

제1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6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보름에 걸쳐 열렸다. 지난 대회부터 피아노 부문은 계속 모스크바에서 개최하되 바이올린·첼로·성악 세 부문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돌아가며 진행하여 각 도시마다 두 개 부문을 진행한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도시에서 콩쿠르의 과정을 모두 볼 수는 없게 됐지만, 아르떼TV가 유선과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방영하기 때문에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콩쿠르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증명하듯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섯 개 홀의 무대 위와 객석, 천장에는 대형 카메라와 지미집 등 최첨단 방송장비가 총출동했다. 쉬는 시간마다 전 세계 방송사는 연주회를 촬영하거나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하느라 분주했다.


▲ 마린스키 2에서 열린 제1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갈라 콘서트

뜨거운 결선장의 열기

6월 28일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그레이트 홀에서 피아노 결선이 치러졌고, 29일에는 차이콥스키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 결선 무대가 있었다.

두 콘서트홀 앞이 모두 공사 중이어서 입구가 매우 비좁았지만, 모스크바 시민들은 차례차례 입장하여 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좌석이 지정돼 있지 않던 그레이트 홀에서는, 사람들이 계단과 복도까지 앉거나 서서 연주자들의 음악을 감상했다.

결선에서는 하루에 두 명씩 무대에 올랐다. 그레이트홀에서는 알렉세이 보고라드/러시아 국립교향악단(스벨틀라노프 오케스트라)이, 차이콥스키콘서트홀에서는 유리 시모노프/모스크바 필하모닉이 연주를 맡았다. USSR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전신인 러시아 국립교향악단의 막강한 화력과 뜨거운 열기는, 참가자인 조지 리와 세르게이 레드킨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더욱 치열하게 연주하도록 밀어붙였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오케스트라 음향에 두 피아니스트는 자신만의 개성과 전투력을 한껏 발산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연주를 선사했다. 그레이트홀의 탁월한 어쿠스틱까지 더해져 음악회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다. 연주회가 끝난 뒤 음악원 앞 광장과 건너편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이날의 결과에 대해 서로 격렬하게 토론하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차이콥스키콘서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결선에는 김봄소리와 몰도바의 알렉산드라 코누노바가 자유곡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코누노바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강한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뒤이어 연주한 김봄소리는 정확하고 계산된, 디테일을 강조하는 연주를 선보이며 극단적인 해석의 대비를 보여줬다. 빨간 드레스에 말총머리를 한 김봄소리의 연주가 끝나자 청중은 환호를 하며 그녀의 연주에 갈채를 보냈다.

젊은 연주자를 위해 새롭게 태어난 대회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콘서트홀에서 우승자가 발표됐다. 가장 먼저 피아노 부문의 1위는 러시아의 드미트리 마슬예프가 차지했다. 바이올린부문에서는 2011년과 마찬가지로 1위는 없었고, 2위는 첸유치엔이 차지했다. 클라라 주미 강이 4위를, 김봄소리가 5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정명화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첼로 부문의 1위는 안드레이 이오니타, 5위는 강승민이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성악 파트의 여자 1위는 율리아 마토치키나, 남자 1위는 아리운바타르 간바타르가 차지했다. 유한승은 3위를 차지했다.

대회는 각 장르별로 결선에 오른 모든 연주자들에게 6등(성악은 4등까지)까지 상을 수여하여 결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대표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부여했다. 이는 2011년부터 바뀐 투표 제도의 결과다. 2011년 제14회 콩쿠르부터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고 밴 클라이번 재단의 의장인 리처드 로진스키가 총감독으로 취임하면서부터, 투표 시스템에 밴 클라이번 콩쿠르·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와 동일한 시스템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이 시스템은 1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결선에 오른 연주자들에게 고른 혜택과 공평한 명예를 나눠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르기예프 영입 이후 한국 연주자들이 대거 출전하여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시스템의 변화 덕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2011년에는 피아노 부문에서 손열음과 조성진이 2위와 3위, 성악에서 박종민과 서선영이 1위라는 높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이번 콩쿠르에서도 1·2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3·4·5위에 고르게 한국 음악가들이 포진할 수 있었다. 쇼팽 콩쿠르는 1위를 비롯한 2·3위는 물론, 본선에 탈락한 연주자들까지 고르게 언론과 평론가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스타로 떠오르곤 했다. 이에 비해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1위가 아니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르기예프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며 개방적이고 넓은 등용의 문을 열어놓은 까닭은 콩쿠르의 명성을 더욱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동시에 입상자들의 명예를 공평하게 나눠주어 프로 무대에 원활하게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그 의도는 이번 대회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는 우승자라는 단어보다는 결선에 오른 모두에게 수상자 혹은 입상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듯싶다.


▲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입상자들의 화려한 무대

7월 2일 모스크바 음악원 그레이트홀에서 열린 첫 번째 갈라 콘서트에 이어, 3일에는 마린스키 2에서 두 번째 갈라 콘서트가 열렸다. 화려하고 최상의 무대 설비를 갖춘, 건축 자체만으로 21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예술품으로 평가받는 마린스키 2. 이곳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상자들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 애호가들은 공연 시작 전부터 건물 입구에서 표를 구하고자 줄을 섰고, 암표상을 찾느라 분주했다. 공연장 또한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청중은 우승자의 화려한 모습보다는 젊고 낯선 세계 각국의 입상자들이 펼치는 음악을 들으며 클래식 음악계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연주회를 즐기듯 진지하고 행복해 보였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느지막하게 리허설을 지속한 탓에, 공연 시작 예정 시각인 7시를 훌쩍 넘어 8시가 될 무렵에야 비로소 연주회가 시작됐다. 순전히 러시아 키릴 문자로만 적혀 있는 연주회 프로그램 순서도 바뀌어 불편했지만, 관객은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몰입하며 음악을 감상했다. 모스크바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청중은 새로 만난 연주가들에게는 호기심 어린 박수를, 이미 감상했던 연주자들에게는 반가움의 환호를 보냈다. 관객은 12시까지 이어진 연주회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그들과 함께 호흡했다.

음악회는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차이콥스키 초상화 아래 자리 잡고, 다음으로 진행자가 나와 차례로 연주자 소개를 한 뒤 진행됐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 독특한 스타일의 연주를 선보인 프랑스 피아니스트 루카 드바흐그가 1부 마지막을 장식하며 청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이번 대회를 통해 그가 유럽 매니지먼트와 음반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해볼 만하다. 바이올린 입상자인 코누노바와 클라라 주미 강도 각기 개성적인 연주를 선보이며 청중으로부터 따뜻한 박수를 받았다. 첼로 입상자인 스페인 출신의 파블로 페르란데스가 인상적인 연주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날 갈라 콘서트의 주인공은 몽고 출신 바리톤 아리운바타르 간바타르였다. 미성과 힘, 지구력을 겸비한 음악가로서 앞으로 전 세계 오페라 하우스에서 만날 수 있길 기대해본다.


▲ 바리톤 아리운바타르 간바타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성공 비결

차이콥스키 콩쿠르 조직위원회는 게르기예프를 영입하며 대회 운영과 조직 개편에 새로운 기틀을 닦았다. 게르기예프는 세계적인 음악 경영의 선구자로서 미국·유럽·일본의 자본을 끌어오고 세계 각지 러시아인들에게 기회와 명예를 안겨주며 세련된 러시아 외교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 또한 그가 만들어낸 작품으로, 대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소위 ‘게르기예프 키즈’가 한 명씩 배치해 큰 규모의 행사를 완벽하게 운영했다. 게르기예프의 개인 회사에 소속된 이 전문 운영진이 목숨 걸고 조국의 명예를 위해 일한 결과 오늘날 마린스키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전 세계 유명 음악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게르기예프의 힘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조직 구성원들의 헌신이 있었다. 게르기예프의 남다른 경영 능력 및 위대한 리더십, 더 나아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명예가 이들의 헌신이 있어 가능했다.

국내 음악계에서는 한국 음악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에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결선까지 이토록 많은 한국 연주자가 올라갔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음악인들의 지난 노력에 갈채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국제 음악계의 핵으로 자리 잡은 게르기예프의 애국심과 예술 경영자로서 능력, 음악의 봉사자로서 근면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그의 리더십이다. 21세기 음악 비즈니스는 단순히 개인이나 단체 개별의 힘이 아닌 정부·기업·홀·매니지먼트·음악가·언론·청중이 긴밀하게 호흡하며 팀으로 움직여야 하는 높은 수준의 오케스트라 연주이자 국가 경쟁력이다.


▲ 조직위원장 발레리 게르기예프

이 대회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오케스트라 컨소시엄적 성격을 띤다. 그 중심 역할은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맡고 있다. 후보자들이 경연과 갈라를 거치며 러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동시에, 입상자들은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대회 이후 지속적으로 공연을 하며 세계 음악 시장에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다른 대회와 차별화하는 장점이다.

대회가 순위만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입상자들이 실제로 큰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비로소 국제 음악계에서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아르떼TV의 유선과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연주자들의 얼굴이 전 세계 애호가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참가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입상자들은 대회가 끝난 뒤인 7월 4일부터 7일까지 핀란드 미켈리에서 열리는 제23회 게르기예프 페스티벌에 대거 참가한다. 게르기예프는 자신의 콘서트와 오페라 무대에 입상자들을 번갈아가며 출연시켜 자신의 프로덕션을 빛내는 것은 물론, 입상자들이 여러 매니지먼트 관계자에게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음악 경연대회를 가치 있고 세계적인 규모로 키우고자 한다면,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한 음악가를 중심으로 상주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여러 오케스트라가 힘을 합쳐 청중을 위한 격식 있는 콘서트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국내외 미디어의 힘과 여러 기업의 협찬까지 유도하는, 진정한 음악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음악 콩쿠르를 다루며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을 앉히고 투표하여 상만 주는 평가 위주의 콩쿠르 시대는 20세기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콩쿠르는 젊은 음악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돼야 하고, 시민들의 축제가 돼야 하며,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을 만한 흥행성까지 담보해야 한다.

사진 아르떼TV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