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스며드는 우아함
“결국, 최후에 살아남는 음악이 지닐 덕목은 우아함과 품위, 이 두 가지가 될 것이다.” 존경하는 음악 멘토 중 한 분이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 오래전에 들은 말인데, 시간이 지나며 주목하는 단어가 달라짐을 느낀다. 처음에는 바람직한 음악이 갖춰야 할 미덕 두 가지에 주목했다면, 지금은 ‘최후’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시간 개념이 중요하다. 긴 인내와 기다림 끝에 얻는 결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힘겨웠던 만큼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모젠 쿠퍼는 우아함과 품위 외에 기품·세련미·여유로움 등을 골고루 갖춘 피아니스트지만,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이 모든 요소를 태생적 기질 속에 장착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쓰는 표현 중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이란 어구가 있다. 물은 중력에 의해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그 흐름이 빠르든 느리든 시간 진행에 따라 자신이 의도한 곳 구석구석을 스며든다. 쿠퍼의 유려한 사운드가 공연을 감상한 청중에게 스며드는 과정도 이와 비슷한 모양을 띠었다. 화려한 콩쿠르 데뷔를 하지 않는 등 방황의 시기를 거쳐 대기만성 음악가로 일어선 그녀의 연주는 듣는 이와의 공감대를 폭넓게 형성했다. 또한, 시공간의 분리에서 오는 양자 간 빈틈을 유려한 음악적 제스처로 메우는 노련함을 지니고 있었다. 60대 그녀의 늦은 내한이 아쉽기는커녕 신선한 행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세세한 분석·연구와 상관없이 무대에 올라선 피아니스트는 그저 느끼는 대로 연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에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첫 곡인 쇼팽 ‘뱃노래’를 연주하는 쿠퍼의 프레이징은 다소 독특한 각도와 뉘앙스로 나타났다. 나긋나긋하지만 절제된 루바토가 보이지 않는 엄격한 틀을 유지하는 듯했고, 센티멘털 요소 역시 작곡가 특유의 그늘진 품성 대신 낙천적 우아함이 두드러졌다. 그녀는 서정성의 함축미로 가득 찬 이 난곡을 자연스레 부풀려진 클라이맥스와 풍성한 양감이 두드러진 넉넉한 타건으로 균형을 맞추며 풀어나갔는데, 동유럽풍 쇼팽 연주에 익숙해진 청중에게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녔다.
이어진 슈만 ‘유모레스크’에서도 쿠퍼의 노련함은 한 층 더 적극성을 띠었다. 패턴이나 규칙 없이 나뉜 자유로운 다섯 섹션의 완급 조절은 마치 임기응변처럼 유연하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면의 사색 또한 충분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난무하는 템포 변화 사이사이 나타난 아고기크의 교묘함이었다. 일반적인 연주라면 반드시 쉬어야 할 곳을 페달링으로 연결하거나 그 반대의 호흡을 보이는 다양한 변화 요소가 결코 생경하지 않다. 마치 똑같은 수학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기발한 천재의 모습을 보듯 흥미로웠다. 과도하지 않게 비추는 서정성은 우아한 귀부인 감성에 가까워 보였는데, 지적 유희를 즐기는 영국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최근 주목받은 음반들 가운데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D959가 후반을 장식했다. 선율미와 이에 따른 감상적 요소로 가득 찬 대곡에서 쿠퍼의 손가락은 결코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방식을 띠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깊은 성찰을 담은 선문답에 가까웠다. 예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악상 대신 작곡가의 풋풋한 감성 그대로를 담은 다이내믹을 가감 없이 들려주는 쿠퍼의 톤 색채는 거칠고 성근 질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답을 내놓아도 나름의 의미를 지닌 선문답의 흥미로운 대화처럼 청중에게 많은 부분을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열린 결말을 제시하는 그녀의 해석은 한없이 자유롭고 우주적 스케일을 암시하듯 거대함으로 느껴졌다. 슈베르트의 충동 어린 영감과 솟아나는 감성은 우아한 영국 여인의 손길을 만나 멋스럽지만 튀지 않는 세련미를 띠게 된 것이다. 얼마 전 공개된 그녀의 인터뷰 중 한 부분이다. “젊은 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면의 혼돈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수많은 자아가 서로 싸우던 시절은 지났다.” 적어도 그날의 슈베르트는 필자에게 넓고 커다란 날개를 단, 한없이 홀가분한 존재로 다가왔다.
사진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