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러시아 전통에 가미한 특별한 마법
무더운 여름의 열기를 한 방에 날려버릴 만한 시원한 연주회였다.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으로 시작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으로 이어진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이하 RNO)의 이번 내한 공연은 러시아 악단에 의한 러시아적 연주였음에도 전통에만 집착하지 않았기에 더욱 참신했다. 이는 지휘봉을 잡은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음악적 통찰력과 탁월한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어떤 곡이든 새롭게 들리게 하는 플레트뇨프의 마법은 이번 공연에서도 어김없이 통했다. 콘서트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 역시 그가 지휘하니 색다르게 들렸다. 대개의 지휘자는 빠른 템포에 흥분을 자아내는 리듬 처리로 역동적인 특성을 강조하는데, 모티프 하나하나의 느낌마저 놓치지 않는 플레트뇨프의 지휘 덕에 그리 빠르게 들리지 않았다. 이 곡에서 RNO의 앙상블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플레트뇨프의 지휘봉에 맞춰 첼로 주자들이 연주하는 루슬란의 테마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 있고 충실했다. 또한 서곡의 말미에 등장하는 반음계에서는 강력한 금관악기의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청중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킨 곡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협연자로 나선 백혜선은 1악장 초반에 다소 느린 템포로 여유 있게 출발하며 한 음 한 음 가슴속에 각인시키는 듯한 강력한 터치로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초반에는 다소 힘이 달리는 듯했으나 갈수록 힘을 더한 백혜선의 연주는 마지막 3악장에서 정점을 이루며 콘서트홀 전체를 압도하는 에너지를 발산했다. 3악장에서 슬라브 춤곡풍의 론도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그 에너지가 점차 상승했다. 마지막 종결부에선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청중의 마음이 공명을 일으킨 듯, 연주가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환호와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이야말로 백혜선 특유의 터치와 표현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지나치게 풍부한 음향과 감정 과잉이 특징이다. 당대에는 ‘잼과 꿀의 슬픈 향연’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플레트뇨프와 RNO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런 평은 떠오르지 않았다. 작품 특유의 풍성한 음향을 살리면서도 적재적소에 드라마틱한 반전을 시도하는 플레트뇨프의 지휘 덕이었다. 1악장 초반, 느린 서주에서부터 잘 다듬어진 현악기군의 음색 덕에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한결 정화된 느낌으로 다가왔다. 빠른 2악장에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현악과 관악의 조화가 특유의 추진력과 박진감을 전했다. 2악장의 메노 모소 부분에서 차례로 선율을 모방해가며 멋진 폴리포니를 만들어낸 현악기군의 긴장감 넘치는 합주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감상적인 선율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는 3악장에서, 훌륭한 솔로를 들려준 클라리넷 수석의 활약도 돋보였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러시아 악단 특유의 개성은 잃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다채로운 음색을 지닌 RNO의 장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 마스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