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9월 1일 12:00 오전

1. 침묵 속에서 피어난 진심

김계희 바이올린 리사이틀
7월 23일
금호아트홀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 선율에서 흐르는 알 수 없는 진심의 실체는 기교적으로 완벽하다거나 몸에 밴 관록과는 다른 것이다. 연주자가 지금 이 순간, 음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 긴장된 눈빛과 깊은 마음에서 나온 음악은 그 연주자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게 만든다.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의 연주가 그러했다.

1993년생 젊은 연주자 김계희는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을 사사하고 있다.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 그네신 주니어 콩쿠르 1위와 함께 특별상을 받았고, 지난해 열린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박성용영재특별상을 수상하며 이번 금호아트홀 리사이틀 기회를 부상으로 얻었다.

첫 곡으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선보였다. 피아노와 옥타브로 나오는 도입부의 팡파르부터 시원시원했다. 섬광이 번쩍하는 느낌. 작은 체구가 무색할 만큼 보잉을 힘차게 몰아치는데,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넉넉히 잡은 프레이징을 단정히 소화했고, 지판을 누르는 운지는 정갈하며 포지션 이동 역시 깔끔했다.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샤콘이 이어졌는데 첫 더블스톱부터 음량이 거대했다. 소리의 층은 뒤로 갈수록 점점 두터워졌고, 계획된 틀 안에서 양손이 움직였다.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풍부한 질감이 피어났다. 그녀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리를 듣다가 문득 협주곡은 어떻게 연주할까 궁금해졌다. 소리를 뽑아내는 힘이 좋아서 백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도 한 번에 제압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2부 첫 순서로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했다. 선율을 우아하고 애절하게 연결하는 모습에서는 1부와 다른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밤공기같이 애잔하던 2악장을 지나 3악장에서는 활을 가볍게 튀기며 기교를 과시했고, 감각적인 4악장으로 곡을 마무리했다.

이자이 ‘생상스 왈츠 형식의 연습곡에 의한 카프리스’ Op.52/6이 이어졌다. 화려한 기교 속에서도 서정성을 뽐내며 폭넓은 음악성을 과시한 하이라이트 무대였다.

두 번째로 선보인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를 시작하기 전, 김계희는 기도하는 듯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름다운 것은 침묵 속에서 느껴진다는 말이 있다. 연주자의 침묵을 바라보며 덩달아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전달된 김계희의 진심. 오래오래 관찰하고 싶은 바이올리니스트다. 장혜선

2. 아쉬움 속에 묻힌 기대

김범준 첼로 리사이틀
8월 6일
금호아트홀

올여름 더위가 절정에 달한 지난 8월 6일. 첼리스트 김범준의 리사이틀을 보기 위해 금호아트홀을 찾았다. 이번 공연은 세 차례의 금호 악기 시리즈 중 두 번째 무대. 아직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연주자이지만,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화려한 성적을 거둔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김봄소리와 함께 시리즈의 연주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영상을 통해 접했던 그의 드뷔시 첼로 소나타는 풍부한 서정성과 깊이 있는 해석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이 젊은 연주자의 실연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낭만성이 돋보이는 두 작품(R. 슈트라우스의 첼로 소나타 F장조,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과 보다 음악적 테크닉이 부각되는 현대 작품 두 곡(한스 보터문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제롬 뒤크로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앙코르’)이 연주됐다. 음악적 테크닉과 감수성을 이번 무대에서 모두 보여주려는 듯 프로그램 선곡이 야심차게 느껴졌다.

첫 곡인 R. 슈트라우스의 소나타 도입부에서는 다소 경직돼 보였으나 점차 곡에 몰입하면서 유연해졌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2악장. 곡의 시작과 함께 구슬프게 이어지는 D음이 다소 산만하던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묵직한 감성을 담은 연주는 남은 공연을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이어진 한스 보터문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보였다. 특히 다섯 번째 변주의 하모닉스는 제대로 된 울림이 나지 않았고, 계속된 실수로 인해 연주자는 동요하는 듯 보였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김범준은 겉옷을 벗고 셔츠의 팔을 걷어붙인 결의에 찬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전반적으로 애달픈 감성이 기조를 이루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딱 어울리는 맞춤옷을 걸친 듯 한결 편안해 보였다. 1부에서의 실수로 인한 동요가 2부에서는 쉬이 드러나지 않았다. 안정적인 연주로 흔들리지 않게 그를 붙잡아준 피아니스트 홍소유의 반주도 인상 깊었다. 마지막 곡인 제롬 뒤크로의 작품과 앙코르로 연주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곡까지 큰 기복 없이 마무리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자, 그의 드뷔시 연주 영상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상에서 보였던 깊은 울림의 서정이 이번 공연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R. 슈트라우스 2악장과 슈베르트 1악장에서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숨어버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곡은 한스 보터문트의 파가니니 변주곡. 고도의 음악적 테크닉이 부각되는 곡보다는, 젊은 나이임에도 풍부한 서정성을 갖춘 연주자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 선곡이 동반됐더라면 하는 생각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임형준

3. 오리지널 콜라의 맛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8월 7~1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뉴 코크(New Coke)를 아시는지. 1985년, 100년 역사를 자랑하던 코카콜라 컴퍼니가 유일한 맞수 기업 펩시코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한 신제품의 이름이다. 이 음료는 당시 400만 달러 이상의 투자비용, 20만 명을 상대로 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 야심차게 세상에 나왔지만 원조 콜라를 사랑하던 소비자들의 항의에 못 이겨 출시 두 달 만에 생산을 중단했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세계 상점의 가판대에는 오리지널 음료인 코크 클래식만 진열돼 있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이 처음으로 대극장에 올랐다. 연극으로 시작해 2010년 뮤지컬로 각색된 이 작품은 소극장(2010), 고궁(2011), 그리고 다시 소극장(2012)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관객들을 만나왔다. 왕세자가 사라져버린 밤, 왕과 중전을 비롯한 인물들이 사건의 전말을 밝히려 우왕좌왕하다 나인 자숙이 왕의 아이를 회임한 일, 내관 구동이 숙직을 서다 자숙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일 등이 드러나자 각자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혀 서로 헐뜯는 이야기다. 사건의 본질은 잊은 채 욕망에 집착하는 이들의 내면과 자숙과 구동의 순수한 사랑이 세트도, 소품도 없는 정사각형 무대에서 등장인물들의 움직임만으로 펼쳐진다. 그동안 ‘왕세자 실종사건’을 사랑한 팬들은 이번 공연 소식을 접하며 등장인물들이 확장된 무대에서 얼마나 ‘느린 달음질’로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했을 것이다. 기자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일단 음향이 지나치게 조악했다. 원래 이 작품의 음악은 화려함이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다. 박수가 터져 나올 만한 독립된 넘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근하게 정서를 끌어올린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밸런스가 전혀 맞지 않았다. 질 낮은 음원 반주에 맞춰 쩌렁쩌렁 노래하는 배우들의 목소리는 듣기 힘겨울 지경이었다. 큰 무대에 부담을 느낀 걸까? 중간 중간 장면과 음악이 추가되었는데, 실소만 자아낼 뿐 전체 흐름에 오히려 방해가 됐다. 연습 부족 탓인지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매끄럽지 못했다. 대극장에 맞지 않은 것은 물론 기존의 장점마저 사라졌다.

뉴 코크는 코카콜라 컴퍼니의 야심작으로 맛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오리지널 버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뉴 왕세자 실종사건은 맛이 좋지도 않았다. 그저 고유의 빛만 퇴색했다. 창작 공연은 시간이 흐르면 발전하고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작품을 진심으로 아끼고 공연을 기다리는 애호가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수년 전, 소극장 공연을 보며 적었던 메모를 들춰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데 전부인 것’ ‘뚝심’ ‘먹먹함’. 오리지널 콜라를 한 잔 들이켜고 나니 답답함이 조금은 사라진다. 김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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