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신비한 소리
바로크 시대 유럽에서 즐겨 연주되던 부드러운 음색의 테오르베. 이 악기를 아시나요?
지난 7월 23일, 1607년에 작곡된 몬테베르디 오페라 ‘오르페오’가 한국에서 초연됐다. 서울시오페라단은 완전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당대의 악보에, 오랜 연구에 근거한 음악적 상상력을 더해 기품 있는 음악을 완성했다. 현대악기와 시대악기들을 한데 모아 바로크 시대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노래를 정제된 연주로 선보였다. 류트니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고종대는 모던악기를 사용하는 현·관악기 주자들 사이에서 테오르베와 바로크 기타를 번갈아 연주하며 바로크 시대의 정서를 극대화했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 후 테오르베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고종대와 만났다. 인터뷰 당일, 그는 테오르베와 르네상스 류트·클래식 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고종대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고, 류트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바로크 기타는 클래식 기타와 함께 학습했다. 류트는 제작 시기와 형태에 따라 중세 류트, 르네상스 류트, 바로크 류트로 나뉘며 기존 류트에서 저음이 확장된 악기로 테오르베와 아치류트가 있다. 고종대는 류트 연주자는, 대부분 테오르베와 아치류트도 함께 다루며,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다 류트를 잡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좋아했어요. 이유는… 글쎄요. 그저 취향인 것 같아요. 깨끗하고 평온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아무리 연주해도 지겹지가 않다는 거예요. 연주회가 끝나도 지치기는커녕 에너지가 넘치죠. 평소 고전·낭만 시대 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폭넓게 감상하는 편인데,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 깊이 빠질수록 이후 시대의 음악도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15년간의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해 한국에 온 고종대는 돌아오기 전 마지막 1년간은 클래식 기타는 거의 연주하지 않고, 류트계 악기에만 집중했다. 입국 직전 6개월 동안은 류트·테오르베·아치류트를 들고 남독일·오스트리아로 투어 공연을 다녔다.
“제 인생의 오랜 시간을 함께한 클래식 기타도 물론 좋지만, 류트계 악기만의 매력이 있어요. 클래식 기타는 혼자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류트·테오르베·아치류트는 앙상블 연주가 대부분이죠. 특히 성악 반주를 할 때면 저로 인해 주인공이 부각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함께 긴장하고 호흡하며 음악을 완성해가는 만족감이 무척 큽니다. 요즘은 영화에서 주연보다 조연 배우들이 더 활약하기도 하잖아요. 비슷한 개념인 것 같아요.”
고종대와 함께 테오르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류트의 진화
아랍과 터키에서 연주되던 초기의 류트는 7세기경 발칸반도에 정착한 유목민들에 의해 유럽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최남단과 최동단에서 북쪽 프랑스와 독일까지 점차 전파되다가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어디에서나 류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초반에는 귀족이라면 류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사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흔히 연주된 만큼 중세 문학 작품이나 미술품에서도 자주 묘사되었다. 중세 류트, 르네상스 류트, 바로크 류트 등 시대가 흐름에 따라 6코스(현)부터 10코스까지 줄의 개수가 늘어나며 점차 개량됐다. 사진은 7코스 르네상스 류트.
클래식 기타
17세기부터 연주된 클래식 기타는 보디·넥·헤드로 구성된 형태와 연주자가 악기를 품에 안은 상태로 줄을 퉁겨 연주한다는 것 등 류트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18세기 이후 건반악기가 발전하며 도태되기 시작한 류트와 달리 끊임없이 개량되며 현대까지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미국 악기를 쓰다 최근 이 악기로 바꿨어요. 한국의 악기 제작자 이용한 씨가 만든 악기인데, 앞 판이 하나가 아닌 두 개인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죠. 두 개의 얇은 나무판 사이에 노멕스라는 합성섬유를 넣어 겹친 형태예요. 음색은 약간 투박하지만 내구성이 강하고 전달력이 뛰어나요. 지난달에 이 악기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는데 리허설 때 객석에 앉아 있던 스태프들이 모두 놀랐어요. 기타 소리가 무척 잘 들린다고요.”
테오르베와 아치류트
1602년에 카치니가 ‘누오보 무지케’를 편찬하며 저음 악기를 필요로 했고, 그로 인해 테오르베와 아치류트가 탄생했다. 테오르베와 아치류트는 둘 다 류트에 비해 크기가 크며 테오르베는 저음의 힘이 강하고, 아치류트는 테오르베보다는 저음이 약하지만 고음까지 넓은 음역을 소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테오르베는 이탈리아식 표현인 ‘키타로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테오르베의 구조
테오르베는 하나의 줄감개집만 있는 류트와 달리 제2줄감개집이 달려 있다. 14코스 중 저음부를 담당하는 8~14코스는 먼 거리에 있는 제2줄감개집으로 조율한다. “저음을 강하고 풍부하게 연주하기 위해 저음부의 현을 길게 만든 것 같아요. 당시 기술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겠죠.” 고종대는 자신의 악기의 6·7코스에는 금속성 포일이 감긴 나일론 소재의 현을, 나머지 코스는 일반 나일론 소재의 현을 사용했다. “어떤 코스에 어떤 현을 사용하느냐는 연주자 마음이에요. 수공품인 테오르베는 악기마다 어울리는 소리가 다 다르죠. 연주자는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최상의 조합을 찾습니다.”
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로제트
울림구멍이 왜 세 개인가요? 하고 물으니 “류트나 테오르베는 ‘로제트’라고 불러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테오르베의 로제트가 세 개인 것은 아니에요. 하나 또는 두 개로 되어 있는 것도 있죠. 로제트는 장식의 기능도 했다고 해요. 바로크 시대의 예술 양식이 화려하고 복잡한 만큼 악기마다 다양한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테오르베는 독주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저음부의 힘이 강해 반주 역할로 중요하게 사용된다. 음역이 낮음에도 밝은 음색을 지닌 것은 테오르베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테오르베가 하프시코드와 함께 반주하는 것을 들으면, 하프시코드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에 묻혀 테오르베는 잘 들리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테오르베 주자가 연주를 멈추면 테오르베의 존재감이 확실히 느껴져요. 테오르베가 하프시코드의 소리를 감싸 풍성한 음색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하프시코드와 류트·테오르베, 그리고 오르간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바로크 시대의 다양한 색채감이 물씬 느껴집니다.”
이탈리아식 vs. 프랑스식
“악보는 오선보가 아닌 태블러처를 씁니다.” 고종대는 이렇게 말하며 두 가지 악보를 꺼내 보였다. “이탈리아식 태블러처와 프랑스식 태블러처 이렇게 두 종류가 있어요. 독일식 태블러처도 있긴 하지만 거의 쓰지 않죠. 이탈리아식은 숫자로, 프랑스식은 알파벳으로 음을 표기합니다. 이탈리아식은 맨 아래의 선이 가장 높은 음, 프랑스식은 맨 위의 선이 가장 높은 음을 가리켜서 가끔은 순간적으로 헷갈리기도 해요.”(웃음)
브랜드 이야기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악기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된 것처럼 테오르베도 마그누스 안데르손·티펜부르커 등 사람 이름을 본뜬 브랜드들이 있어요. 그런데 비싼 악기를 제작하는 유명한 브랜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제작자마다 만드는 악기의 특징이 다를 뿐이에요. 국내 제작자로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신 김영익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보통 전문가용 테오르베의 가격은 약 1000만원입니다. 수백 년 전 제작된 훨씬 비싼 악기들도 있지만, 그런 건 대부분 연주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보관되어 있죠.”
손톱, 길러야 할까? 잘라야 할까?
기타리스트들은 연주할 때 손톱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른손의 손톱을 긴 상태로 유지한다. 그렇다면 류트나 테오르베 연주자는? “류트는 손톱이 아닌 손끝으로 연주합니다. 짧게 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클래식 기타와 류트의 연주 활동을 동시에 하는 건 어렵죠. 반면 테오르베는 손톱이 긴 상태로 연주하기도 해요. 그와 관련된 문헌 자료도 있고요. 물론 손톱의 길이에 따라 음색의 차이는 무척 큽니다.”
고종대의 필수품
분리도 안 되는 큰 덩치의 악기를 단단히 지켜내는 케이스와 그 외 고종대의 소지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케이스 안에는 엽서와 사진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연주했던 작품들의 포스터, 그리고 그 옆에는 제가 다니던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사진이에요.” 나무를 보호하는 오일 제품과 악기 수건, 연주 때 사용하는 핀 마이크, 손톱 관리 도구 등은 연주자에게 필수품이다. “혹시 이거 아세요?”라며 고종대가 보여준 것은 스마트폰 속 유료 애플리케이션 클리어튠(Cleartune). 튜닝 기능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고 섬세하며 고급 기능이 많아 요즘 연주자들 사이에서 ‘핫’하다고.
추천 명곡, 추천 음반
“테오르베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는 몬테베르디 ‘오르페오’를 꼽을 수 있습니다. 1607년에 작곡된 이 작품에 테오르베 편성이 처음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제가 테오르베를 잡고 처음 무대에 선 건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1643)이었는데, 이 작품 또한 훌륭합니다. 테오르베만의 아름다운 음색을 마음껏 감상하고 싶다면 스웨덴 연주자 야코프 린드베리의 ‘키타로네의 이탤리언 비르투오시’(BIS, 2012)를 추천해요. 레퍼토리도 흥미롭고 연주도 뛰어납니다.”
테오르베 연주자 어디 없나요?
고음악과 고악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건 20세기 초반 일이다. 유럽에서 악기 복원을 위해 문헌을 찾고 연주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현재까지 유럽 전역은 물론 영국과 한국, 일본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개발·연주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문 연주자를 찾는 것은 어렵다. “잘츠부르크에서 지낼 때 제가 살던 지역의 테오르베 연주자는 저뿐이었어요. 국경 넘어 독일에 있던 분은 제 선생님이었고요.(웃음) 좀 더 큰 도시인 빈은 좀 나은 편이었는데, 그래도 많은 수는 아니었어요. 테오르베 연주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긴 한데… 1년 전 한국으로 이사한 저에게 최근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연락이 오는 걸 보면, 그곳에는 아직 아무도 없나 봐요!”
사진 이은비(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