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1. 성서와 함께 춤을

안드레아스 브란텔리드 첼로 리사이틀
8월 27·28일
금호아트홀

어두운 밤. CD 플레이어에 음반을 넣고 다른 소음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헤드셋을 쓴다. 방의 전등을 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재생 버튼을 누른다. 미간을 좁히고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음악에 집중한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감상할 때의 습관이다. 작품을 따라다니는 ‘첼로의 구약성서’라는 표현 때문일까. ‘성서’라는 단어가 주는 경건함에 유독 이 작품을 감상할 때만큼은 이런 준비 자세(?)가 버릇처럼 굳었다.

지난 8월 27일 금호아트홀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을 수 있었다. 연주자는 1987년 덴마크 태생 첼리스트 안드레아스 브란텔리드. 이날은 이틀에 걸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 중 첫날로, 모음곡 1~3번을 연주했다. 브란텔리드는 14세 때 로열 덴마크 오케스트라와의 무대로 데뷔한 이후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빈 심포니·BBC 심포니 등과 협연하고, 안드리스 넬손스·유카 페카 사라스테 등의 지휘자와 함께 호흡을 맞춘 주목받는 첼리스트다. 지난 2013년 첫 내한 공연은 피아니스트 김다솔과 함께한 듀오 무대였다. 이번 무대는 한국에서 그의 첫 번째 독주회인 셈이다. 그 자리에 젊은 첼리스트는 과감하게도 ‘성서’를 들고 나왔다.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평소에 감상하던 버릇대로 미간을 좁히려 한 순간, 브란텔리드는 의자에 앉자마자 1번의 프렐류드를 거침없이 시작했다. ‘성서’의 연주를 앞두고 적어도 심호흡 몇 번은 하고 연주를 시작하리라 예상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침없으면서도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그의 연주였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라고나 할까. 그 여유로움에는 탁월한 테크닉이 바탕이 됐다. 쿠랑트와 지그 등 빠른 악장에서 그의 연주는 막힘없이 경쾌하고 힘찼으며, 사라방드는 로스트로포비치를 연상케 하는 서정이 깃든 부드러운 톤으로 우아함이 충만했다.

브란텔리드의 연주를 감상하는 동안에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음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고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 브란텔리드의 연주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첼로를 마치 사랑하는 여인처럼 살며시 안고 춤을 추는 듯한 몸짓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새삼 다시 느꼈다. 알망드·쿠랑트·사라방드·지그 등으로 구성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춤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 브란텔리드는 이 곡에 맞춰 첼로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비록 객석은 반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았지만, 또 하나 개성 넘치는 젊은 연주자를 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임형준

2. 피아노로 쓴 서사시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 피날레 콘서트
8월 29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이 올해 3회째 맞아 8월 22일 오프닝 콘서트를 시작으로 8월 29일 피날레 콘서트를 열었다. 특히 올해는 세계 무대가 더욱 주목하는 국내외 젊은 피아니스트들을 통해 피아노의 미래를 만난 시간이었다. 여정의 마지막 날은 피아니스트 조슈아 한, 선우예권, 손민수가 함께했다. 8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다음 무대를 기약하는 피날레 콘서트. 피아노 선율 속에 흘러나오는 저마다 다른 색채와 개성이 돋보인 무대였다.

첫 곡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피아니스트 조슈아 한이 협연했다. 음악감독 김대진의 지휘로 수원시향의 서주가 시작되고 피아노 주제 선율이 흘러나왔다. 멘델스존 특유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오케스트라 선율 속으로 스며들어 반짝반짝 빛났다. 호주 더 킹스 스쿨에 재학 중인 조슈아 한은 어린 나이에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 갓 탤런트에서 주목받았고, 세계적인 음악 축제인 이과수 음악페스티벌에 초청되면서 주목받았다. 빨간색 셔츠를 입고 등장한 그는 귀여운 외모와 깍듯한 매너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신감 있는 터치와 신선하고 투명한 음색이 노련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어우러져 따뜻한 멘델스존 음악의 멋을 표현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근래 활동이 활발한 선우예권이 협연했다.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하며 역동적인 악장과 서정성이 조화를 이루는 이 곡을 그는 강렬한 터치와 긴박감 넘치는 파워로 청중을 압도했다.

이날 가장 인상적인 연주는 손민수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 협연이었다. 손민수는 마치 슈만이 살아서 연주하는 것 같은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과 상상력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것은 테크닉적으로 화려한 피아노가 부각되는 일반적인 협주와는 달리, 피아노와 관현악의 균형의 미가 특별히 부각된 무대였다.

다양한 음의 대조와 피아노 음색의 변화, 시적인 해석으로 아름다운 초 가을밤을 물들인 시간. 피아노가 한 편의 시처럼 다가왔다. 국지연

3. 정공법의 승리

김선욱·이상 엔더스 듀오 콘서트
8월 29·3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음악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 나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고루한 연주자라고 생각했다. 첫 문장을 이렇게 적고 보니 무척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김선욱은 늘 뛰어난 연주를 선보이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지만, 그에게 새로움이나 젊은이의 패기 같은 것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그의 연주는 다이내믹이 크지 않았고, 언제나 이성적인 듯했다. 작품도 독일 레퍼토리만 쳤다. 마치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는 착한 천재 같다고 할까. 반전 없이 조숙한 그를 보며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요즘 트렌드는 이게 아닌데 말이야’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운데 시원하게 뚫려 있는 큰 길을 걷는 것과, 샛길을 걷는 것. 어떤 게 더 어려울까요? 정도를 걷는 게 더 힘들어요. 너무 빤히 드러나는, 누구나 다 아는 길이기 때문이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는 김선욱은 2009년 김대진/수원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2012~2013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완주했다. 그리고 이번에 이상 엔더스와 이틀 간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을 선보였다.

사실 지난 6월, 김선욱이 지안 왕, 마유코 카미오와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3중주와 베토벤 피아노 3중주를 연주했을 때, 새로운 경지에 안착한 듯한 그의 여유로움을 감지했다. 이번 이상 엔더스와의 듀오 콘서트 역시 호연이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을 시작으로 소나타 2, 1, 5번으로 이어지는 첫날 공연은 마치 선물처럼 느껴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김선욱은 정확하고 날카로운 표현은 물론 따뜻하고 배려 깊은, 자연스럽고 품격 있는 연주를 들려줬다. 지난해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로 과감한 해석을 보여줬던 이상 엔더스도 깊이 있는 소리와 완성도 있는 테크닉을 선보였다. 두 사람은 2번 2악장에서 호기롭게 청중을 매혹했고, 1번에서는 다채롭게 변화를 꾀하며 풍성한 이야기를 전했다.

산 정상을 두 다리로 오른 사람만이 느끼는 쾌감을 김선욱은 지금 즐기고 있을까. 그는 오로지 음악 안에서 자신과 싸웠고 정공법으로 답을 찾고 있다. 긴 시간 동안 착실히 성장한, 그럼에도 여전히 젊은 그가 부럽다. 연주보다 더 치밀하고 성실해야 하는 지휘 무대도 언젠가 훌륭히 선보일 것 같다. 둘째 날 연주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이어지는 박제성의 글을 참조하길. 김호경

4. 천하무적 부녀

미샤 마이스키 첼로 리사이틀
9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1988년 3월 9일 첫 내한 공연 이후 꾸준히 한국을 찾았다. ‘세계 시민’이라 자칭하며 일 년에 절반 이상 세계를 누비며 연주하는 방랑자에게 가족의 의미는 더욱 특별할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해 항상 미안하다며,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그에게 ‘가족의 의미’는 인터뷰 말미마다 예절같이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꿈은 피아노를 배우는 딸, 바이올린을 하는 아들과 함께 작은 콘서트를 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이 특별한 이유는 피아니스트인 큰딸 릴리 마이스키와 함께 내한한 까닭이다.

첫 곡인 바흐 비올라 다 감바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3번 1악장에서 그는 거친 보잉과 매끄럽지 않은 인토네이션의 반복으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템포를 묵묵히 잡는 역할은 릴리의 몫이었다. 2악장에선 안정을 찾고 트레이드마크인 그윽한 시적 감성을, 3악장에선 유연한 선율미를 뽐냈다.

이어진 곡은 쇼스타코비치 첼로 소나타.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한 ‘미샤 마이스키표 쇼스타코비치’가 많은 호평을 받았기에 많은 이가 기대하는 무대였으리라 생각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첼로의 음색을 들으며, 마이스키가 역시 첼로의 여러 소리를 잘 꺼내는 연주자란 생각이 들었다. 소리가 변하는 지점을 날카롭게 집어내며 악기와 교감하는 모습에서 개성이 묻어나왔다. 릴리 역시 탄력 있는 첼로 소리에 매몰되지 않고 차분히 호흡했다.

2부 첫 곡으로 브루흐 ‘콜 니드라이’가 연주됐다. 탄탄한 짜임새로 가슴을 파고드는 서정성이 좋았다. 다만 속도가 몰아칠 때마다 무너지는 음정은 큰 안타까움이다. 파야의 ‘스페인 민요 모음곡’에선 경묘한 움직임과 예리한 감성으로 생동감이 느껴졌다. 차분하게 연주를 이어온 릴리의 힘은 이 곡에서 마침내 솟구쳤다. 인간성이 묻어나오는 음악적 격렬함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다. 부녀의 환상적인 궁합은 피아졸라 ‘르 그랑 탱고’에서 돋보였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팽팽하게 ‘밀당’한 음악은 생기 있는 선율을 빚었다. 청중의 함성이 터졌고, 다섯 번의 앙코르로 뜨거운 밤을 선사했다.

예민하고 투철하던 기교는 사그라졌지만, 일괄적인 자유분방함 속에 정제된 음색은 여전했다. 딸과 함께 무대에 오를 날을 부단히 기다려온 마이스키. 연주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며 작은 ‘꿈’을 이뤄가는 모습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든든해 보였다. 장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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