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장일범이 보고 온 유럽의 화제 공연 스케치
아이러니와 유머로 가득했다!
금년 스위스 페스티벌 순례는 8월 30일 일요일 오후 5시 30분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텐트에서 주빈 메타가 지휘한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취리히에서 그뤼에르를 거쳐 일 년 만에 다시 그슈타트에 들어설 때 멀리 보이던 하얀 페스티벌 텐트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7월 16일 올해의 레지던스 아티스트인 장 이브 티보데의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9월 5일 필립 조르당이 지휘한 빈심포니와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이 즈나이더 공연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의 올해 주제는 ‘아이러니와 음악’.
8월 30일 주빈 메타가 지휘한 이스라엘 필의 공연은 ‘차이콥스키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사실 1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과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이었고 2부에서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 연주됐다. 모두 1890년대에 작곡된 작품들이다. 언제나처럼 미국 TV드라마 배우 출신 부인 낸시 코박이 콘서트를 지켜보는 가운데, 메타와 이스라엘 필은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을 매우 리드미컬하고 색채적으로 연주했고 고백·용서와 사랑으로 이어지는 ‘정화된 밤’의 스토리텔링을 은근한 서정미로 표현해냈다. 2부에 이들이 연주한 ‘비창’은 이전에 듣던 그들의 ‘비창’ 연주를 뛰어넘는 폭발적인 다이내믹과 서정을 동시에 표현한, 상당히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걸음은 부자연스러웠지만, 메타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빈 필·베를린 필·이스라엘 필을 오가며 진정 거장다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루체른 페스티벌
체르마트에서 알프스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후 9월 1일에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는 루체른 페스티벌을 찾았다. 8월 14일부터 9월 13일까지 130여 개의 공연이 펼쳐지는 루체른 페스티벌의 주제는 ‘유머’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과 주제가 겹친다.
8월 14일,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오프닝 공연 때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아니라 은퇴한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이었다. 브렌델은 하이든의 유머러스한 피아노 테마 한 소절을 친 후, ‘유머·센스·넌센스’라는 제목으로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 ‘유머’에 대해 말했다. 그는 “모든 좋은 음악이 유머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유머가 들어간 모든 음악은 좋은 음악이다”라는 어록을 남기며 페스티벌의 시작을 선포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세상을 떠난 작년, 그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위해 준비했던 레퍼토리를 안드리스 넬손스가 지휘했다. 올해는 노장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하이든 교향곡 60번과 말러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과연 2016년에는 새로운 상임지휘자가 결정될까 궁금해하던 차에 첫날 시작과 함께 아바도의 뒤를 이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발표했다. 리카르도 샤이였다. 필자는 아바도와 같은 북부 이탈리아 출신인 그가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바도 세대의 마지막 주자이자 청년 음악가들의 멘토가 될 만한 존경받는 리더,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춘 지휘자이자 부르크너와 말러 해석의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루체른의 선택 역시 같았다. 이제 내년부터 상임지휘자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아바도가 끝내 병환 때문에 완성하지 못한 말러 사이클의 마지막 퍼즐, 말러 교향곡 8번 ‘천인’을 들을 수 있다.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의 유머
9월 1일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이 1930년대에 작곡한 작품 두 곡을 연주했다. 1부에는 벤저민 브리튼이 1937년 작곡한 ‘프랭크 브리지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했는데, 선곡에서 브리튼의 영국식 유머, 그리고 영국 곡에 대한 사이먼 래틀의 사명감이 느껴졌다. 2부의 프로그램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이었다. 1936년에 완성했으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프라우다 지에서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며 충격을 받은 쇼스타코비치가 리허설 때 스스로 연주를 철회했다가, 흐루쇼프 시대인 196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초연한 곡이다. 래틀은 웅장하고 파워풀한 베를린 필의 막강 사운드로 연주해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역시 근·현대 음악을 중시하는 루체른 페스티벌을 보러온 청중의 귀가 열려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9월 2일에는 역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이 유머와 떼어놓을 수 없는 고전주의의 두 작곡가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곡을 연주했다. 4명의 악장 중 한 명인 바이올리니스트 가시모토 다이신과 비올라 수석 아미하이 그로즈가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연주했ㅈ는데, 예리하고 섬세한 가시모토의 바이올린과 개성 있고 웅숭깊은 사운드를 지닌 그로즈의 연주가 맛있는 칵테일처럼 어우러졌다. 하지만 호른 주자의 잦은 실수는 베를린 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깊은 아쉬움을 남겼다.
2부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사이먼 래틀이 하이든의 곡을 모아 11개의 악장으로 재구성한 하이든 파스티치오 ‘상상교향곡’이었다. 마이크 잡는 것을 즐기는 사이먼 래틀은 “하이든은 음악사에서 정말 중요한 작곡가인데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하이든의 곡들을 다양하게 엮어 연주할 터이니 중간에 박수를 치지 말아달라”며 독일어로 적어서 읽었는데 이 장면 역시 유머러스했다. 이 곡은 하이든의 ‘천지창조’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그리고 교향곡 6번 ‘아침’을 비롯한 다양한 교향곡과 ‘사계’의 겨울, 그리고 당연히 기대했던 교향곡 45번 ‘고별’도 들어 있었다. 아홉 번째로 연주한 교향곡 ‘고별’의 4악장이 시작되자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오케스트라가 한 명 두 명 퇴장하는 퍼포먼스가 이어졌고, 청중을 즐겁게 하는 하이든과 래틀의 아이디어가 하모니를 이뤘다.
곡이 끝난 다음 청중이 박수를 크게 치자 래틀은 박수를 치지 말고 귀를 기울이라는 사인을 보냈다. 전자악기로 미리 녹음한 새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마지막인 11번째 악장은 원래 교향곡 90번의 피날레 악장이다. 래틀은 이 론도 악장을 연주가 끝난 척 청중을 속여 두 번이나 박수를 받고서 즐겁게 곡을 마쳤다. 이 공연은 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 메디치 TV, 아르테 TV 등을 통해 생중계 됐다. 레퍼토리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만큼 공연도 전석 매진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지난 6월 말의 발트뷔네 콘서트 이후 다시 유쾌한 래틀과 베를린 필을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유리 테미르카노프/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의 전통
9월 3일에는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이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로 이어지는 러시아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역시 러시아 레퍼토리의 대중적 인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여서 매진을 기록했다. 지휘자부터 단원에 이르기까지 베를린 필에 비해 표정이 상당히 딱딱하다고 할 정도로 진지한 모습이었다.
1부는 첫 곡인 차이콥스키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에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담은 뜨거운 연주를 들려준 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루간스키는 넘치지 않는 이지적인 연주를 들려준 데 반해 첼로 수석의 실수가 매우 아쉬웠다. 2부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장대한 승리의 곡을 원하는 소련 당국에게 매우 짧은 신포니에타 성의 곡을 안긴 쇼스타코비치의 블랙유머가 돋보인 교향곡 9번이었다. ‘쇼스타코비치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쇼스타코비치 해석에 권위를 갖고 있는 테미르카노프/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의 전통을 맛본 명쾌한 연주였다.
테미르카노프는 앙코르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네 마리 백조의 춤을 들려주었는데, 이때 두 번째 앙코르곡과 착각한 팀파니 주자가 갑자기 혼자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연주하며 나오자 잠시 연주가 중단됐다. 이때 테미르카노프의 재미있는 제스처가 청중에게 웃음을 안겨줬는데, 덕분에 실수가 주제인 ‘유머’와 잘 어울린 공연이 되기도 했다.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루체른 KKL홀에서 세 번의 교향악단 공연을 본 후 융프라우에 올랐다가 다시 그슈타트로 향했다.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예후디 메뉴인이 1956년에 첼리스트 모리스 장드롱, 피아니스트 벤저민 브리튼 그리고 그의 파트너 테너 피터 피어스와 함께 공연을 하러 왔다가 분위기에 반해 며칠 더 앙코르 공연을 하고 반년 만에 이주해 살게 된 곳이 바로 이곳 그슈타트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옆 마을 자넨의 중심에서 언덕을 올라가자 아름다운 교회가 나타났다. 예후디 메뉴인이 첫 공연을 했던 자넨 교회다. 이곳이 무려 7주 동안 공연이 계속되는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에서 체임버 규모의 공연과 리사이틀이 가장 많이 열리는 곳이다. 페스티벌 텐트에서는 콘체르탄테 형식의 오페라나 교향악단의 공연, 그리고 금년의 화제였던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의 공연 등의 대형 공연이 열리고 대부분의 실내악 공연들은 주로 이곳 자넨 교회와 츠바이지멘 교회에서 열린다.
디에고 파솔리스/이 바로키스티와 체칠리아 바르톨리
페스티벌이 티켓을 오픈하자마자 제일 먼저 매진된 9월 4일의 체칠리아 바르톨리 공연은 가벼운 흥분 속에 시작되었다. 공연은 요즘 고음악 연주의 대세 중 한 명인 지휘자 디에고 파솔리스가 이끄는 ‘이 바로키스티’와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녹음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앨범의 레퍼토리로 짜였다. 바로크 시대 호화롭던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에서 연주된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 레퍼토리를 레코딩한 이 앨범은 언제나 학구적으로 연구하고 숨은 레퍼토리를 발굴해내는 기획력 있는 바르톨리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먼저 비발디 오페라 ‘파르나체’의 서곡이 연주됐다. 코다 부분의 행진곡 장면에서 바르톨리가 교회 정문을 열고 복도를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특히 필자가 앉은 오케스트라 뒤쪽 자리의 청중을 위해 특별히 따뜻한 인사를 길게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르톨리는 거침없었다. 빠른 곡에서는 예의 천상의 테크닉으로 청중을 빠져들게 했고, 느리고 슬픈 곡에서는 청중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깊은 사색에 잠기게 만들었다. 바르톨리의 전매 특허는 빠른 패시지의 예리한 소화지만 느린 곡에서 들려준 연륜과 깊이는 빼어난 테크니션이기 전에 걸출한 최고 성악 예술가임을 증명했다. 특히 그녀의 등장은 예카테리나 여제처럼 당당했으며, 무대 매너는 청중을 바로크 시대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끌었다. 2부 니콜라 포르포라의 곡들을 노래할 때는 포르포라가 파리넬리의 스승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마치 바로크 시대 카스트라토가 노래하는 듯한 중성적 음색을 들려주었다. 마지막 곡도 포르포라였다. 오페라 ‘아델라이데’ 중 ‘노빌 온다’를 화려하게 노래를 불렀다.
앙코르에서는 바로크 음악을 벗어나 그녀가 초창기부터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레퍼토리인 모차르트를 불렀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속 어린 시종 케루비노의 ‘사랑의 괴로움을 아는가’를 불러 청중의 탄성을 자아내더니 이어 뒷자석 청중을 보고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 중 ‘알렐루야’를 압도적으로 불러 기립박수를 받았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에서 행하던 트럼펫과 카스트라토의 카덴차 대결을 유머러스하게 선보여 청중에게 경탄과 폭소를 안겨주기도 했다.
바르톨리의 퍼포먼스는 중세 교회에 모인 청중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공연이었다. 그녀는 이 프로그램을 역시 파솔리스가 이끄는 이 바로키스티와 함께 딱 일 년 후인 9월 3일, 이곳에서 다시 공연한다.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은 50주년을 맞이할 내년 페스티벌의 주제로 ‘음악 속의 가족’을 선택했다. 메뉴인과 아들 제레미, 지휘자 네메 예르비와 아들 크리스티안,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 등 다양한 가족을 주제로 한 뜻깊은 공연들이 열릴 예정이다.
사진 Menuhin Festival Gstaad · Lucerne Festiv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