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레시어터의 20년, 한국 창작 발레의 꽃을 피우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무용수이자 부부인 김인희·제임스 전이 이끌어온 서울발레시어터.
우리나라 민간 직업 발레단의 2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다


▲ 정운식(지도위원) 조현경(지도위원) 장지현 원보라 김치훈(부지도위원) 김민영 최유림 신선미 김성훈


▲ 김현영 송민근 손구현 유진수 이미리 정민지 강석원 최세림 최완주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당시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던 김인희와 제임스 전은 민간 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SBT)의 창단식을 개최했다. 플로리다 발레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차세대 안무가로 주목받던 제임스 전이 안무를,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에 다녀온 김인희가 단장 자리를 맡았다. 두 사람이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단 한 가지, 클래식 발레가 주를 이루던 대한민국에 창작 발레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올해 서울발레시어터가 20돌을 맞았다. 초기 예술감독은 뉴욕 시티 발레의 수석무용수를 역임한 로이 토비아스, 이사장은 임영희가 지냈고, 서울발레시어터 운영을 위한 모든 업무는 김인희와 제임스 전 부부가 담당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지난 20년간 많은 결실을 거뒀다. 1995년, 제임스 전 안무의 ‘현존(Being) 1’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손수건을 준비하세요’란 타이틀로 28회 장기 공연을 이끌었다. 미국의 네바다 발레 시어터에 2001·2002·2004년에 걸쳐 제임스 전의 ‘생명의 선(Line of Life)’ ‘이너 무브스(Inner Moves)’ ‘12를 위한 변주(Variation for 12)’를 수출하고, 2008년에 노바 발레에 ‘이너 무브스’를 수출한 것은 한국의 창작 발레가 세계로 쏘아올린 첫 신호탄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IMF 금융 위기와 미국의 9·11테러, 최근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여파 등 국내외에 사회적 불안감이 만연해질 때마다 민간 예술단체는 직격탄을 맞았다. 2000년에는 예술의전당에 입주할 준비를 마쳤다가 짐도 풀지 못한 채 둥지를 빼앗긴 일도 있었다. 39명의 단원 및 기획·제작팀 직원들이 속한 민간 직업 발레단을 정기적 후원 없이 지키기 위해 김인희와 제임스 전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2015년 9월까지 약 980회 공연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제임스 전을 중심으로 여러 안무가가 서울발레시어터를 위한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기에 현재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레퍼토리는 104개에 달한다. 이외에도 콜롬비아·스위스 등 해외 단체와의 교류 활동과 소외 지역 및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창작 발레 불모지에서 열매를 맺기 위한 씨뿌리기의 하나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지난 20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이들이 꿈꾸는 미래를 지면에 소개하는 것으로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사업

국내 공연 1년에 최소 40~50회, 최대 80회 꾸준히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자체 기획 공연 외에도 대한민국발레축제와 K-발레 월드, 올해 처음 개최된 수원발레축제의 초대를 받아 관객들을 만났다. ‘방방곡곡 문화공감’을 통해 재정이 열악한 지방 문예회관 및 소외 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해외 공연 미국, 이탈리아, 모나코, 이스라엘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초청을 받아 해외 공연을 개최했다. 일본과 터키에서는 한국·일본 문화 교류 합작 공연(1999)과 한국·터키 우정의 해 50주년 기념 공연(2007)을 각각 개최했다. 미국의 네바다 발레 시어터와 노바 발레에 창작 발레를 수출하여 한국 모던 발레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사회공헌 및 교육 노숙인의 자신감 회복을 위한 교육 및 공연 프로그램 ‘꼬뮤니께(Communique)’를 2012년 개최하여 화제를 모았다. 장애 아동의 정신적·육체적 건강 증진과 비장애 아동의 인식 개선을 위한 ‘더불어 꿈꾸는 발레단’과 발레 용어와 동작을 배우고 체험하는 ‘발레 볼레’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국제 교류 2012·2013년에는 마약과 빈곤, 성매매에 노출된 콜롬비아의 아동 및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문화예술교육사업으로 현지에서 공연 및 교육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올해 10월에는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온 스위스 바젤 발레와 합동 공연을 선보인다. 바젤 발레의 예술감독 리처드 웰록과 서울발레시어터의 예술감독 제임스 전이 합작한 ‘무브스(Moves)’를 각 단체의 단원들이 한데 모여 한국과 스위스에서 공연한다.

Seoul Ballet Theatre(SBT)

The SBT was founded in 1995 to establish a new and daring platform for dance in Korea, with the late Roy Tobias as its first Artistic Director. Formerly a leading soloist of George Balanchine’s New York City Ballet and an accomplished and beloved teacher, Roy was committed to making SBT accessible to the public, without sacrificing artistic integrity. This spirit continues today under the joint direction of James Jeon, a former student of Tobias, and Inhee Kim, both founding members of SBT.

The SBT aims to give performances that audiences can readily relate to and, at the same time, provide the level of artistic and technical quality that is offered by classical ballet. It pursues creative and accessible ballet.

Over the past 20 years, The SBT has produced over 100 choreographies and performed more than a thousand times.

In 2001, thanks to Jeon’s work, The SBT became the first Korean company to sign a license agreement to export its productions and choreographies overseas.

Works by James Jeon, commissioned and performed by Overseas Companies, amongst others: ‘Line of Life’ ‘Inner Moves’ ‘Variations For Twelve’(Nevada Ballet Theatre, US, 2001~2014), ‘Inner Moves’(Nova Ballet, Arizona, US, 2008), ‘Voice in The Wind’(Ballett Basel, CH, 2015~2016).

The SBT has been engaged not only with productions and performances, but also with a number of educational programs for underprivileged, homeless and disabled children.

Also, the SBT has been developing a wide range of training programs targeted at ballet masters and other dance professionals, based on differentiated, creative repertoires under a mid- to long-term plan.

The SBT aims to promote creativity and to position the Art of dance as a medium for social contribution.


▲ 이지숙 홍성우 나지혜 문예숙 이서연 이와모토 유리 이형곤 노원정 김혜지 윤은숙 김민수 김예람화


▲ 사무국 직원 노민혁 김은지(차장) 이슬비 김애겸(의상실장) 강선화(행정과장) 여훈(사무국장) 이은지 서주원

 

 

 

서울발레시어터가 걸어온 길
국내 창작 발레의 환한 빛줄기가 된 시간에는 열정, 절제, 인내의 순간이 담겨 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태동

창단은 무용수들의 수다로부터 시작됐다. 1994년 11월, 평소 친분이 두터운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소속 무용수들이 김인희·제임스 전 부부의 집에 모였다. 해외 작품만 공연하는 국내 발레단 실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던 이야기가 발전해 소그룹 창작 발레단을 도모했고, 김인희가 단장을, 제임스 전이 상임안무가를 맡기로 한다. 1995년 2월 제임스 전과 김인희는 서울발레시어터 출범을 선언했으며, 그해 6월에 ‘현존(Being) 1’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했다.

“창단 공연 이전에 이미 ‘도시의 불빛’과 로이 토비아스의 작품으로 화려한 창단을 예고했기 때문에 1995년 6월의 ‘빙1’ 초연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긴 코트를 휘날리는 밤의 제왕 역, 이탈리아 출신 주역 루돌포 파텔라가 록 음악에 청년 집단을 지휘하는 첫 장면만으로도 관객은 이미 혼을 내맡길 준비가 되었다.”(‘객석’ 2011년 10월호)


▲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멤버(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나인호·문경환·제임스 전·최광석·이인기·강세영·김인희·연은경

보통 발레단의 소속 무용수 등급은 수석무용수, 솔리스트, 드미 솔리스트, 코르 드 발레(군무)로 나뉜다. 하지만 ‘창작 발레’를 기치로 내건 서울발레시어터는 무용수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다. 클래식 발레는 무용수들에게 요구되는 체형이 정해져 있지만, 창작 발레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무용수들의 개성이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 민간 직업 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의 등장은 ‘직업 발레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출범 당시 국내의 직업발레단은 국립발레단(1962~), 광주시립발레단(1976~), 유니버설발레단(1984~) 세 개에 지나지 않았다.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은 공공단체였고, 유니버설발레단은 재단을 토대로 설립됐다. 이에 비해 서울발레시어터는 개인자금으로 탄생한 순수 민간단체다. 정기적 후원이 없어서 항상 혹독한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SBT의 가장 큰 실수는 의욕이 앞서 경제적 계산을 정밀히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주위에선 그런 계산이 있었다면 SBT를 시작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지만 발레단 재정의 3분의 1가량을 지원할 후원자를 잡지 못하면 제대로 된 민간 발레단은 한국에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객석’ 2005년 4월호, 김인희 인터뷰 중)

초대 예술감독 로이 토비아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으로 재직한 로이 토비아스. 그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했고, 뉴욕 시티 발레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3대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단원이던 김인희·제임스 전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발레시어터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보며 차근차근 조언을 해줬다. 자신의 말년을 서울발레시어터와 함께 보냈고, 한국인으로 귀화해 ‘이용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2006년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 동아일보 1996년 4월 5일자

첫 장기 공연, ‘손수건을 준비하세요’

1996년 3월 14일부터 4월 14일까지 대학로 문화예술회관 서울두레에서 첫 장기 공연을 열었다. ‘손수건을 준비하세요’란 공연 타이틀은 소극장 공연이라 무용수의 땀이 관객에게 튈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클래식 발레 위주의 A편과 연극적 전개에 초점을 맞춘 B편을 하루씩 교대로 선보였다. 창단 시절에 힘을 실어준 임영희 이사장과의 인연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단원들의 열정적인 공연에 감동한 임영희는 장기공연 동안 이틀에 한 번씩 손수 만든 간식을 무용수들에게 제공했다.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김인희와 제임스 전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사장이 됐고, 그는 서울발레시어터 창단기에 헌신적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과천시민회관 상주 단체 활동

2000년 1월, 서울발레시어터는 예술의전당에 사무실을 임대할 기회를 얻었다. 비싼 보증금이었지만 예술의전당에 터를 잡으면 발레단 운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김인희는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아카데미를 정리하며 입주할 준비를 마쳤다. 비슷한 시기에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화하며 예술의전당 상주 단체로 입주하게 됐다. 두 발레단이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공연과 아카데미를 여는 것은 불편한 게 사실이다. 이후 서울발레시어터는 지방 공연을 통해 인연을 맺은 과천시민회관으로 2002년에 둥지를 옮겼다. 2002년 이후 제임스 전의 안무작은 모두 과천시민회관 연습실에서 만들어졌으니, 과천은 그야말로 서울발레시어터의 산실이다.

가장 큰 자산, 레퍼토리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외국의 고전발레를 수입, 정착시킨 후 현대발레를 다시 수입하는 과정에 있다. 이는 발레 강국들의 관행이므로 재정이 풍부한 단체들이 맡아서 해 주어야 하는 몫이다. 동시에 누군가는 우리시대, 우리나라의 발레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SBT가 앞장서서 하고 있다. 한국 창작발레의 온상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객석’ 2004년 8월호)

서울발레시어터가 20년 동안 축적한 가장 큰 자산은 104개의 창작품이다. 제임스 전 작품을 비롯하여 로이 토비아스, 조지 발란신, 허용순, 안성수, 리처드 웰록 등 여러 안무가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창작 활동의 최고 결실은 해외 무용단에 창작품을 ‘수출’한 것이다. 2001년 ‘생명의 선’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이너 무브스’를, 2004년에는 ‘12를 위한 변주’를 네바다 발레 시어터에 수출했고, 2008년에는 노바 발레에 ‘이너 무브스’를 판매했다.


▲ 홈리스 발레교육

노숙인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다

2011년 노숙인들의 재활을 돕는 ‘빅이슈’ 잡지와 협력하여 ‘홈리스 발레교육’을 시작했다. 노숙인들이 발레 수업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협동심을 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노숙인 교육생들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호두까기 인형’ 1막 파티 신에 귀족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2011년 10월에는 ‘생명의 선’에 솔리스트로 출연했고, 2012년 10월에는 강동아트센터와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꼬뮤니께’를 선보였다.

“꼬뮤니께는 ‘코뮌’에서 비롯된 말로, 프랑스에서는 ‘공동생활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을 일컬으며, 중세의 라틴어 ‘communia’에서 시작한 ‘communis’ ‘함께 모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함께’라고 하는 이 좋은 의미의 단어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으니, 이번 작품은 여느 고전발레보다 더욱 뜨거운 시선을 모으는 게 당연지사. 그리고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작품 속에 모두 녹였다.”(‘객석’ 2012년 2월호)


▲ 더불어 행복한 발레단

사회공헌 예술교육을 이어가다

2013년에는 보건복지부와 협력하여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손을 맞잡고 발레를 배우는 ‘더불어 행복한 발레단’을 시작했다. ‘동물의 사육제’ ‘피터와 늑대’ 공연을 펼쳐 관객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전했으며, 현재 3기가 진행 중이다. 1년 단위로 프로그램이 끝나다 보니 발레에 재미를 붙인 장애 학생들이 아쉬움을 호소했다. 외부 학원에서는 수업에 방해된다며 장애 학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2015년 6월에는 이들을 위해 ‘꿈꾸는 발레단’을 창단했다. ‘더불어 행복한 발레단’을 졸업한 학생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서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프로그램이다.


▲ 콜롬비아 청소년들을 위한 통합 예방 프로젝트(PIP)

2012·2013년에는 콜롬비아 툴루아에서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열었다. 마약과 성매매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콜롬비아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통합 예방 프로젝트(PIP)’였다. 콜롬비아 정부가 서울발레시어터의 노숙인 자활 프로그램 운영을 알고 도움을 요청해 이뤄졌다. 콜롬비아 빈곤 청소년 100명을 대상으로 발레교육을 실행하여 자기표현 능력과 정서 순화를 도모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문화 소외 계층을 위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은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2015년. 그리고 20주년

1995년 7월 20일, 스위스 바젤 발레와 서울발레시어터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주최로 합동공연을 선보였다. 이후 두 발레단의 상임안무가 리처드 웰록과 제임스 전은 지속적으로 교류했고, 각국에서 초청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며 신뢰감을 쌓았다. 그 결실로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며 오는 10월 1·2일 다시 합동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INTERVIEW

단장 김인희와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

“20년은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창단부터 지금까지 ‘직업 발레단’을 강력히 표방하고 있습니다.

김인희 예술은 인스턴트커피가 아니라 물을 오래 끓여 우러나오게 하는 겁니다. 작품이 있을 때마다 급하게 모여 연습하고 작품을 올리는 무용단은 전문적이지 않아요. 클래식 발레는 학교 다닐 때부터 발레 작품의 동작을 배우지만, 창작 발레는 안무가의 색깔과 움직임을 몸에 익히는 데에만 3년이 걸립니다. 그래서 서울발레시어터는 오디션을 통과해도 6개월 동안 연수단원을 거치며 우리 발레단과 잘 맞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죠. 6개월 뒤 정단원이 되면 월급과 4대 보험을 지급하면서 발레단이 무용수에게 지원을 합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이상향을 뉴욕 시티 발레라고 말했죠.

제임스 전 조지 발린신과 뉴욕 시티 발레의 도전 정신 때문입니다. 발란신의 신고전주의 안무 경향을 러시아에서 처음엔 우습게 알았지만, 지금은 하고 싶어 하잖아요. 뉴욕 시티 발레의 혁신을 본받아 한국에서도 새로운 예술을 하고 싶었습니다.

김인희 운영 시스템 때문이에요. 뉴욕 시티 발레는 발란신이 사비로 만든 발레단이었어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여러 번 문을 닫기도 했고요. 하지만 센터 안에 입주하고, 포드 자동차사의 파격적인 지원 덕에 현재 뉴욕을 대표하는 무용단이 됐어요. 무엇보다 발란신 사후에도 그 정신과 얼이 담긴 작품들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고 있잖아요. 서울발레시어터도 우리 두 사람이 시작한 작은 발레단이지만, 뉴욕 시티 발레를 닮고 싶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발레가 20년 전에는 일반인에게 어려운 문화였습니다. 특히 모던 발레는 더 낯설었죠. 당시 ‘모던’과 ‘창작’이 주무기인 서울발레시어터는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제임스 전 작품을 통해 가까이 다가갔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가족 발레’가 탄생했고, 1996년에 문화예술회관 서울두레에서 장기 공연을 하면서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김인희 국내 발레단 중에서 우리가 야외 공연을 가장 많이 했을 거예요. 창단 초부터 예산이 생기면 야외 공연장에서 꾸준히 공연을 했습니다. 발레는 어렵고 특수 계층만 관람한다는 선입견이 뚜렷해 사람들이 극장에 오는 것을 어려워하죠. 올림픽공원이나 어린이대공원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했어요. 올해 발레 STP협동조합이 수원 야외음악당에서 5일 동안 공연한 것이 최고의 성과입니다.

현실적 여건을 수용하면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부분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습니까?

제임스 전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어요. 주방장이라면 손님이 와서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조리해야죠. 김치찌개만 끓이면 된장찌개를 먹고 싶은 손님은 어떡하겠습니까? 찌개도 예쁜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야 하고요. 그것이 예술성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김인희 공존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만드는 건데, 작품이 어려워 관객이 찾지 않는다면 예술을 만드는 이유가 없죠. 저는 전문가보다 일반 관객들의 평이 더 무서워요. 발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성인 거죠.

민간 직업 발레단의 효시로서 자랑스러운 점과 아쉬운 점을 알려주세요.

김인희 후발 단체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틀을 만든 데에는 자부심을 가져요. 아쉬운 점은 20년의 세월 동안 안정적으로 후원받을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긴 역사를 가지고 활동하는 예술단과 비교하면 20년은 아직 ‘베이비’ 단계예요. 지난 20년은 씨 뿌리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누군가 물도 주고 거름도 주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제임스 전 뉴욕 시티 발레처럼 기업과 국가의 지원이 반반씩 이뤄져야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총 네 개의 작품이 해외 무용단 레퍼토리로 채택됐죠. 한국 안무가의 작품 수출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제임스 전 더 많이 못한 게 문제죠. 해외와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김인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창작산실 지원 사업으로 안무가들이 좋은 작품을 계속 만들지만 대부분 일회성 공연으로 끝나요. 작품 유통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신경 써야 해요. 개인이 발로 뛰니까 작품 수출이 힘들 수밖에 없죠.

현재 우리나라 ‘직업 발레단’의 흐름은 어떻습니까?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가 창단할 때도 직업 발레단은 국립발레단·유니버설발레단·광주시립발레단밖에 없었어요. 현재도 단원과 직원들에게 월급과 4대 보험을 지급하는 곳이 서울발레시어터까지 네 곳 정도죠.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매년 졸업하지만, 취직할 수 있는 무용단이 별로 없습니다. 민간 발레단은 항상 예산이 문제거든요. 성과를 보이는 발레단에는 지자체나 기업에서 예산의 50%를 지원해주고, 나머지 50%는 발레단 공연이나 교육 프로그램 수입으로 운영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창작 안무를 하는 젊은 무용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해외 유명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도 정말 많은데, 앞으로 한국 발레계의 흐름을 어떻게 예측하나요?

제임스 전 직업 발레단이 생기지 않으면 한국 발레계에 희망은 없어요. 직업 발레단에서 활동하며 경험이 축적돼야 훌륭한 안무가·경영가·행정가가 나오죠.

김인희 국립발레단이 생긴 지 53년밖에 안 됐잖아요. 지난 50년 동안 우리 발레계에서 훌륭한 무용수를 키우는 것에 전력투구했다면, 이제는 무용수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전문적인 단체를 많이 만들어야죠. 현재 국립발레단·유니버설발레단·서울발레시어터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는 무용수들의 은퇴가 3~5년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들이 무용수로서 은퇴하고 다른 무용단에서 단장이나 안무를 한다면 정말 좋겠죠. 시립무용단이 하나 생기면 일할 수 있는 시장이 넓어져요. 무용 단원 40여 명, 사무국 직원 20여 명, 의상디자이너, 무대디자이너, 무대 스태프까지 어마어마한 일자리가 창출되죠. 무용단에서 오전에는 공연 준비를 하고, 오후에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춤을 가르치면 지역문화예술도 활성화됩니다. 뉴욕 시티 발레의 흑인 무용수였던 아서 미첼이 할렘에서 춤을 가르치니 지역 분위기가 바뀌고 할렘 댄스 시어터가 탄생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한국은 직업 발레단이 부족하니 훌륭한 무용수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나고, 우리나라 발레단에선 무용수가 부족해 중국 무용수들을 데려오는 실정이죠.

제임스 전 우리나라 무대 스태프의 수준은 현재 세계 최고입니다. 극장이 많아지면서 조명감독과 무대감독이 다 해외에서 유학한 사람들로 채워졌죠. 그에 비해 공연장에 상주하는 단체가 정말 부족해요.

김인희 극장을 세우는 것은 즉각 결과물이 나오지만, 예술단체는 계속 뒷바라지를 해야 하잖아요. 그것이 무서워 다들 피하는 거죠. 정권이나 시장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10년, 20년 멀리 내다보며 지역을 위한 예술 단체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사회적 필요에 의한 예술 단체’가 되기를 최종적으로 바란다고 말하셨죠.

제임스 전 지역사회의 문제를 예술 단체도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김인희 관객들은 땀 흘리며 번 돈으로 표를 사서 공연장에 오잖아요. 예술가들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해요. ‘나는 발레리나니까 춤만 출 거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재능을 가지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해야 하죠.

‘좋은 발레단’의 기준은 ‘좋은 작품’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나요?

김인희 우리는 늘 신작을 만들었어요. 창작을 하지 않으면 서울발레시어터는 죽은 거예요. 첫째 목표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 공연하는 것이고, 둘째 목표는 앞장서서 봉사하는 사회적 예술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의 어려움에도 발레단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임스 전 단원들이죠.

김인희 우리 단원들의 직장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거예요. 어느 날 일어났는데 가야 할 곳이 없다면 정말 슬플 겁니다. 단원들은 우리를 믿고 여기까지 온 동지들이이에요. 이들을 배반할 수 없었습니다.

새 비전을 갖고 발레단을 꾸려나갈 수 있는 새로운 단장이 필요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서울발레시어터 20주년에 은퇴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김인희 제가 발레와 첫 인연을 맺은 지 올해 딱 40주년인데, 서울발레시어터가 창단 20주년을 맞이했네요. 주변에선 고생해서 이제야 발레단이 막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왜 그만두려 하냐고 걱정하기도 해요. 우리가 발레단을 끝까지 소유할 생각이었으면 명칭을 ‘김인희·제임스 전 발레단’이라고 지었을 거예요. 우리가 없더라도 창단 정신을 이어받아 발레단이 계속되길 바랐기에 서울발레시어터로 이름을 지은 겁니다. 민간 발레단이라 단장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져야 하니 다들 부담스러워 해요. 창단 당시의 뜻을 이어 발레단을 잘 끌어줄 사람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날이 곧 오겠지요.

서울발레시어터와 함께한 20년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제임스 전 한 단어만 생각나요. 열정.

김인희 절제. 너무 많은 것을 절제하며 살았어요.

제임스 전 김인희 단장은 원래 춤추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김인희 다시 태어나도 발레리나를 하고 싶지만, 단장은 하고 싶지 않아요.(웃음)

제임스 전 김인희 단장의 희생이 없었으면 제가 이렇게 작품을 못 만들었죠. 김 단장이 ‘절제’라고 얘기했지만, 김 단장의 20년은 ‘희생’이었습니다.

서울발레시어터 대표 레퍼토리 5


▲ ‘현존’(1995) ©MSY

‘현존’(1995)

서울발레시어터를 대표하는 작품을 5개만 꼽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김인희와 제임스 전의 입에서 동시에 처음 나온 말은 ‘현존’이었다. 창단 공연으로 개최한 이 작품은 록·힙합·비보잉 등을 발레와 결합시킨,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로 주목받았다. 1995~1998년까지 총 3부작으로 나누어 초연했고, 1998년에 120분 러닝 타임의 전막을 초연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정체성과도 같은 작품이다.


▲ ‘마음 속 깊은 곳에’(1993) ©정광진

‘마음 속 깊은 곳에’(1993)

초대 예술감독인 로이 토비아스 안무작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로 연주되는 크라이슬러의 소품에 고전 발레 테크닉이 우아하게 펼쳐지는 작품이다. 김인희는 “1993년, 이탈리아에서 야외 공연을 할 때 마지막 장면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며 20주년 기념 페스티벌 갈라 공연에서 이 장면을 선보일 것이라 설명했다.


▲ ‘라이프 이즈’(2011) ©정광진

‘라이프 이즈’(2011)

‘죽음’ ‘사랑과 열정’ ‘외로움’ ‘탄생’ 등 4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인간의 삶을 표현한다. 70여 명의 오케스트라·합창단의 연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 피아졸라의 탱고,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라벨 ‘볼레로’가 펼쳐진다. 색채감이 또렷하게 대비되는 의상으로 시각적 효과를 강조하며, 절제미가 돋보이는 진지한 움직임은 제임스 전의 예술 세계와 가치관을 드러낸다.


▲ ‘생명의 선’(1999) ©정광진

‘생명의 선’(1999)

미국의 네바다 발레 시어터에 처음 저작권료를 지급받고 수출한 작품으로 서울발레시어터로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가을을 상징하는 ‘바람의 노래(Song of Wind)’(1996)와 여름을 그리는 ‘초우(After the Rain)’(1998)에 이어 봄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를 배경으로 남녀 무용수 2인이 고난도 테크닉을 선보인다.


▲ ‘레이지’(2014)

‘레이지’(2014)

지난 6월 공연된 ‘레이지’는 한국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제임스 전의 최신작이다. 억압과 공포를 상징하는 무대에서 필립 글래스의 ‘컴퍼니 4’, 존 케이지의 ‘불가사의한 모험’을 배경으로 무용수들이 생존 본능을 드러내며 격렬하게 춤을 춘다. 작품은 제임스 전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억압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안쓰러운 움직임 속에 예술적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PREVIEW

창단 20주년 기념 페스티벌 & 바젤 발레 합동 공연 ‘무브스’

서울발레시어터의 창단 20주년 기념 페스티벌 ‘Bravo, SBT’가 10월 22일과 23일 양일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펼쳐진다. 이번 기념 공연에선 그동안 서울발레시어터와 함께해온 다양한 안무가의 작품을 갈라 공연으로 꾸민다.

1부는 리처드 웰록 안무의 ‘스닙 샷(Snip Shot)’, 허용순의 ‘그녀는 노래한다(Elle Chante)’, 로이 토비아스의 ‘마음 속 깊은 곳에(Straight to the Heart)’, 제임스 전의 ‘레이지’의 일부분이 공연되며, 2부는 서울발레시어터의 대표작 ‘현존’의 베스트 장면으로 꾸며진다.

이번 공연은 김인희 단장이 무용수로서 은퇴하는 무대라 더욱 의미가 깊다. 20년 전 ‘현존’의 오리지널 캐스트로 무대에 섰던 그녀는 ‘현존’ 갈라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나 서울발레시어터 운영에만 집중할 예정이다. 그녀는 “감회가 남다르다. 며칠 전 ‘현존’ 공연을 연습하며 코끝이 찡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공연장 로비에는 무대의상, 토슈즈, 사진 등 서울발레시어터의 20년을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전시가 마련된다. 더불어 서울발레시어터는 ‘민간발레단, 직업창출 교두보 역할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심포지엄도 개최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10월 1·2일에는 서울발레시어터와 바젤 발레의 합동 공연 ‘무브스’를 공개한다. 리처드 웰록과 제임스 전이 합작한 무대를 각 발레단의 무용수 6명(총 12명)이 선보인다. 서울발레시어터와 바젤 발레의 만남은 1995년 경기도문화의전당 주최 합동 공연으로 시작됐으며, 2012년 마스터클래스 교류로 끈끈해졌다. 창작에 대해 비슷한 철학이 있던 리처드 웰록과 제임스 전이 이번 협업을 준비한 것이다. 이들은 국내 공연에 이어 2016년 스위스에서도 본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다.

사진 심규태·서울발레시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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