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 현악 4중주단·티베르기앵·에셴바흐의 다른 빛깔 모차르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3가지 빛깔, 맑은 향취

내심 ‘나만 그렇지는 않겠지’하며 위로하다가도 종종 불안해지는 사실이 있다. 바로 음악을 하는 사람 치고 감성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스스로 걱정스러운 점인데, 과거에는 분명 메마른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할 듯하다. 그래도 요즘은 영화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울기도 하고, 작품을 듣다가 작곡가들의 기구한 생애에 감정이 이입될 때는 코가 빨개진다. 눈물이 많아진 게 자랑도 아니고 ‘감상’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에 대한 구별도 필요하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만 작품을 바라보고 분석하려 애쓰던 해석 방법과 또 다른 본인 나름대로 접근 방식을 뒤늦게나마 찾아낸 것 같아 새롭다.

하지만 아직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감성이 있는데, 이른바 ‘계절을 타는’ 감성이다. 계절이 바뀔 즈음 심심치 않게 받는 질문이 계절에 맞는 음악을 골라달라, 혹은 연주해달라는 것이다. 음표 몇 개를 가지고 며칠 동안 씨름하고, 칼바람이 산들바람으로 바뀌는지, 비가 눈으로 변하는지 모른 채 연습실과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음악가들에게 계절에 맞는 음악이라… 답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계절을 느끼고 그 안에서 음악을 느끼는 시간은 어느 순간보다 자아가 감성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아닌가. 그러므로 계절과 더불어 소중한 음악이 될 수도 있는 추천 음악은 고민스러운데, 이럴수록 그동안 듣고 본 것, 남들이 얘기해준 것 등의 선입견을 지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계절을 타는 건 잘 못 해도, 어느 계절이나 필자의 대답은 하나, 모차르트다.

음악을 하게 된 후 줄곧 필자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궁극적 목표는 모차르트라고 생각하고,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위대한 음악 유산을 만들어준 천재가 어디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게 됐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죄책감이란 단어를 쓴 것은 그의 음악이 어느 순간에 들어도 감성을 깨끗함으로 돌려놓아주기 때문이다. ‘힐링’이란 단어의 유행이 지나가는 듯하고 아팠을 때 음악으로 직접 치유한 적도 없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세상 일 때문에 어두침침해진 감성을 가장 빠르고 깨끗하게 닦아줄 수 있는 약이 돼주고 있다.

어떤 음악이든 좋다. 모차르트는 언제든, 어디에든 있다. 이 가을, 풍성한 내한 무대 가운데 보석 같은 모차르트의 이름이 눈에 띄는 것은 행복한 우연일까. 달콤한 피아노의 음색으로, 섬세한 현악 4중주의 화음으로, 웅장하고 호방한 오케스트라의 울림으로 만나는 풍성한 모차르트가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이쯤 되면 필자는 가을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진다.

독창적인 자유로움, 에벤 현악 4중주단

재즈 밴드, 혹은 아카펠라 그룹으로도 변신이 가능한 현악 4중주단으로 꼽히는 프랑스의 에벤 현악 4중주단이 6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2004년 ARD 콩쿠르에서 1위를 비롯해 다섯 개의 상을 차지하며 화제에 올랐던 이들은 독일 에코 클래식 상과 그라모폰 상을 받으며 음반에서도 승승장구하는 팀이다. 정통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스스로 편곡한 재즈, 영화음악, 팝 등을 자유롭게 무대에 올리는 네 사람의 파격은 창의력과 독창성에서 호평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단순히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손을 대는 모든 분야에서 깊은 음악적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 에벤 현악 4중주단의 강점이다.

전반부 베토벤 현악 4중주곡, 후반부 존 콜트레인·조 자비눌·피아졸라를 포함한 즉흥연주로 채워질 프로그램을 열어줄 오프닝 곡으로 그들이 선택한 곡은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F장조 K138이다. 16세 천재 소년이 이탈리아 연주 여행을 마치고 한껏 의욕에 들떠 신나게 펜을 놀린 신선함과 이탈리아 하늘의 파란 청명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한 악상이다. 악곡 형태나 제목에서 유희적 성격이 드러나나, 같은 시기에 쓰인 K136과 K137보다 심포닉한 사운드가 텍스트 속에 암시돼 있어 진지함도 엿볼 수 있다. 알레그로-안단테-프레스토로 이어지는 로코코 풍의 간결함과 풍부한 변화의 세계를 에벤 현악 4중주의 상상력이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지 기대된다.

섬세하게 정제한 피아니즘 세드리크 티베르기앵

그야말로 흥미진진하고 알차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약진은 21세기가 무르익어가는 지금 절정으로 향해 가는 느낌이다. 그 중심에 16년 만의 내한 공연을 선보이는 세드리크 티베르기앵(C?dric Tiberghien)이 있다.

1998년 롱티보 콩쿠르 우승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티베르기앵은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해석 능력과 안정된 기교, 에스프리 넘치는 세련된 뉘앙스 등으로 주목받는 연주자다. 2009년 서울시향 마스터피스 시리즈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을 연주해 호평받았고, 2013년 다시 한 번 협연 기회가 있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돼 아쉬움을 남겼는데, 이번 독주회에서는 베토벤·쇼팽과 함께 그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무대에 올린다. 최근 프랑크·브람스·시마노프스키 등 낭만파 레퍼토리에 주력하는 가운데 선곡된 모차르트라서 더욱 반갑다.

이번에 연주되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K457은 앞서 언급한 디베르티멘토 K138과 비교하면 과연 한 작곡가의 작품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청명한 하늘에 갑작스레 무거운 구름이 잔뜩 낀 형상이랄까. 1784년 10월 완성된 이 곡은 작곡가와 동시에 피아니스트·교사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모차르트의 야심이 묻어나는 걸작이다. C단조 조성을 예로 들어 베토벤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는바, 진지함이 넘치는 주제와 신중함이 동반된 우아함, 확대된 구성이 다분히 미래지향적 요소를 품고 있다. 단정함과 깔끔함을 정제된 테크닉으로 그려내는 티베르기앵의 모차르트는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철학에 깃든 우아함,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이번 가을 모차르트 마니아들에게 6년 만의 내한 공연을 하는 빈 필의 소식보다 반가운 것이 있을까 싶다. 거기에 지휘자로도 최고봉이며 과거 모차르트의 스페셜리스트로 올드 팬들의 꾸준한 응원을 받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Christoph Eschenbach)의 지휘와 피아노 연주라니 더 바랄 게 없다. 가히 대본과 줄거리,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주연배우들의 인기까지 완벽하게 갖춘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빈 필의 인기는 팬들이 가지는 신뢰와 단원들의 자부심, 그들만의 사운드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정확히 비례한다. 빈 고유의 전통 악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특유의 사운드가 여기서 비롯된다고 볼 수만은 없다. 오히려 음악의 수도를 굳건히 지키며 그들이 사랑하는 작곡가의 정신을 가장 순수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확신이 자타 공인하는 세계 정상의 위치를 지키는 이유 아닐까.

에셴바흐는 필자를 포함한 많은 피아니스트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감상 입문을 도와준 고마운 피아니스트였을 것이다. 베토벤·브람스 등에도 호연이 많지만, 차분한 정서 위에 은근한 철학적 사색이 풍겨 나오는 에셴바흐의 우아한 모차르트는 오랜 향취가 풍기는 것이었다. 취리히 톤할레·필라델피아·파리 오케스트라 등을 거치며 정상급 지휘자로 올라선 에셴바흐가 손끝과 지휘봉으로 어루만질 빈 필의 모차르트는 또 어떤 색깔일지, 그 결과가 예측 불가능이라 더욱 즐겁다.

개인적으로도 자주 연주해 친숙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A장조 K488은 선율미와 귀족적 색채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으뜸이다. 간결하고 소담스러운 분위기지만 담고 있는 음악적 메시지는 풍성한 1악장, 시칠리아노 리듬과 나폴리 6화음이 한없이 매력적인 2악장에 이어지는 명랑함과 장난스러움을 머금은 3악장에 이르기까지 고전파 협주곡의 미덕을 모두 담고 있는 걸작이 모차르트 베테랑 에셴바흐의 손길로 요리될 예정이다.

교향곡 40번 G단조 K550에 대한 감상평 중 ‘천사의 음성이 들린다’고 했던 슈베르트의 표현보다 더 멋진 것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모차르트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우리 곁에 있다 떠났던 또 다른 천사의 이야기는 그만큼 정확히 이 작품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작곡가가 선호하던 G단조라는 조성에는 절절한 파토스가 흐르며 고상함과 절제 속에 터져 나오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표정은 참으로 놀랍다. 낭만파를 예견한 몰토 알레그로의 1악장과 실내악적 앙상블이 두드러지는 2악장, 강하고 거친 미뉴에트인 3악장을 거쳐 ‘질주하는 슬픔’ 4악장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앞으로도 영원히 완벽한 교향곡의 모델로 존재할 것이다.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K551 말고 어떤 곡에 ‘주피터’라는 이름을 불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단순히 작곡가의 마지막 교향곡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하이든의 후기 교향곡과 함께 18세기 베토벤 이전 교향곡 전체의 각종 작곡기법과 고전파 양식의 총정리와도 같은 위대한 작품이다. 당당하면서 빛나는 멜로디와 치밀한 구성까지 단 하나 음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는 걸작 교향곡은 빈 필과 함께 했을 때 더욱 빛나곤 했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대비가 인상적인 1악장, 장식적인 선율이 기억에 남는 2악장, 흥겨움과 강렬한 사운드가 집중력 있게 울리는 3악장 미뉴에트, 소나타 형식과 대위법의 완전한 조화를 이룬 4악장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이 교향곡은 들을 때마다 경탄에 사로잡히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사진 LG아트센터·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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