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균형과 절제의 미학
잘 치는 것은 덜 드러나지만 못 치는 것은 잘 드러나는 곡의 작곡가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모차르트와 다르게 슈베르트는 목적지와 과정을 명확하게 파악하기도 어렵다. 도착점만 생각하면 슈베르트와 동행하는 길은 고문일 것이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 그는 미련이 남는 길은 되돌아간다. 좀처럼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주변을 서성인다. 익숙해지는가 싶으면 또다시 낯선 길이다. 그렇게 돌아보고 둘러가는 사이 어느덧 새로운 길에 도착한다.
오직 슈베르트만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모습이 수척하다. 연주를 앞두고 김정원은 그것을 ‘슈베르트 디톡스’라 표현했다. 연주를 위해 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다. 최단 거리, 최소 시간에 중독된 이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슈베르트를 전달하려면 연주자는 그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슈베르트는 아무리 많은 준비를 했어도 자신만만하게 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작곡가다. 사실 어느 누가 자의식으로 가득 찬, 의기양양한 슈베르트를 듣고 싶어 하겠는가. 피아니스트들에게 슈베르트는 스트레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연주자에게 어떤 연주도 미완성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슈베르트 피아노 전곡 시리즈의 세 번째인 이날 김정원은 피아노 소나타 6·4·16번 세 곡의 단조 작품을 연주했다. 올해 마흔을 맞이한 그의 슈베르트는 맑고 차분하다. 무수한 감정의 요동을 느끼지만 그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심한 듯 흐르는 이면에서 잘하려는 욕심을 버리고자 하는 용기가 느껴진다. 이 용기는 잘하려면 할수록 어긋나는 슈베르트를 선택했을 때부터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첫 곡 피아노 소나타 6번에서 김정원은 불필요한 강조나 장식을 철저히 배제한 채 담담히 노래한다. 아름다운 선율을 잡지 않고 놓아주며 계속 흐르게 한다. 사실 힘을 빼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다. 이어진 피아노 소나타 4번은 때로는 단호하게 발을 구르고, 때로는 가뿐하게 거닐고, 때로는 종종거리는데 이내 모든 과정이 가는 줄 위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는다. 과하면 어색하고 덜하면 허전한 슈베르트의 음악을 타며 그가 얼마나 균형을 잡기 위해 절제했는지는 가벼운 움직임과 날렵한 연주 속에서 미세하게 전해진다.
마지막 곡인 피아노 소나타 16번은 4번과 같은 A단조지만, 한결 농도 짙은 슬픔을 노래한다. 김정원은 ‘내 생각과 느낌은 이렇다’라고 끊임없이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욕심은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직시할 때 긴장감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알레그로 비바체로 몰아치는 마지막 론도 악장까지 끝없는 줄타기 속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긴장이 해소되고 객석은 해방감을 누린다. 마음을 해독하는 ‘슈베르트 디톡스’ 효과일까? 그런데 마지막 음을 끝낸 김정원의 얼굴만이 시작했을 때보다 더욱 비장하다. 쉽게 온 길도, 쉽게 갈 길도 아니다. 슈베르트와 함께하는 그의 남은 여정이 더욱 미덥게 느껴진다.
사진 아트앤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