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세 현역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

그녀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1월 1일 12:00 오전

‘셰리’로 런던 무대에 오른 페리, 인생에 새 장을 펼치다

2013년 국립발레단 강수진(1967년생) 단장이 자서전을 발간할 때나, 2014년 ‘나비부인’ 주역으로 서울 무대에 설 때, 상당수 국내 미디어가 그녀를 ‘현역 최고령 발레리나’로 수식했다. 사실과 다른 부연이다. 2013년이면 1965년생 실비 기옘이 아크람 칸과 러셀 말리펀트의 컨템퍼러리 발레를 공연하던 시절이고, 1964년생 로열 발레의 리앤 벤저민은 ‘메이얼링’으로 마지막 전막을 올리던 시기다. 2014년엔 1963년생 니노 아나니아슈빌리가 민스크와 모스크바에서 킬리안과 발란신을 소화했고, 역시 1963년에 태어난 알레산드라 페리가 2007년 은퇴를 선언했다가 현역 복귀를 알리고 뉴욕에서 공백을 지워가던 때다.

2015년 들어 세계 주요 무대에서 1960년대생 현역 발레리나의 흔적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올해와 내년, 실비 기옘과 강수진이 각각 도쿄와 슈투트가르트에서 은퇴한다. 오직 한 사람, 알레산드라 페리의 시간만 거꾸로 흐른다. 올 12월에는 함부르크 발레에서 존 노이마이어 신작 ‘두세’에 출연하고, 그 전에는 마사 클라크 안무작 ‘셰리’를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코번트 가든 린버리 스튜디오에서 공연했다. 지난 5월 웨인 맥그레거 안무작 ‘울프 작품집’에 등장하고 4개월 만의 런던 나들이다.

 

 


▲ 알레산드라 페리와 에르만 코르네호가 열연한 ‘셰리’ ©Joan Marcus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발레리나

밀라노 태생의 페리는 라 스칼라 발레 학교와 영국 로열 발레 학교를 거쳐 1980년 로잔 콩쿠르에 입상하고 본격적으로 프로에 입문했다. 로열 발레(1980~1984)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1985~2007), 라 스칼라 발레(1992~2007) 소속 무용수로 활동했다. 스스로 “라 스칼라는 첫사랑, 로열 발레는 발레를 배운 곳,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제2의 고향”으로 칭한다. 로열 발레 시절엔 케네스 맥밀런의 발탁으로 19세에 ‘메이얼링’으로 전막 주역에 오르며 ‘맥밀런의 뮤즈’로 통했다. 맥밀런은 ‘샹송’ ‘그늘진 골짜기’ ‘서로 다른 드러머’에 페리를 기용했고, 그녀의 기량은 1984년 맥밀런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웨인 이글링과의 커플링으로 만개했다.

이듬해인 1985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요청으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로 이적했는데 페리는 더욱 엄격한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훈련 체계를 마음에 들어 했다. 훌리오 보카와 이선 스티펠처럼 자신의 가련함을 부드럽게 감싸는, 170센티미터 초반의 적당한 키에 결이 고운 남성 무용수들과 주로 짝을 이뤘다. 2000년대엔 라틴 계열인 마르셀루 고메스, 로베르토 볼레와 함께 대부분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전막 오프닝을 가져갔으며, 고국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발레에선 마시모 머루와 롤랑 프티 작품에서 빛을 발했다. 현역에서 활동한 시기가 길었던 만큼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앤서니 도웰 같은 레전드들과 함께한 것도 요즘 프리마 발레리나들이 갖지 못한 자산이다.

데뷔 이래 동시대 최고 드라마틱 발레리나로 손꼽힐 기량과 연기를 선보였다. 프로 초기부터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톤으로 청순가련형의 지젤과 줄리엣에서 호평 받았다. 또한 배우 강수연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하는 요염함이 온몸에 흐르는 무용수다. 프티 ‘카르멘’이나 ‘박쥐’에서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벌크로 부풀지 않고, 보디 슈트가 매끈한 라인을 유지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식으로 성인 관객을 흡인했다. 만일 프티 버전 ‘사랑에 빠진 악마’에서 양성애를 연기하는 미소년 역 게루브(Cherub)를 오늘 캐스팅한다면, 1989년 마르세유 내셔널 발레에서 초연을 맡은 페리가 여전히 최적의 선택일 것이다. 가녀린 소녀에서 뱀파이어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페리가 일본에 가면 ‘발레계의 마리아 칼라스’라고 불렸다.

2000년대 중반에 은퇴 시기가 논란이 되자, 라틴어 어근으로 자신의 성인 ‘페리(Ferri)’가 뜻하는 ‘철(鐵)’의 이미지처럼 강한 여성이 되겠노라고 인터뷰했다. 그러다 2006년 10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카와 ‘마농’을 준비하면서 페리는 현지 언론을 통해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지금 수준보다 떨어지는 기량을 단 하루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단짝 보카가 같은 해 6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를 퇴단하면서 느낀 상실감이 결정타였다. 보카가 밝히길 “그녀와 함께한 22년 동안 같이 춤출 수 없던 기간은 그녀가 두 아이를 임신했을 때뿐이다. 처음 오디션에서 만났을 때 서로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를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보카가 페리에겐 발레 인생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 결과, 페리의 2007년 남은 스케줄은 은퇴 공연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6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페리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은퇴 갈라가 열린 도쿄문화회관은 더 이상 페리의 춤을 볼 수 없다는 관객들의 탄식이 공연장을 덮었다. 페리는 “이제 어머니로 소중한 삶을 찾고 싶다”고 밝혔다. 은퇴 후엔 사진작가 파브리치오 페리 사이에 낳은 두 딸 마틸데와 엠마를 돌보며 지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페리는 춤 없는 인생에 쉽게 적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 필라테스와 요가, 발레 클래스로 유연성을 잡았다. 페리를 두고 주변에선 ‘복귀는 시간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2013년에는 15년을 함께한 파트너 파브리치오 페리와 결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발끝

2013년 여름, 페리는 6년 공백을 깨고 이탈리아 스폴레토에서 ‘위층의 피아노’ 주연으로 복귀했다. 은퇴 전에는 “앞으로 안무가를 하진 않을 것”이라 했지만, ‘위층의 피아노’는 자신이 안무했다. 스스로는 ‘복귀’라는 어휘 대신 “인생에 새 장을 펼친다”고 표현했다. 스폴레토 페스티벌에서 커피를 같이 마시던 웨인 맥그레거는 2015년 코번트 가든에서 ‘울프 작품집’ 출연을 제안했다. 1985년 뉴욕으로 건너간 이래, 2003년 로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 객원 출연한 걸 제외하면 페리는 코번트 가든 공연이 없었다. 깊고 짙은 눈으로 긴 머리를 날리며, 앙상하지만 유연한 몸집을 이어가던 1980년대의 페리를 기억하는 런던의 노년 관객들이 ‘울프 작품집’에 이어 ‘셰리’ 공연의 로비를 채웠다. 영국 무용비평가협회장 그레이엄 와츠가 공연 전부터 ‘별이 총총히 빛나는 캐스트’로 바람을 잡았고 공연은 연일 매진했다.

2013년 뉴욕 시그니처 극장에서 초연된 ‘셰리’는 클라크가 20세기 초반 프랑스 문단에 두각을 나타낸 여성 작가 콜레트의 1920년 대작 ‘셰리(1920)’와 ‘셰리의 종말’의 스토리라인을 차용해 재조합한 3인극이다. 1912년 파리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타락한 청년 셰리와 연상의 여인 레아의 사랑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어떻게 파국을 맞는지를 그렸다. 스물넷의 셰리 역에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무용수 에르만 코르네호가, 마흔셋의 레아 역에 페리가, 연극배우 프란세스카 어니스가 레아의 절친이자 셰리의 어머니 역 샬롯을 맡았다. 어니스는 극 중 사건의 진전을 영어로 전달하는 내레이터를 맡았고, 두 무용수는 신체 언어만으로 조응했다. 1981년생 코르네호(34세)와 페리(52세)의 실제 나이 차가 극중 배역의 차이만큼 벌어진 것도 화제였다. 페리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 몸담던 시절, 코르네호는 주로 세라 레인과 시오마라 레예스와 함께했다.

‘셰리’의 국면 전환은 음악이 담당했다. 피아노가 무대 왼편에 설치되어 음악감독 셰라 로덴버그가 라벨과 풀랑크, 드뷔시로 이어지는 단편들을 연주했다. 은퇴 후 자신의 몸에서 음악이 춤으로 이어지는 특유의 감각을 잃어가는 것이 힘들다던 페리의 마음을 위로하듯, 로덴버그의 건반은 65분 공연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애 장면에서 집중이 필요할 때마다 요동쳤다. 관객과 밀착된 소극장 무대의 특성상 무용수들이 음악에 따라 어떻게 움직임을 바꾸는지 낱낱이 보였다. 다양한 사조가 망라된 피아노는 듣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무브먼트에 함의를 부여하는 팔레트였다.

지속적으로 사랑을 의심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레아는 맨발로 셰리를 유린하다가 결국은 버림받았다. 은퇴 전엔 “발레리나의 삶을 사는 것이 춤을 추는 것과 동격이라고 생각했지만 튀튀를 벗고 나니 넓은 세계가 보였다”는 페리의 깨달음이 레아의 발끝에서 전해졌다. 섬세하게 페리의 근육이 떨릴 때마다 불과 10미터 안쪽에 포진한 관객의 숨소리도 잦아들었다. 발레와 연극의 경계를 넘고 싶다던 페리의 막연한 바람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트리트 댄스의 일명 ‘나이키’ 동작까지 날렵하게 소화할 만큼 빠르고 샤프한 테크닉이 일품인 코르네호를 위해 클라크는 셰리가 우유부단함을 자책하는 패시지를 작품 곳곳에 배치했다. 좁은 스테이지에서 플립 점프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코르네호의 답답함이 곧 캐릭터의 애처로움과 연결됐다. 거울을 보다가 레아의 환영과 만나고 사랑에 번민하다가, 암전에서 셰리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전개는 전형적인 신파였다. 총성 한 방으로 극이 종료된 이후의 객석은 놀라움보다 여운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지배적이었다.

‘텔레그래프’지는 별 ★★★★와 함께 같은 시간, 코번트 가든 위층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한 로열 발레의 캐스팅들이 비극을 표현하는 데 있어 페리-코르네호의 연기를 참조하길 권했다. ‘가디언’지는 별 ★★★를 주면서 “클라크의 안무 언어가 풍성하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허무한 결말도 야유했다.

페리는 “언제나 ‘메이얼링’에 오르던 열아홉 살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음악이 울리고 파드되가 시작되면 가슴속에 무엇인가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는 그녀는 ‘셰리’가 끝나고 어떤 심사였을까. 청순함과 요염함을 자유로이 오가듯 페리는 앞으로도 연극적 마임과 테크닉 사이의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페리만 분발한다면 육순을 기념해 코번트 가든에서 직접 춤을 추던 제2의 마고트 폰테인을 만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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