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백련사 ‘다산과 혜장,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놓았다네’

꽃별의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함께 걷는 길이 더욱 좋다

다산초당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숲길이 나온다. 만덕산은 부드럽고 야트막하다. 산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숲을 걷는 기분 이다. 차나무가 많다고 하는데 찾기가 어렵다. 천천히 걸으며 이 나무, 저 나무 살핀다. 그러다가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나무를 들여다보니 작은 잎사귀가 참새 혓바닥 같다. 반짝거리면서도 매우 보드랍다. 아마도 이것이 차나무인가 보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니 지천에 차나무가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이것이로구나. 차나무가 뭔지 모를 때는 하나도 안 보이더니, 알고 나니까 차나무만 보인다. 숲에는 대나무도 있고, 동백나무도 있다. 젖은 숲길은 향기롭다. 나무들이 기뻐하는 냄새다. 끼이익 소리를 내는 새들만 분주할 뿐 숲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다산 정약용과 학문, 철학 그리고 차를 나누던 벗, 혜장선사에게 가는 길. 둘은 함께 걷기도 하고, 서로를 향해 걷기도 했을 것이다. 혼자 걷는 것과 둘이 걷는 것은 전혀 다른 길이었을 것이다. 처음 스페인의 카미노를 혼자 걸을 때, 800킬로미터 길은 고단했다. 혼자 먹는 밥이 싫어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밤새 끙끙 앓았다. 낯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싫어 먼 산을 보며 걸었다. 그래도 다 걷고 나서는, 길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울었다. 혼자 걷는 길은 외로웠다. 두 번째 카미노는 동생과 둘이었다. 동생은 내 배낭과 자기 배낭을 앞뒤로 메고도 환하게 웃었다. 끝없이 이어진 이글거리는 땡볕 속에서 지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바보 같은 춤을 추기도 하고, 비 오는 날 밀밭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 아래 앉아 음악을 나눠 듣기도 했다. 잘 먹었고, 아팠다가도 금세 나았다. 세상에 대한 경계를 풀고 두려움을 극복해갔다. 길 끝에서 까매진 서로의 얼굴과 단단한 팔다리를 자랑스러워했다. 함께 걷는 길은 행복했다. 다산에게 혜장선사는 얼마나 큰 존재였을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쁨의 존재였을 것이다. 혜장선사에게 다산은 극진히 존경하는 스승이었다. 고집 센 혜장선사에게 다산이 ‘자네는 너무 고집이 세니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순 없겠는가?’라며 충고를 하자, 스스로 아암(兒 庵)이라 불러 다산의 뜻을 따랐다. 둘은 그렇게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티끌세상 전혀 생각 없네
혜일 ‘백련사’ 중

백련사는 천년을 두고 내려온 고찰이다. 높은 곳에 있지 않아 편안하게 닿을 수 있는 절이다. 산에 파묻혀 있지도 않고, 산을 반듯하게 깎아서 만든 것도 아니다. 백련사는 강진 땅을 닮았다. 만덕산 자락에 나지막이 앉아 있다. 나는 절을 좋아한다.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 단정함… 그리고 대웅전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평화로움 같은 감정이 좋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앉아 있다가 문득 돌아보면, 부처가 너그러운 웃음을 띠고 마음을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삼천 배를 올리는 불자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한없이 엎드린 그 등 뒤로 느껴지는 간절함은 나를 겸손하게 한다. 백련사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았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작은 오솔길, 그리고 백련사 주변에는 1500그루에 달하는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그리고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향긋한 비자나무 냄새와 커다란 동백나무의 묵직함이 오래된 사찰을 더욱 깊어 보이게 했다. 나무 동굴을 이루고 있는 7미터 크기의 동백나무를 보면서 꼭 동백이 필 때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붉은 꽃이 떨어진 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했다. 백련사 안뜰에 들어가기 전에 배롱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작은 잎사귀 하나 남지 않은 나무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결혼하기 전 살던 집에 아빠가 나를 위해 심어준 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하나는 벚나무고 또 하나가 배롱나무다. 벚나무는 엄청 커서 해마다 4월이면 눈부신 봄을 선물받는다. 배롱나무는 더디게 컸다. 그래도 작은 몸으로 부지런히 꽃을 피웠다. 언젠가 아빠랑 등산하던 중에 아름다운 배롱나무를 보며 나무 이름을 물었다. 그때 ‘배롱나무’라는 이름을 듣고 괜히 웃음이 났다. “메롱나무?”라며 한바탕 깔깔거렸다. 그러고 또 한참 지나서 붉은 꽃이 핀 배롱나무를 봤다. 그때도 이 꽃나무가 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때 처음 배롱나무가 백일홍을 피 운다는 걸 알았다. 꽃이나 잎이 하나도 없을 때도 눈에 띄게 아름답고, 꽃이 피면 도저히 그냥 스쳐갈 수없이 아름다운 나무란 것도 알았다. 그런 것이 연분일 것이다. 결국 집에 배롱나무를 심었으니. 하얗게 살이 드러난 나무를 등지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가파르지만 짧은 계단을 올라가니 다포 양식의 두꺼운 지붕에 엄청난 기운을 뿜는 대웅보전 현판이 보인다. 다포 양식이란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건축양식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기와와 기둥 사이게 나무 장식을 몇 겹을 더 쌓아 화려하게 만든 것이다. 건물 아래에서 보면 그 무게감에 절로 목이 움츠러든다. 그리고 대웅보전 현판은 어디서 본 현판보다도 강렬했다. 건물에 비해 크게 만든 현판이기도 했고, 두 개의 판에 글자를 새겨 양쪽으로 배치한 이유도 있겠지만, 원교 이광사의 엄중한 글씨체에는 왠지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산과 혜장, 그들의 우정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놓았다네
-다산 ‘산으로 가자꾸나’


▲ 견월첩

다산과 혜장의 우정은 견월첩이라는 책을 통해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다산이 혜장과의 교유를 기리고자 서로에게 쓴 시와 편지, 대화를 담은 책이다. 혜장이 오겠다는 기별을 하면 ‘옷깃 떨쳐 가파른 언덕’을 넘고, ‘이따금 풀 섶 사이 열매도 따’면서, 또 ‘바위틈의 샘물도 자주 마시며’ 기다리다가 ‘흰 베옷 적삼을 나부끼면서 내려와 반갑게 맞이’했다고 적었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구구절절하다. 혜장은 다산보다 열 살이나 어렸는데도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혜장은 어릴 때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그 총명함과 높은 학식으로 30세에 대흥사 주지가 되었다. 그만큼 도도하고 강직했을 것이다. 고집이 센 혜장이 다산을 만나 ‘임자 만났다’고 표현했으니, 둘의 인연이 보통은 아니다. 다산은 혜장에게서 불교와 차에 대해 배우고, 혜장은 다산에게서 유학과 주역에 대해 배우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불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하는 승려가 유학에 심취하는 것에 대해 다른 승려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혜장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서 입문한 불교에 대한 의문과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한탄하며 술을 마시다 결국 술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혜장을 잃은 다산의 슬픔과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 다산이 차를 사랑 하게 되어 혜장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담은 ‘걸명소’라는 글이 있다. 장난기 섞인 편지에 흐르는 아름다운 우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나그네는 근래 차 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중략)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이오.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몰래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품 주소서.

꼭 연분이기를

우리 전통 가곡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첫째, 숨이 넘어갈 듯 이어지는 호흡에 놀랐을 것이고 둘째,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 내용에 답답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전통 가곡이란 그런 음악이었다. 가요나 팝을 들을 때도 가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가곡의 그 웅얼거리는듯한 발음이 좋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가사를 읽어보고 나서 천천히 음미하는 노래는 그 전에 듣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된 다. 가곡이란 관현 반주에 맞추어 남자, 여자, 혹은 남녀가 함께 부르는 음악이다. 6~7분가량의 길이로, 시조를 5장 형식에 맞춰 부른다. 옛것으로 치면 가장 빠른 것들이 살아남아 전해지는데도, 지금의 속도로 보자면 굉장히 느리다. 단 세 글자를 부르는 데 1분이 걸리기도 하니 말이다. 다산과 혜장의 아름답고도 애틋한 우정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 흐르던 것이 우리 가곡이었다. 여창가곡 우조 우락 ‘바람은’. 처음에 가사를 알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황홀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느리고, 조금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선율이 품고 있는 내용이란!

바람은 지동 치듯 불고, 궂은비는 붓듯이 온다
눈 정에 거룬님을 오늘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첩처서 맹서 받았더니
이 풍우 중에 제 어이오리
진실로 오기 곧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우리 조상들의 표현 방식이 참 은근하다. ‘눈 정에 거룬님’은 눈으로 서로 정을 나누었다는 뜻이다. 그런 임을 만나자고 서로 굳은 약속을 했는데 땅을 흔드는 바람과 궂은비가 내리니,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한 편으로 체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속을 지켜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연분일 것이라는 마음이다. 기다리는 동안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 ‘연분’이기를…. 우리는 모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붉은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을 들 은 적이 있다. 어느 날 문득 그 끈이 보인다면 그 끝을 잡고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 끈을 붙잡지 않으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으니까. 그 끝에 나의 다산이, 또 여러분의 혜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는 담양 죽녹원에서 이야기를 전합니다.)

글 꽃별

해금 연주자 꽃별은 경계를 허무는 평화로운 음악을 꿈꾼다. 해금으로 세상의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편, 국악방송 ‘꽃별의 맛있는 라디오 ’를 통해 우리 음악을 전하고 있다
사진 더 트래블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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