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러 재열풍, 왜?

2016년, 말러의 교향곡들이 귀환한다. 그의 음악을 찾는 청중의 심리를 문화연구적으로 분석해본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말러가 사망한 191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그의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총 2천 2백회 이상 연주되었다. 이 수치는 말러와 비슷한 시기의 작곡가 중에서는 시벨리우스와 R. 슈트라우스를 제외하고 가장 높다.
 
하지만 말러라면 이를 갈 정도로 싫어하는 이도 있었다. 토스카니니와 월터 담로슈는 그의 교향곡을 장황하다며 깎아내렸고, ‘타임’지는 ‘벌레 같은 말러’라는 제목으로 ‘음울한 멜랑콜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욕을 잃을까 두렵다’고 했다. “교향곡이란 세계의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한다”고 한 말러의 언급과 달리 영국에선 ‘억지로 짜 맞추어진 기색이 역력하며 번뜩이는 영감이 부족하다’며 그의 음악을 멀리해야만 한다고 했다. 
 
 

 
 
2016년, 말러의 화려한 귀환
 
하지만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 외친 말러의 뜻대로 2015년부터 그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었다. 2015년 말에는 말러 교향곡 중 1번과 2번이 연이어 연주됐다. 요엘 레비/KBS교향악단은 제700회 정기연주회로 교향곡 2번 ‘부활’을(11월 20일), 콜롬비아 출신의 지휘자 안드레스 에스트라다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은 교향곡 1번을(11월 21일),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와 말러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마르쿠스 슈텐츠는 서울시향과 교향곡 1번(12월 4일)을 선보였다.
 
2016년에도 말러의 교향곡이 눈에 띈다. 부천필과 전곡 연주로 국내 말러 붐의 ‘종가’를 지었던 임헌정은 코리안심포니와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협연 유동직), 교향곡 1번을(1월 22일)을 선보인다. 정명훈/서울시향은 교향곡 6번으로 말러 사이클의 감동을 다시 전한다(1월 16·17일). 특히 2016년의 서울시향 공연 중 객원지휘자와 말러와의 만남이 눈에 들어온다. 엘리아후 인발은 교향곡 7번을(1월 18일), 로타어 차그로제크는 ‘대지의 노래’를(협연 다니엘 키르히·알리사 콜로소바, 5월 28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는 말러 1번을(7월 8일) 선보인다. 그리고 리카르도 무티/시카고심포니는 교향곡 1번을(1월 28일), 요엘 레비/KBS교향악단은 교향곡 4번(수잔 그리튼, 7월 22일)을 연주한다. 2015년에 서울과 수원에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선보였던 김대진/수원시향은 하반기부터 말러에 도전한다. 홈그라운드인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교향곡1번, 피아노 4중주,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협연 최현수, 10월 13일)와 교향곡 3번(12월 22일)을 선보일 예정이다. 2016년은 한마디로 말러의 화려한 ‘귀환’이다.
 
 
 
무대와 스크린에 안착한 말러
 
말러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BBC심포니의 교향곡 전곡 사이클(1959~1961)과 뉴욕 필의 사이클(1961~1965)은 새로운 유행을 위한 시험 무대였다. 번스타인의 전곡 녹음 프로젝트,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악장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한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대중·예술·산업이 맞물려 있는 영화의 파급력은 말러 유행에 일조했다. 일례로 국내에서 쇼스타코비치 재즈모음곡 2번 중 ‘왈츠 2’는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을 타고 희미하게 흘러들어와, 김대승의 ‘번지점프를 하다’(2001)의 한 장면으로 안착하며 대중의 가슴에 명곡으로 남지 않았던가. 1990년 이후 제작된 영화 중 적어도 스무 편의 작품은 말러의 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차용했다. 그중 다수는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악장이었다. 그 외에 우디 앨런의 ‘부부 일기’(1992)는 교향곡 9번을,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2003)는 뤼케르트 가곡 중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를, 알폰소 쿠아론 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삽입했다. 
 
영화음악가이자 지휘자 존 모체리는 “말러의 음악이 코른골트를 비롯한 후배 유대계 음악가들에게 이어졌고, 이들이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로 이주하면서 영화음악계가 말러의 음악어법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과장된 분석일 수 있겠지만, 그의 말대로 할리우드 작곡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콜트·맥스 스타이너·프란츠 왁스먼·앨프리드 뉴먼은 말러의 음악에서 장편영화에 어울리는 음악 언어를 발견했다. 특히 코른콜트가 배우 에롤 플린의 영화에 붙인 음악부터 ‘스타워즈’로 유명한 존 윌리엄스의 음악까지 ‘말러의 방언’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미국영화협회가 선정한 스물다섯 편의 ‘위대한’ 영화음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말러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이다. 말러 교향곡 10번과 닮은 동기가 ‘인터스텔라’(2014)에서도 들려왔으니, 말러의 ‘영화음악 이펙트’는 현재도 기능하고 있다. 
 
 
 
한국에 안착한 말러
 
국내 말러 연주 붐의 ‘원조’격은 1970년대 국립교향악단을 이끌었던 지휘자 고(故) 홍연택이다. 교향곡 3번과 8번을 국내 초연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국내 악단에 말러 연주 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부천시향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 시리즈 때문이었다.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휘를 맡았던 임헌정의 건강 악화로 약 1년 간 공백이 있기도 했지만, 말러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연주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국내 클래식계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당시 클래식을 포함하여 문화 전반은 일종의 ‘긍정적’ 카오스 상태였다. 하나의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문화적 욕구는 커져만 갔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큰 중심보다 작고 다수의 중심들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립하던 이념에 대한 압박감은 줄고, 분단과 분배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문화적 욕망에 몰입했다. 
 
관객으로 대변되는 수요층의 저변이 이러한 분위기였다면, 음악가들에게 1990년대는 ‘자신감’이 형성되고 분출된 시기다. 기량 면에서 이른바 본토 연주가들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근대화 이후 세대(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정립된 근대적 교육제도의 수혜를 받은 세대)의 연주가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보다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기본 레퍼토리가 되는 작곡가들의 소나타·협주곡을 ‘전곡 연주’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전곡 연주를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기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장한 세대였다.
 
한편 기악과 성악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외유학을 통하여 레퍼토리와 기교를 갖춘 전문음악가들이 국내에서 활동했던 반면, 지휘는 이러한 발전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하지만 전(前)세대에 비해 해외유학을 통해 전문적 훈련을 받고 지식을 습득한 젊은 지휘자들은 1990년대 음악계에 점점 안착해갔고, 그들은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고전 레퍼토리가 다수를 차지한 플레이리스트에서 벗어나고자 모험적인 레퍼토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 작곡가를 선호·애호하는 이들을 베르디안, 바그네리안 등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이들은 ‘구별짓기’라는 즉, 같은 클래식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작곡가·연주가·오케스트라를 통하여 서로 ‘다른’ 문화적 취향을 확인하고 각자의 음악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음악부족들이다. 이러한 심리는 감상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와 연주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말러카드란 1990년대 한국음악계에서 지휘자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적 취향을 내세울 수 있는 ‘구별짓기’의 무기가 아니었을까. 흔히 ‘하모베(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우던 이들과 달리 말러의 연주·감상·소비는 남과 다른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확실한 레퍼토리였던 것은 분명했다. 
 
당시 말러는 ‘금기’의 레퍼토리는 아니었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함부로 내딛을 수 없던 영역이었다. 그곳에 임헌정과 부천필은 말러호를 띄운다. “연주하기도 듣기도 어려운” 경제성 제로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처음 대장정을 발표했을 때는 임헌정과 부천시향의 행보가 무모하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베토벤·차이콥스키·브람스·드보르자크 위주의 레퍼토리에 안주했던 국내 악단들에게는 크나큰 충격과 도전의식을 일깨워주었다.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코리안 심포니 등 내로라하는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말러 교향곡에 매진하며 ‘말러 붐’이 조성되었다. 2002년에는 해방 후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는 말러 교향곡 6번이 두 번이나 KBS교향악단과 부천시향에 의해 연주되었다. 당시에 KBS교향악단은 지휘자 드미트리 기타옌코(1999~2004)가 이끌던 시절이었다. 
 
해외 무대에서 말러 교향곡을 즐겨 연주하던 정명훈은 서울시향 부임 후, 베토벤·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에 이어 말러 전곡 연주 시리즈를 야심작으로 내놓았다. 서울시향은 말러 사이클을 완주한 후에도 매 시즌마다 말러 교향곡을 빼놓지 않고 있다. 
 
 
 
관객의 듣는 귀가 달라졌다
 
한국에서 2000년 초부터 일기 시작한 말러 붐. 말러는 이제 ‘언젠가 도전해야 할 레퍼토리’가 아니라, 베토벤 교향곡처럼 평소에도 자주 연주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말러를 대하는 관객의 자세도 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말러 교향곡 1번 ‘거인’과 교향곡 5번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하지만 말러는 아직도 늘 어려운 작곡가, 레퍼토리로 분류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말러에 환호하는가. 여기서 ‘우리’란 대부분 지휘자와 연주자였다. 수많은 기사와 평론과 학술연구도 연주자 중심에서 ‘말러적인 것’을 분석해왔다. 그래서 이 글에선 ‘왜?’라는 질문을 감상자이자 수요자인 청중의 심리에 던져보고자 한다. 왜? 우리(감상자)는 말러를 기다리고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일단 지금의 청중 수준이 말러의 음악적 문법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전제가 깔린다. 
 
큰 주제 하에 여러 음소재들이 보기 좋게 배열되어 ‘원근법’의 관점으로 음악을 듣는 것과 달리, 말러의 음악은 이러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없다. 말러의 교향곡은 앞서 든 예처럼 “억지로 짜 맞추어진 기색이 역력”한 음악이며, 한 작품 또는 한 악장에는 낭만적 서정과 아이러니, 비극과 유머, 몰아침과 비움, 절망과 환희를 느낄 수 있는 상반된 기법들이 교차·상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차르트·베토벤의 음악을 바라보던 ‘원근법’과는 다른 시선이 감상에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대미술품을 감상하면서 그 속에서 묘사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감상태도와 달리, 분열의 묘미를 느끼는 게 말러의 음악을 듣고 수용하는 자세와 더 비슷하다고 할까. 
 
오늘날 말러를 이해하고 보편적 레퍼토리로 만들어가는 청중의 노력과 시선은, 난해하기만 했던 현대미술을 수용하는 시선과 닮아 있다. 몇 해 전부터 국내에 적극적으로 유입되어 시각문화를 차지하기 시작한 현대미술 문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視線)은 물론 음악을 듣는 청선(聽線)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즉, 반(反)원근법을 추구한 현대미술을 수용하는 자세가 청각에 의한 감상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환경 속에서 말러 교향곡의 수용과 소비에 대한 힌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누군가는 현대음악은 현대미술처럼 수용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감상의 동선을 주체적으로 정하면서 관람하는 미술 감상과 달리 음악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음악이 흐르는 절대시간 안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감상 방식을 적용해보았을 때, 현대미술은 난해한 지점에서 눈을 돌리면 되지만 현대음악은 그럴 수가 없다. 문화에서 미술과 디자인이 먼저 수용되고 음악이 후에 수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말러의 음악을 국내에 처음 선보일 때, 여러 음소재를 모아 꿰맨 말러 특유의 ‘봉합선’에서 음악적 ‘껄끄러움’을 느꼈을 청중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껄끄러움’이 ‘매끄러움’의 이미지로 바뀌는 데에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역할이 컸다. 어쨌든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본격적인 연주로 말러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임헌정과 부천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사이클을 계기로 ‘말러가 어느 선까지 수용되고 즐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시장에 던졌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 크리스토프 에셴바흐/휴스턴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말러 ‘천인 교향곡’. 437명이 함께 했다
 
숭고를 맛보고 싶은 청중
 
말러는 백 명이 넘는 대규모 악단을 위한 음악을 썼다. ‘천인 교향곡’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행사로 시드니올림픽공원의 슈퍼돔에서 연주되며 월드컵 전야에도 울려 퍼진 적이 있다. 
 
작품의 크기가, 내용 그 자체가 될 때가 있다. 관객들은 그 크기에서 남다른 쾌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태양의 서커스’의 대형천막극장, 장예모의 실경극(實景劇)에서 실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대형무대, 수면 위에 대형가설무대를 세워 오페라를 선보이는 브레겐츠 페스티벌 등. 크기를 지향하는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새로운 미학적 효과를 산출한다.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CG를 사용하는 영화, 초대형캔버스를 이용하거나 자연의 시공간을 그대로 이용하는 ‘대지미술’, 평범한 일상적 사물들의 크기를 비정상적일만큼 확대함으로써 그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낯선 사물처럼 느끼게 하는 전시효과와 표현기법들…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제시하는 ‘규모 자체’가 예견할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그 이면에는 오늘날의 관객이 3B(Big·Broad·Blockbuster)를 선호하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관객은 예술에 대한 차분한 관조가 아닌, 현실세계의 인식수준을 뛰어넘어 압도당하며 ‘두리번거리는 관람’과 ‘놀람’을 원한다. 이러한 3B 선호 욕망과 초대형작품이 구현할 ‘원더랜드’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리적·언어적 논리를 전복하는 방식의 구현으로 채워진다. 이런 점에서 무대크기, 동원인력, 효과가 오늘날 어필할 수 있는 작품과 미학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교향곡이란 세계와 같으며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한다’고 했던 말러의 말처럼, 말러의 세계(=교향곡)는 관객들의 3B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음악적 형식과 편성이 지닌 ‘크기’에서 오는 전율을 선사한다. 그 편성과 사운드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비인간성’을 느끼거나, 인간의 힘으로 조율불가능한 모든 요소가 제어되며 ‘거대한 크기’의 음악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질 때, 우리는 현대사회의 미학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를 이해하게 된다. 
 
숭고에 대해 논했던 철학자 칸트의 미학은 균열에 대한 미학론이다. 그 균열된 곳으로부터 개념적 사유가 포괄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거대한 무엇이 튀어나올 때, 그것은 숭고(崇高)의 체험이 된다. 반면 개념적 사유가 자유로운 상상력의 유희를 통하여 서툴게나마 그 벌어지는 틈을 메우거나 얽어맬 때가 있다. 그때 느끼는 안도감과 즐거움이 미(美)의 체험이 된다. 숭고와 미의 체험, 양자 사이의 차이는 그 균열이 무한정 벌어지는가 아니면 벌어지다가 마는가의 차이에 있다. 말러의 음악은 숭고미를 담고 있으며, 관객은 그것과 마주하고픈 3B 욕망에서 말러를 기다리는 것이다. 
 
‘모차르트 이펙트’가 머리를 좋게 하려는 어린 학생들을 겨냥한 것이라면 ‘말러 이펙트’는 마음 두지 못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현대인의 마음 한 구석을 어루만져주는, 성인용 음악이다. 그런데 다시 묻는다. 왜 말러이며, 왜 지금 말러일까? 아마도 자신감과 나약함이 서로 맞물려 있던 세기말 빈의 문화적 도가니가 우리 시대의 그것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2016년은 말러가 귀환하는 해이다. 그의 귀환을 재촉하는 우리 시대와 관객의 무의식은 진짜 어떤 모습일까? 올해도 말러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인 객석을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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