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백성희

한국 연극사를 빛낸 도전의 배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2월 1일 12:00 오전

2016년 1월 11일 유난히 쌀쌀한 날씨에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그렇게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운집한 군중은 한마음으로 한 사람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보았다. 어떤 이들은 숙연했고, 어떤 이들은 놀라워했으며, 어떤 이들은 울었고, 어떤 이들은 울음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보내려고 하는 이는 어쩌면 우리 시대에는 다시 탄생할 수 없는 배우였기에, 그러한 배우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된 상황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백성희는 우리 곁을 떠났다.


▲ ‘3월의눈’(2012)

백성희만의 길

작금, 한국 연극의 제도와 환경 하에서는 백성희 같은 배우는 다시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백성희와 같이 오랫동안 연극에 전심전력하는 배우로, 그것도 각광받는 배우로 남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굳힌 ‘어린 백성희’는 학업도 포기하고 연기 수련에 매달렸으며, 그 과정에서 집안의 ‘내침’도 감수하던 견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배우를 ‘광대’로,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풍조는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남아 있으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가 되는 사례는 지금이라도 생길 수야 있겠지만, 그녀처럼 오직 한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는 배우로 사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그녀는 걸었고, 그것도 70년을 넘게 걸어왔다. 백성희처럼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끝까지 가기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배우, 특히 연극배우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다시 찾기 어려운 사표일 수밖에 없다. 모든 배우가 거울처럼 자신 앞에 세우고 항상 그 이지러짐을 비추어야 하는 남다른 기준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백성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간직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스타일은 외적으로는 ‘리얼리즘’이었고, 내적으로는 ‘기본기’였으며, 그녀의 말대로 하면 ‘정석’이었다. 그녀는 늘 기본기에 충실하고자 했고, 배역에 대한 이해를 앞세우는 스타일이었으며, 정확한 길을 원하는 꼿꼿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까지도 인정하는 대범한 풍모를 보일 수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의외로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명하게 가늠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혹은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서는) 늘 거리를 둔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녀의 연기 비밀 중 하나는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집중했고, 그 한 분야로 자신의 역량을 몰입할 줄 알았다.


▲ ‘집에서의 명상’(1961)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서

그렇다면 그녀가 감당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해야 할 때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의 해석을 우선했다. 그녀가 수행하던 역할 중 한국 연극사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만선’은 소중한 사례가 되어줄 것이다. ‘구포댁’을 맡았을 때, 그녀는 바닷가 무지랭이 촌부(村婦)가 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촌 여인의 거침과 경박함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냉정한 판단이었기에, 그녀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녀는 너덜거리는 광목천 같은 ‘구포댁’의 겉모습을 존중하되, 그녀의 말씨나 마음씨까지 시골 촌부로 가장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구포댁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집중했다. 구포댁이 지녔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최대한 인정하고(그녀가 절망하고 실성했을 때조차), 그 캐릭터가 지닐 수 있는 최대한 아름다운 맵시와 말씨도 함께 살려내고자 했다. ‘아름다운 구포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구포댁은 젖을 드러내고 미친 여자처럼 여기저기를 헤매는 볼썽사나운 여인일 테지만, 백성희는 그녀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보이도록 꾸며냈다.

이러한 캐릭터 구축 사례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도 확인된다. 스탠리의 강간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블랑쉬이지만, 그녀에게서 피어나는 삶의 마지막 온기를 백성희는 외면하지 않았다. 블랑쉬를 정신병원으로 호송하는 의사를 구원처럼 해석한 것이다. 그 구원은 블랑쉬의 다른 면을 보게 만들었다. 블랑쉬는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마지막 긍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과 창조 작업은 백성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삶을 향한 아름다움의 추구에서 연원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백성희가 살아야 했던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험난한 시절이었다. 배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가의 체제가 바뀌었고(독립), 어수선한 시대를 넘어서 간신히 예술 기반을 만들자 전쟁이 발발했다(6·25 한국전쟁). 전쟁 이후에도 혼란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 혼란 속에서 연극계는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념 대립도 있었고, 연극계의 패권을 둘러싼 보이지 않은 대립도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극단에 안착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도 보이지 않는 전쟁은 남아 있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일들은 여러 가지였지만, 한국 연극사의 중요한 흐름과 관련된 한 가지 논점이 늘 뒷전으로 물러나므로 그 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그 논점과 관련하여 백성희의 위상을 살피는 일은 그녀의 인생과 연극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백성희는 스스로 데뷔작을 현대극장의 ‘봉선화’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봉선화’ 출연 이전에 견습 단원으로 빅터무용연구소에서 연기 수련을 받았고, 그 사이에 빅터가극단(훗날 반도가극단)의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출연이 확인되는 작품으로 ‘심청전’과 ‘에밀레종’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백성희가 ‘심청전’에서 자신의 연기가 각광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밝히면서도, 막상 그 공연을 데뷔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백성희가 생각하는 어떠한 기준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빅터가극단 시절을 ‘연습(생) 시절’로 생각했지, ‘진정한 연극’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을 지나면서 한국 연극계는 여러 가지로 분열되었다. 당시로서는 ‘좌익’과 ‘우익’이 대립이 가장 큰 대립이었고, 이 대립 내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오는 ‘신파극’과 ‘신극’, 혹은 ‘대중극’과 ‘연구극’(주로 신극), 나아가서는 연극과 악극, 혹은 연극과 영상(영화, 텔레비전)의 암묵적 가름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극을 보는(제작하는) 서로 다른 신념들은 상대 작품에 대한 폄하와 반발을 양산했다. 이후 남한의 연극계는 신극을 위주로 하는 사실주의 연극 대 연극 도입기에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대중극 진영으로 양분되면서 정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백성희는 1940년대 대중극 진영에서 훈련하고 각광 받는 여배우로 성장하는 도중에, 신극 진영으로 이적하여 본격적으로 연극의 길로 들어선 배우였다. 그녀가 최초 가입한 빅터가극단이나 해방 이후 소속되었던 낙랑극회 등은 정통 신극주의자들과 다소 거리를 극단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른바 대중 극단의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어, 당시 정통 연극의 길과는 거리가 있었던 단체로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훗날 정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정통 연극의 길은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로부터 시작하여 신협을 건너 국립극단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맥락이었고, 다소 과장을 섞어 말하면 이 맥락에서 벗어난 흐름은 정통의 흐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시절이 존재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편견 속에서도 예외적 사항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정통의 흐름을 고수했던 이해랑도 고협과 낙랑극회 시절을 거쳤고(각각 심영과 황철이 운영하던 대표적인 대중극단), 그 선배 격인 유치진도 결과적으로 대중극 진영의 배우들을 아우르는 현대극장이나 국립극단(1950년 설립)의 창립을 반겼다는 점이다. 연극은 참여하는 사람만큼 다양한 색깔과 이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협동 작업이므로, 어떠한 흐름과 섹트만이 정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30~1960년대는 이러한 의식이 비교적 완강하던 시대다. 백성희 역시 이러한 시대를 관통해야 했기 때문에, 정통과 맥락을 중시 여기는 풍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니 그 시절에는, 그 어떤 배우와 연극인도 자유로울 수 없을 만큼 이 가름선은 완고했다.

연극사적으로 백성희의 위치가 주목되는 이유는, 연기 수련 과정과 활동 범위를 고려할 때 그녀가 대중극 진영과 신극 진영의 장점을 취한 배우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연극사는 까맣게 망각하고 말았지만, 2016년 1월 한국 연극계는 한동안 무시당하곤 하던 대중극 진영으로부터 착실하게 연기 연습을 받았고, 두 진영을 넘나들면서 연기를 했으며, 그럼에도 신극이라는 지고 무상한 한 장르를 끝까지 고집하던 ‘마지막 여배우’를 떠나보낸 것이다. 과거와 같은 연극사의 분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고 불필요한 이념 대립과 계파의 갈등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며 연극이라는 장르가 다시 유일한 연기의 장르가 되지 않는 한, 어쩌면 이러한 백성희와 같은 이력은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 1999년 ‘한국연극’ 표지

새로운 연극사에서 도전과 개척의 배우로

백성희가 살아야 했던 시대에는 이러한 이해를 온전하게 보존받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력에서 중요한 한 시절은 자타의 시각에 의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야 했다. 이러한 백성희의 초상에는 한국 근현대 연극사의 이지러진 단층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2015년 인터뷰에서, 이러한 견해는 그녀에게 전달되었고 그녀 역시 그러한 주장이 정당할 수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모든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연극은 하나였고, 그 연극은 대중극이 아닌 신극이었으며, 자신은 신극으로 태어나 평생 그 길을 걸어 그 속에서 사라진 배우로 남기를 바랐다. 결국 ‘백성희’는 한길을 걸어온 배우답게 자신이 선택했던 길 위에서 연극과 인생을 마감했다. 그 뜻을 존중한다.

그러니 그 수정과 보완은 결국 ‘우리-남겨진 미래 세대’의 몫으로 남는다. 우리가 새롭게 써나가야 할 연극사에서 백성희라는 존재가 ‘낀 존재 ‘In between’’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연극과 악극, 신극과 대중극, 주류와 비주류, 정통과 외곽이라는 대항 범주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배우였고(그래서 나는 어떤 작품이든 최선을 다해 출연하려고 했던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며 그래서 더욱 그녀의 선택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연구자가 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남성 위주의 연극계에 도전하고 자신의 입지를 넓힌 여배우로서 위치 또한 자연스럽게 획득한 배우였다. 이러한 그녀의 입장과 위상을 밝히는 것은 ‘백성희’의 참된 의의와 가치를 설명하는 일인 동시에, 지난날의 연극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얻을 것인가는 분별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탄생하기 어려운 배우가 결국 하나의 ‘낀 존재’로부터 출발해야 했고, 그 안에서 선택을 감행(고수)해야 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이 왜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마지막 이유라고 하겠다. 죽음 이후 삶에서도 백성희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확신하는 나만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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