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혁 피아노 독주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1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종말을 알리듯 강하게 내리꽂는 세 번의 D음이 끝났다. 스물네 개의 프렐류드가 끝나자마자 맨 처음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빨갛게 상기된 피아니스트의 얼굴이었다. 열띤 오라와 함께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작곡가와의 극적 교신에 써버린 듯 탈진한 모습의 연주자는, 그럼에도 행복한 모습이었다. 몹시도 추운 날씨, 공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과 임동혁의 만남은 한순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짧은 인생처럼 멋지게 후련했고, 오랜 여운으로 남을 공연이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가 곡해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적어도 나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임동혁의 다른 레퍼토리에서 호불호를 지닌 애호가들이라도, 그의 쇼팽이 다른 연주자들과 다른 차원의 궤도에 들어선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듯하다. 필자의 확신은 그의 능력보다 경험에 더 많이 의존한다. 요컨대 나이를 생각지 않더라도 임동혁만큼 쇼팽의 세계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젊은 연주자를 찾기 어렵다는 의미인데, ‘능력치’와 ‘경험치’가 합쳐진 이날의 피아니즘은 홀가분했고 자유로웠다.

쇼팽의 녹턴을 감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혹은 연주자가 지닌 고유의 음색을 즐길 수도 있고 작곡가 특유의 반음계적 멜로디에 매료당할 수도 있지만, 녹턴 Op. 27-2를 연주한 임동혁의 해석은 이중 어느 쪽에도 가깝지 않았다. 깔끔한 타건은 작곡가가 나타내려 했던 감성을 솔직하고 꾸밈없이 표현할 뿐, 일체의 장식이나 설정이 존재하지 않는 해석이었다. 이어지는 초기작 ‘화려한 변주곡’ 역시 특별했다. 제목은 ‘화려한 변주곡’이지만 화려함보다는 음표들이 빚어내는 작은 프레이즈들의 변화와 드라마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연주였다.

발라드 1번과 ‘뱃노래’는 쇼팽의 대곡들 가운데 그 음악적 실마리를 조리 있게 표현해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곡들이다. 임동혁의 슬기로움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끊김보다는 이어짐을 더 많이 생각한 발라드의 섹션 구분은 작품의 표면을 세련됨으로 확장시켰고, 비르투오소적 표현을 자제하면서 담백한 톤으로 정리한 음색도 정돈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후기작 중 소문난 문제작인 ‘뱃노래’에서는 밝은 음색과 사뿐사뿐 움직이는 템포감각, 통일감이 느껴지는 프레이징 연결을 통해 한층 개운하고 젊은 느낌으로 마무리하는 재치를 보였다.

스물네 개의 전주곡은 그 현란한 색채감이 스물넷을 넘어 마흔여덟, 아흔여섯으로 펼쳐질 수 있는 쇼팽 피아니즘의 꽃이다. 세밀하지만 날카로운 잣대로 시작과 끝맺음을 꾀하던 음반과 달리 좀 더 둥글고 진한 느낌의 펜으로 텍스트를 부드럽게 포용하는 듯 이끌어가는 모습이 신선했다. 깊고 높은 골짜기와 봉우리의 묘사보다는 일관성에 포커스를 맞춰 점진적 변화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의도인 듯, 5·8·16·19번 등 타이트한 기교가 요구되는 곡은 완만한 음상으로 수위를 조절하고, 4·6·15·17 등 녹턴풍 악상은 오히려 드라이한 맛을 첨가하여 균형을 유지했다. 기름기를 제거해 말쑥함과 풋풋함을 드러낸 맨 얼굴의 프렐류드는 말할 것도 없이 개성 만점 재주꾼 임동혁의 30대를 시작하는 새로운 여정의 방향을 제시하는 듯 했다. 흐뭇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중간보고의 자리였다.

사진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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