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다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1835년 러시아령 폴란드 루블린에서 출생
1843년 파리 음악원 입학
1847년 첫 작품 ‘환상적인 대 카프리스’ 출판
1852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작곡
1860년 이저벨라 햄프턴과 결혼
1862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초연
1875년 브뤼셀 왕립 음악원 부임
18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창설

오늘날에는 대체로 작곡가와 연주자의 역할이 나뉘어 있다. 악기를 공부하고 연주자로 데뷔한 음악가들이 전업 작곡가가 된 후에는 연주를 취미로 삼는 경우를 본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두드러진 최근의 현상이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음악가는 일반적으로 작곡과 연주를 병행했다.

분업이 잘되어 있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연주자가 작곡을 병행하던 과거 작품들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크 초기에는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작곡을 하는 경우가 많아 악보를 자세히 그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음악가들의 자필 악보에는 적은 수의 음표만이 존재한다. 음악이 악보대로 간단하지는 않았을 테니, 오늘날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실제로 연주됐을 음악을 추측하여 연주하기도 한다.

18세기에는 악보 출판이 음악가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연주할 수 있도록 악보가 더욱 명확해졌다. 그런데 명확한 악보는 즉흥 연주로 자신의 실력을 뽐내던 당시 상황과 배치됐다. 19세기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자신의 실력을 화려하게 드러내기 위해 악보에 갖가지 기교를 삽입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이탈리아의 파가니니와 벨기에의 비외탕, 스페인의 사라사테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정규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파가니니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롤라를 비롯해 프랑스의 피에르 로드, 노르웨이의 올레 불, 체코 동남부 모라비아의 하인리히 에른스트, 헝가리의 요제프 요아힘 등 19세기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손가락으로 서커스를 하는 곡들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폴란드의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외탕의 제자이자 사라사테의 동료로서, 그의 작품 역시 두 현을 동시에 긋는 주법인 더블스톱과 파가니니에 의해 확산된 왼손 피치카토, 빠르게 현을 교차하며 연주하는 큰 도약 등 수준 높은 테크닉을 요구한다. 20세기의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루지에로 리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들을 ‘손가락 절단기(finger breakers)’라 부르기도 했다.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밝고 화려한 데 반해, 특이하게도 비에니아프스키의 음악은 슬라브적 우수가 깃든 중후한 사운드를 지닌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파가니니를 들을 때처럼 화려한 기교에 심취하기보다는 음악이 지닌 정서와 감성에 집중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 13세의 비에니아프스키

혼란기 폴란드에서 태어난 신동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는 러시아령 폴란드 의회가 통치하던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1795년 시작된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의 분할통치로 지도상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1831년 독립을 위해 혁명 정부가 봉기를 일으켰지만 참담하게 실패했고, 많은 폴란드인이 타국으로 망명했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난 것은 그 직전이었으며 고국의 비참한 소식을 들은 그는 그해에 연습곡 1권 마지막 곡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에니아프스키가 태어난 때는 봉기 후 4년이 지난 뒤였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에 소질을 보였다. 여덟 살이었던 1843년에 타국의 학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3년 만에 1등상을 받고 졸업할 정도의 신동이었다. 졸업 후에는 두 살 터울 동생인 피아니스트 요제프 비에니아프스키(Józef Wieniawski)와 함께 많은 연주회를 가졌으며, 1847년 그의 기념비적 첫 작품 ‘환상적인 대 카프리스(Grand Caprice Fantastique)’를 출판했다.

그런데 1849년 바르샤바에서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작곡가였던 스타니스와프 모니우슈코를 만나 자극을 받고 다시 파리 음악원으로 돌아가 화성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일 년 후, 비에니아프스키는 더 이상 작곡 수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음악원을 그만두었다. 그의 작곡 공부는 이것이 전부였다.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와 동생 요제프 비에니아프스키

러시아 시기의 바이올린 작품들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 실력이 세계 전역에 알려지자, 그는 최고의 연주자로 환영받았고, 10대 후반이던 1851년부터 1853년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연주 활동을 했다. 반주자는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시테인(Anton Rubinstein)이었다.

연주자로서 바쁜 와중에도 작곡에 대한 열의는 더욱 불타올랐다. 비에니아프스키는 러시아 체류 동안 14곡이나 되는 바이올린 작품을 완성했다. 이 중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1852)과 ‘모스크바의 추억’(1853)이 포함되어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상당한 기교와 슬픔을 머금은 아름다운 표현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화려하고 장대한 1악장에 비해 빈약한 2악장과 평범한 3악장의 심한 불균형으로 완성도 높은 곡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모스크바의 추억’은 비에니아프스키가 모스크바 황실에서 보내던 화려한 날들을 추억하며 작곡했다. 러시아의 가곡 작곡가 알렉산드르 바를라모프(Aleksandr Varlamov)의 ‘붉은 사라판’과 ‘말에 안장을 얹고’ 두 곡의 서정적인 선율을 주제로 차용했다.

런던의 베토벤협회에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했다. 이곳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아힘과 하인리히 에른스트, 그리고 첼리스트 알프레도 피아티가 그의 동료로 함께 활동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Légende)은 이즈음 작곡됐다. 곡은 어스름한 중세의 옛 성을 보는 것과 같은 회상적인 꿈을 그린다. 작곡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연에 따라 1860년경으로 추정된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영국인 이저벨라 햄프턴과 약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햄프턴의 부모는 그를 반대했고, 이에 비에니아프스키는 ‘전설’을 작곡해 그녀의 부모에게 들려주었다. 곡을 듣고 감동받은 그들은 마음을 바꾸었고 결국 비에니아프스키는 1860년에 햄프턴과 결혼했다. 음악으로부터 얻은 감동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비에니아프스키는 루빈시테인의 초청으로 1860년부터 1872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했다. 그는 루빈시테인이 1862년에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으며, 러시아 음악협회의 오케스트라와 현악 4중주단을 이끌었다. 이 기간 비에니아프스키가 러시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러시안 보우 그립’이라 불리는 러시아 스타일의 보잉 기법은 ‘비에니아프스키 보우 그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소위 ‘악마의 스타카토’라고 불리는 연주법을 보다 쉽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음악원 개원과 동시에 입학했던 차이콥스키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시기 비에니아프스키와 루빈스타인은 최고의 콤비였다. 둘은 1872~1874년의 미국 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뛰어난 낭만시대 협주곡 중 하나로 인정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작곡됐다. 작품은 1856년에 작곡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해가 흐른 1862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과 루빈시테인의 지휘로 초연됐다. 그러나 초연된 곡은 여전히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작곡을 시작한 지 14년이 지난 1870년에야 완전한 완성을 보았다. 출판은 이로부터 9년이 지난 1879년에 이뤄졌는데, 그는 악보에 ‘나의 존경하는 친구 파블로 데 사라사테에게’라는 문구를 적었다. 이 곡을 헌정 받은 사라사테는 비에니아프스키와 가까운 친구이자 그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에는 고난도의 기교가 쉴 새 없이 등장한다. 빠른 스타카토와 옥타브를 넘나드는 도약, 현들의 빠른 교차, 반음계적 글리산도, 다양한 하모닉스 등 활 테크닉에 있어 상당한 민첩성을 요구한다. 이에 대비되는 2악장 로망스는 비에니아프스키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손꼽히며 단독으로 연주될 정도로 청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3악장은 ‘집시풍으로’(a la zingara)라는 지시어가 쓰였는데, 이는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 폴란드의 비에니아프스키 기념 우표와 100 즈워티 동전

초라한 말년, 죽음 후 부활한 명성
1875년 앙리 비외탕이 건강상의 이유로 브뤼셀 왕립 음악원의 교수 자리를 잠시 비우자, 비에니아프스키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지난달 소개했던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가 이곳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비에니아프스키는 브뤼셀에서의 삶을 시작한 후 점점 몸이 약해졌다. 술을 항상 끼고 사는 술고래인 데다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는 웬만한 연주회도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심해졌고, 급기야 1878년 11월 11일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베를린 초연 중에 심장 발작으로 연주를 멈춰야 했다. 때마침 베토벤협회 시절 동료였던 요아힘이 연주회에 참석해 있었다. 그는 청중에게 대신 사과하고 직접 바흐의 샤콘을 즉석에서 연주했다.

비에니아프스키에게 건강상의 문제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투자자의 말을 듣고 투자한 거금을 대부분 잃었으며, 룰렛 광이었던 그는 남은 돈마저 도박으로 날렸다. 궁핍한 재정 상황이 그를 더욱 쇠약하게 했을 것이다.

1879년에 시작한 러시아 연주 여행도 1880년 2월 14일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의 연주를 마치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시절 제자였던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후원자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그를 돌봐줄 것을 부탁했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였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친구들은 그와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었다. 그럼에도 비에니아프스키는 모든 도움을 뒤로한 채, 불과 4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모스크바의 폰 메크 저택에서 숨을 거뒀으며, 폴란드 바르샤바의 포봉스키 묘지에 묻혔다.


▲ 2011년 개최된 제14회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현장. 바이올리니스트 윤소영이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콩쿠르로 부활했다. 1935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바르샤바에서 시작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의 첫 우승자는 20세기 중반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네트 느뵈였으며, 2위는 옛 소련의 거장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였다. 이후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 콩쿠르는 1952년부터 5년마다 열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1952년과 1957년에 비에니아프스키의 얼굴이 인쇄된 폴란드 우표가 발행됐으며, 1979년에는 100 즈워티 동전에 새겨지는 등 폴란드인들은 오래도록 그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글 송주호
클래식 음악은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기고와 강의를 하고 있다. 음악회를 위해 프로그램을 짜거나 해설자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현재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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