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는 마르크 민코프스키와 루브르의 음악가들의 새로운 도전
시대악기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가 바로크 고전에만 머무는 건 오래전 트렌드가 됐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마르크 민코프스키도 자신의 표현대로 ‘포식성’ 지휘자 중 한 명이다. 일본으로 날아가 브루크너를 지휘하고 잘츠부르크에선 모차르트를, 폴란드에선 스트라빈스키를 해석하는 최근 모습을 보면 그가 프랑스 바로크의 총아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연주회장뿐 아니라 스튜디오 안에서도 그렇다. 2000년대 후반 아르히프에서 나이브로 레이블을 옮긴 뒤 비제 관현악과 슈베르트 교향곡, 하이든 교향곡을 거쳐 지난해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녹음하면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은 끝 모를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은퇴하고 존 엘리엇 가드너가 황혼기를 맞고 있는 현재, 같은 계열(?) 지휘자 가운데 민코프스키의 존재감은 단연 빛난다. 그는 어떻게 륄리와 라모의 프랑스 바로크와 헨델 전문 해석가에서 미래의 바그네리안을 꿈꾸는 전위적인 혁명가가 되었는가.
19세 때 루브르의 음악가들 창단
민코프스키는 196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드르는 프랑스로 이주한 폴란드인으로 일반 백과사전에 등재돼 있을 만큼 저명한 소아과 전문의다. 알렉산드르의 양친 역시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 정신과 의사였다. 특히 폴란드계 러시아인인 조부 예브게니는 정신분열증 분야의 대가였는데, 민코프스키는 2008년 비제 음반(Naïve)에서 폴 고갱의 광기와 예술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예브게니의 저서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미국 출신의 모계도 만만치 않는 명문가다. 어머니 앤 웨이드는 당대 유명한 번역가였으며, 그의 모친, 즉 민코프스키의 외할머니 에디스 웨이드는 제오르제 에네스쿠와 카를 플레슈를 사사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에디스 웨이드는 오늘날엔 크게 기억되고 있지 않지만 1915년 뉴욕 데뷔를 비롯해 그의 연주회 뉴스는 종종 뉴욕 타임스 지면을 장식할 정도로 당대엔 화제를 몰고 다녔다. 에디스의 증고조부는 미국의 유명 탐험가이자 미주리 주 주지사를 역임한 루이스 클라크다. 민코프스키가 프랑스와 미국, 이중 국적을 갖게 된 이유도 유럽과 신대륙의 피가 흐르는 혈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코프스키는 어릴 적 자신의 음악적 소양이 양쪽 조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
민코프스키는 10대 초반 파리고등음악원에서 바순을 배우고 1980년 졸업과 동시에 바로크 음악 전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다. 젊은 시대악기 연주자들은 통상 한 악단의 전속보다는 여러 악단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 민코프스키 역시 필리프 헤레베허가 이끄는 라 샤펠 루아얄을 비롯해 윌리엄 크리스티의 레자르 플로리상 등에서 바순 파트를 맡았다. 헤레베허가 녹음한 첫 번째 바흐 ‘B단조 미사’와 초기 칸타타 녹음(HMF)은 기악 연주자로서 민코프스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바흐 미사의 ‘쿠오니암’에서 바리톤 피터 코이를 반주하는 리드미컬한 바순은 명반이 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복수의 악단에서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코프스키는 바로크 레퍼토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다. 그러면서 연주자 출신 지휘자가 대부분 그러하듯 ‘내가 직접 악단을 이끌고 음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을 싹틔웠다. 음악원 시절 틈틈이 독학으로 지휘를 익힌 그는 미국 메인 주 피에르 몽퇴 음악원에 유학하며 피에르 몽퇴의 수제자였던 샤를 브뤼크를 잠깐 사사한다. 그리고 대부분 음악인이 한창 배움의 과정에 놓여 있을 나이인 열아홉 살에 베르사유를 근거지로 한 자신의 악단 ‘루브르의 음악가들’을 창단했다.
유려한 현의 사운드와 극적인 다이내믹
가디너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만든 나이가 21세이고, 아르농쿠르가 빈 심포니의 첼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를 창단한 게 24세 때다. 민코프스키가 악단을 만든 19살은 기네스북에 이 부문이 있다면 등재될 만큼 진귀한 기록임에 분명하다. 민코프스키는 짧은 오케스트라 경력을 바탕으로 베테랑부터 실력파 신인을 망라해 수준급 연주자들을 불러 모았다. 초기 단원 중 첼리스트 브뤼노 콕세와 오보이스트 위고 레인은 현재 지휘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중견급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민코프스키는 여러 지휘자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앞서 언급한 아르농쿠르와 가드너를 롤 모델로 꼽고 있다. 이는 음악 해석을 좇기보다는 그들처럼 레퍼토리의 한계를 특정 영역에 두지 않고 싶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광폭의 행보를 이어가며 민코프스키는 두 선배 지휘자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양측을 가르는 차별점 또한 분명하다. 아르농쿠르와 가드너가 레퍼토리에 맞춰 현대 악단을 다양하게 기용한 것과 달리, 민코프스키는 최소한 스튜디오 안에서는 ‘루브르의 음악가들’을 고집하고 있다. 바그너까지 시대악기를 통해 구현한 점에서 민코프스키는 로저 노링턴과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시대악기 양식을 그대로 바그너에까지 적용했던 노링턴과 달리 민코프스키는 연주 스타일을 시대에 맞춘다는 점이 다르다. 너그럽게 허용하고 있는 현악기의 비브라토가 그 대표적인 예다. 많은 시대악기 연주자가 “어떤 경우라도 비브라토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민코프스키는 이들을 ‘노 비브라토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한다. 민코프스키는 “비브라토는 관현악 장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면서 “물론 과다한 사용은 음악을 끈적이게 할 위험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원전(Authenticity)이란 이름으로 직선적이고 피상적인 소리를 내는 건 참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선지 루브르의 음악가들을 들을 때 첫 번째 귀에 들어오는 특징은 유려한 현의 사운드다. 이 같은 평가에 대해 민코프스키는 “내가 바순 주자라서 관악 파트에 대해선 일단 확고한 자신감과 믿음이 있다. 반면 현악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집중해 연습해서 그런가?”라고 농담 섞어 반문한다. 라모의 관현악에서 느껴지는 현의 팽팽한 장력이나 슈베르트 교향곡에서 햇빛을 반사하는 듯한 눈부신 윤기는 비평하려는 마음을 해석 이전에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전체의 밸런스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항상 탄탄한 음의 레이어를 형성하는 목관도 민코프스키 음악의 ‘낙관’과 같다. 그의 말대로 바순 주자 출신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지만, 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모니’(harmonie, 고전주의 시대까지 목관음악을 지칭하던 용어)를 중시한 시대 양식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관악기의 존재감을 빛내는 스타일은 바로크 레퍼토리뿐 아니라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이나 비제 관현악 곡같이 민코프스키가 2000대 녹음한 낭만주의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유려하고 명징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민코프스키가 구사하는 다이내믹은 항상 극적이다. 바로크, 특히 프랑스 레퍼토리에서 다른 지휘자들보다 진폭을 양쪽으로 한 뼘 더 늘려 악상을 더욱 화려하게 강조하고 있다. 베르샤유를 상징하듯 호사스런 음표와 셈여림 기호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이 같은 다이내믹은 종종 빠른 템포를 수반하게 마련인데, 바흐의 ‘미사 B단조’(Naïve)나 헨델의 ‘메시아’(Archiv)의 일부 악장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2년 만에 민코프스키가 루브르의 음악가들을 이끌고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한다. 지난 2년 동안 민코프스키의 커리어엔 다양한 이력이 추가됐다. 2013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이 주관하는 모차르트 주간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 됐고, 지난해엔 프랑스 보르도 오페라와 계약해 올여름부터 오페라 극장을 이끌게 된다. 2008년부터 맡은 폴란드의 간판 악단 신포니아 바르샤바의 지휘 비중을 높이면서 레퍼토리도 자연스럽게 확장됐다. 여기선 거슈윈과 존 애덤스 등 신대륙 작곡가에 도전하며 ‘절반의 미국인’이란 자부심을 음악으로 드높인다.
바로크와 낭만 아우르는 레퍼토리
3월 내한 연주회에서 선보일 음악은 2년 전 들려주던 라모의 관현악 모음인 ‘상상 교향곡’과 글루크의 발레곡 ‘돈 후안, 혹은 석상의 연회’, 그리고 낭만주의 레퍼토리인 멘델스존 교향곡 3번과 슈베르트 교향곡 9번이다. 라모는 민코프스키의 작곡가 중 한 명만 꼽으라면 애호가 입장에서 반드시 선택해야 할 작곡가다. 에라토와 아르히프에서 녹음한 라모의 오페라 발레극은 민코프스키의 스승이자 이 분야 개척자인 크리스티의 성과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옥같은 관현악곡을 뽑아 2004년 발매한 라모의 ‘상상 교향곡’(Archiv)은 작곡가의 오케스트레이션 솜씨가 성악을 다루는 것 이상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명반이다. 합주의 디테일과 화려한 수사에서 같은 시도를 먼저 했던 레이먼드 레파드와 프란스 브뤼겐(둘 모두 Philips)을 압도한다. 널리 알려진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중 ‘야만인의 춤’은 다른 모든 연주를 고리타분하게 만들 정도로 거친 마성의 매력이 있다. 현과 관이 휘몰아치는 ‘다르다뉘’ ‘탕부랭’과 단조의 음울한 정서를 달콤 쌉싸래하게 표출한 ‘레 보레아드’ 콩트르당스는 양극을 치닫는 라모와 민코프스키의 음악 철학을 동시에 보여주는 지표다. 첫 내한 연주회에서 민코프스키는 음반과 동일한 수준의 앙상블에 현장감을 담아 청중을 매료시켰다. ‘야만인의 춤’을 앙코르 곡으로 다시 한 번 들려주며 즐거움을 배가시키기도 했다.
2년 전과 달리 민코프스키는 이번 내한 연주회에 이틀의 공연과 멘델스존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프로그램을 추가함으로써 자신이 낭만주의 해석가고 루브르의 음악가들이 범용 오케스트라임을 한국 팬들에게 직접 알려준다. 슈베르트 9번 교향곡은 2012년 슈베르트 교향곡 전곡 음반(Naïve)에서 들었듯 군살을 뺀 담백한 해석, 그 속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선율미를 기대할 수 있다. 멘델스존의 교향곡은 민코프스키가 2016년 2월 들어 처음 지휘에 도전한 작품이다. ‘스코틀랜드’로 알려진 3번 교향곡은 악단의 본거지인 그르노블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서울에서 전 세계 세 번째로 선보이는 작품이니만큼 국내 팬들에게는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사진 신나라미디어